728x90

 

 

출항기出港記 / 한기홍


그러니까 출항은

이제 막 씻김굿을 털어낸 갈망 따위들이

그악한 노스텔쟈 침향을 입술에 바르고

해신海神에게 내미는 첫 키스다


망망한 새벽노을

그 장쾌한 해신의 치맛자락에 출어깃대를 높이 걸면

아득한 시대를 휘돌아오는 장관,

아라비안 카펫마냥 늠실대는

지중해 마케도니아 선단의 황금갑주 광휘가

21세기 고깃배 이물에 부서진다


나는 어부다

한 삼십 여년 뭍에서 황금을 ?다가 꺾여

꿈 따윈 페기 되고, 누항 오십 줄에

절망의 코뚜레에 워낭소리만 가득안고

이 두려운 창해에 내던져진

79톤 안강망 제3연근해호 갑판원


여명에 거뭇거뭇 선들이 뭉뚱그려진

포구는 언제나 모태신앙처럼 안온한데,

방파제 너머 이어도횟집 아슴프레 처마 쪽으로

내 심안 주낙에 걸린 애절한 그리움 몇 가닥

환영처럼 출렁 인다


출어닷 출어

시나브로 짙어지는 새벽노을

선적물목 점호 마치고, 금빛 여명 등짝에 진

김선장 뾰족한 갈치 주둥이엔

만선기원 입어신고入漁申告가 싱그럽다


왜 그리 서글피 살아왔을까

포구가 주먹만 해졌을 때까지 우두망찰

갑판대신 멀어지는 육지를 보았다

사물의 속성은 굳어 있는 게 아니라서

모든 게 유전流轉되기도 하는 법

아내와 아이들은 또다시 오지의 갈대처럼

아비를 기다리며 살겠지


어젯밤 포구 해당화모텔에서 부둥켜안은

가족들의 설운 등짝에선,

모질고 질긴 희망의 끈을 적신 오열이

인류의 역사같이 깊게 흘렀었지

이 왜소한 인간 하나의 포한이 이만큼이라면

정녕 이 바다의 질곡은 얼마나 깊을 것인가

그 얼마나 깊을 것인가


쩌엉 쩡

아슴한 수평선 너머에 불콰한 해명海鳴이 지나간다

신비로워라

저만치 튀어 오르는 날치 떼 은빛 비늘이

이 세상 모든 영욕 위에 빛나고 있다

아 아아

살아야 하네, 힘써야 하네, 아름다워져야 하네

저 은빛 날개는 바로 내 꿈의 현신인 게야

강퍅했던 내면에 섬광처럼 투영되는

환희의 빛이여, 존귀한 삶의 오의奧義


뿌우우 뿍

뱃고동 소리는 유심론唯心論이다

대양으로 나가는 길목엔 항상 흩어진 꿈들이 모인다

그래서 파도는 철썩 그리운 사람들 어깨를 친다

이제 양망揚網물목엔 황금조기, 바라조기, 깡치 말고도

그리움 한 상자 넉넉하리

서기어린 새벽 별, 인간의 길을 묻는다

저 광막한 우주대평원 안드로메다 성운 어느 바다

한 생령의 꿈도 나와 같으리


그러니까 출항은 해신에게 내미는 첫 키스다





하선전야下船前夜


정씨는 이미 잠들었는지 고요하고

선실 구석에서는 김씨의 '봄날은 간다'가 흘러 나왔다

붕장어 이빨에 손등 찔리우며 익은 가락이지

이따금 숭어 튀는 소리 피안처럼 들리고

마스트 갈매기 잠꼬대가 진하게 가슴을 쳐온다

그럴수록 나는 퇴화 된 내 시잔詩殘, 폐공 속에 누워있는

나의 오랜 형해形骸를 더듬어 보았다


아무리 쓸쓸해도 이웃 침상에 누워있는

저 친구처럼 고적할까

항상 수평선 별빛에 젖어 이운 '봄날은 간다'

