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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와 나 / 제인자

 

 텃밭 상추잎에 따라온 달팽이

수돗물 세례 받고 빗장을 지르면

안으로 걸어 닫은 캄캄한 한 채의 집이지요

무른 달팽이보다 되레 놀란 나는

푸른 잎 쌈 싸 먹고 푸른 똥 누는

느리고 답답한 채식주의자

푸성귀 식탁이 나를 부르는 사이

그는 안테나 내밀어 적진을 탐지하지요

무른 달팽이보다 더 무른 나에게

쑥갓깻잎오이가지가 어찌하여

뼈가 되고 힘줄이 되는지요

쌀보리콩수수가 어찌하여

피가 되고 살이 되어

눈물의 기도가 되는지요

한 채의 집을 들어 올려 텃밭으로 가는 나는

느리고 답답한 채식주의자

푸른 잎 갉아먹고 더디 깨닫는

무른 달팽이보다 더 무른 나는

 

 

 

 

 

[수상소감] 텃밭 일구며 부활은혜 체험, 서두르지 않고 천천이 갈 것

 

작년엔 텃밭을 일구어 재미가 쏠쏠했어요. 상추, 쑥갓씨를 뿌리고 고추, 가지모도 내고 토마토, 오이 모종을 세우고 호박 구덩이도 팠어요. 그러나 척박한 밭뙈기에 연둣빛 새순이 오르자 유기농 농사의 친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죠. 생식을 즐기는 벌레들의 잔치, 그러니까 한솥밥 먹는 식구처럼 벌레들과 친해지기로 작정했던 봄, 여름이 가는 동안 내 안에서 날마다 부활하는 은혜를 깨달았어요. 무른 달팽이가 햇볕에 말라죽지 않도록 몸에다 집을 붙여주신 하나님, 지워주신 내 짐이 아버지 배려인줄 압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따라가겠습니다.

 

 

 

- 국민일보 신춘문예회 저 <빛에 궁글려진 계명>(시산맥 감성기획시선 015)

 
 
 
 

[심사평] “한편 한편, 놀라운 시적 이미지로 신앙의 본질에 접근”

 

자연의 사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작품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숨겨져 있다. 이 사물들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뜻을 순수감각으로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만진 느낌을 언어로 형상화한 것이 시적 이미지이다. 현대시를 사물시(事物詩)라고 하는 것은, 현대시의 창작이 곧 사물의 속성을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물의 속성(屬性)이 곧 하나님의 뜻이며, 창조원리이며, 우주정신이다. 이처럼 사물과의 교감(交感)이 이루어지는 것을 ‘신과의 대화’라고 한다. 나를 비워 빈 그릇과 같이 될 때 성령이 오시어 내 순수감각과 교감하는 것을 방언이라고 한다. 시적 이미지는 곧 그 시인의 방언이며,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대상(大賞) 작품을 결정하기 위해 두 분의 심사위원이 숙의한 끝에, 제인자의 ‘달팽이’를 선정했다. 나의 생각과도 일치하여 이의 없이 결정되었다. ‘달팽이’는 딱딱한 집을 지고, 푸성귀 잎을 먹고 사는 무른 몸의 생물이다. 그가 “수돗물 세례 받고 빗장을 지르면 / 안으로 걸어 닫은 캄캄한 한 채의 집이지요”에서 보듯, 달팽이의 생태적 속성을 그냥 제시했지만, 이 두 행에서 많은 것을 읽을 수 있다. 이런 것이 바로 이미지의 형상화이다. 형상화된 이미지는 비유와 상징의 보고이다. 시인은 달팽이와 나의 생태적 속성을 이미지로 형상화함으로써 신앙의 본질에 접근하고 있다. 이 작품의 키워드는 ‘무른 몸, 딱딱한 집, 채식’이다.

 

다음으로 김승철의 ‘은총’을 최우수로 선정해 내놓았다. 나도 동의했다. 김승철은 ‘은총’이란 기독교적 관념어를 제목으로, “새가 못이 되어 날아와 박힌다 / 외마디 신음만 들릴 뿐, 추락하는 그림자 사이로 / 달이 새파랗게 질려 보고만 있다”에서 보듯, 어떤 극적 상황의 분위기를 상징하는 이미지를 제시한다. ‘은총’이란 관념을 순수감각으로 느낄 수 있게 하려면 이런 상황적 이미지로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시인의 뛰어난 상상력이 ‘은총’이란 영적 현상을 느낄 수 있는 상황적 이미지로 형상화한 것이다. 이 작품의 키워드는 ‘새, 못, 나무’이다.

 

그리고 정미경의 ‘그렇다면, 나사들은’과 유지호의 ‘해질무렵에’를 우수로 선정했다. 정미경은 “낡은 옷장 하나 / 아파트 공터 한쪽에 웅크리고 있다”로 시작하여, 낡은 옷장의 해체과정을 이미지로 형상화해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 쓰던 가구에서 나무라는 본질로 돌아가는 옷장의 빈 곳에 “차곡차곡 수납되는 먼지들의 나이테 / 문득 날아든 풀씨 하나 싹을 틔우고”에서 보듯, 많은 비유와 상징을 안고 있는 이미지가 놀랍다.

 

유지호의 작품은 “붉은 울음이 온 바다를 적시고 있다”로 시작하여, “그래서 하나님은 붉은 눈물로 하루를 돌아보게 하는가 보다”라는 신앙적 언술로 마무리한다. 또한 “어둠이 한 올 한 올 매듭을 지으며 다가와도”와 같은 아름다운 은유가 “불꽃처럼 타오르는 믿음은 꺼질 줄 모른다”와 같은 직유의 이미지로 마무리한다.

 

많은 작품이 응모되기도 했지만 작품의 수준도 그만큼 상승했음을 느꼈다. 국민일보의 신춘 신앙시 공모는 참으로 하나님이 내리신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 심사위원장 유승우(시인, 문학박사, 인천대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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