오늘 밤뿐이라니

김씨도 이제는 하선을 셈하고 있겠지

옆자리 이씨의 코고는 소리가 상두꾼 만가소리 같다

뭍에 들어가도 싯누런 유전流轉임을 왜 모르겠나

선창에 부서지는 포말 소리가 '봄날은 간다'에 애잔하다

그럴수록 나는 배 밑창 아득한 저 심연 속에 가물거리는

퇴화 된 내 시잔詩殘, 폐공 속에 누워있는

나의 오랜 형해形骸를 더듬어 보았다


우르르 꽝 푸수수

밤 파도가 점점 높아지니 육지가 가깝다

애초에 바다로 나올 때 돌아간다는 신념은 없었다

어부의 신조는 파도와 바닷고기와 갈무리된 그리움 몇 조각인 걸

목울대 꺼이꺼이 대며 사무친 보고픔에 떨다가도

깡소주 한 사발에 그 피멍을 삭혀 버렸었지

아 미칠 것 같이 그리운 얼굴들아

술대접에 어리는 모습들이 해리海里에 아롱지는 구나

그럴수록 나는 퇴화 된 내 시잔詩殘, 폐공 속에 누워있는

나의 오랜 형해形骸를 더듬어 보았다


그날 밤 포구에서 아내와 아이들이 불러주었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아직도 그 부두 선창어귀를 맴돌고 있을까

모진 인생유전, 설움뿐인 명함마저 그립구나

북받치는 오열을 막으려고 모포에 머리를 박은 채

코고는 이씨 곁에서 경련이 시작된 손끝을 털었다

그럴수록 나는 퇴화 된 내 시잔詩殘, 폐공 속에 누워있는

나의 오랜 형해形骸를 더듬어 보며

선창에 비스듬히 굴절 된 달빛에 버무려진 이중창

'봄날은 간다''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숨죽여 불러보며 찌들은 머리털을 움켜쥐었다


파도를 이기며 재기의 꿈을 쌓아 가는 어부들을 기리며





남양南洋에서 띄우는 편지


그대 강녕하신지요. 사이클론이 하늘 우의를 두르고 대양 수평선을 휘돌아 올 때, 그대를 수소문하는 나의 궁휼한 동정이 들려옵니다. 지난여름 남방 어느 무인도 백사장에 서있었다고도 하고, 산호초 우거진 남양군도 우림 속에서 엉금엉금 기어가던 애처로운 모습이 보였었다고도 하고. 그러나 사실이면서도 모두가 호사꾼들의 유비통신들이지요.


파도는 언제나 속삭이듯 내밀히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슴을 때리죠. 그대 강녕하신지요. 당신이 늘 종려수를 그리며 가냘픈 이파리에 편지를 쓴다고 해서, 항해 내내 마스트에 올라 포경선 작살잡이 마냥 해면을 뒤집어보기도 하고, 언젠가는 그대가 북빙양 푸른 물에 섬섬옥수를 담근다 해서 내 가엾은 심상이 북쪽을 향해 비탄을 떨구기도 했습니다.


아 먼 노정 항해는 나를 새우등으로 만들었습니다. 야자수 사이로 적도선赤道線 방랑자의 별들을 보기도 했고, 해조음이 되어 파랑 위에서 독백하기도 했어요. 돌아보니 그 풍진의 허한 그림자들이 육탈된 허무였음에 애상의 입술을 지그시 깨뭅니다. 문득 비탄으로 흐르는 상어 빛 애증 또한 절대고독이라는 것도.


그래요. 그대를 향하는 나의 우매한 유비통신과 맹목의 헌사들이, 어쩌면 나보다 더 고독한 당신의 순구한 눈망울에 투영되길 바라는, 아프로디테를 그리는 푸른 슬픔이란 것도. 그러나 이제야 알았어요. 아아 나와 그대의 천만리 심연에 떨어지는 모든 것들을 무조건 사랑하라는 신의 말씀을.


그대 오늘도 강녕하신지요. 바다는 가까이서 보면 요란한 눈물 꽃을 피우지만, 고산준령 그윽한 구름을 딛으면 둥글디 둥근 원일뿐이지요. 그대여 나에게 구원한 사랑을 띄워 주십시오. 쇠락하는 인간의 갈망 위에 온유한 바람꽃을 피워주오. 이제 우리의 만년설은 녹아 흘러서 남십자성, 저 요원한 별빛 속에 이 시대를 증거 하는 사랑으로 존재하리니.


- 남태평양 서사모아 Apia, 12트롤어선 2등항해사 고독이

대한민국 서울의 그대에게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