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고삐 / 권수진
이 땅에 나약한 짐승으로 태어나서
종신토록 일만하며 살아왔다
순종을 덕목으로 우기는 세상에서
식솔을 거느리는 가장이었으므로
스스로 코청에다 구멍을 뚫었다
주인이 쇠줄을 잡아당길 때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안으로 삼켰다
초원을 마음껏 누비는 자유보다
우직한 남편의 길을 걸어갔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자식들
되새김질하며 묵묵히 쟁기를 잡았다
복종을 미덕으로 강요하는 세상에서
고통의 크기만큼 황폐했던 광야는
점차 기름진 땅으로 바뀌어갔다
다만 자상한 아버지이기를 포기했을 뿐
박봉을 쪼개가며 악착같이 살았던
아내의 야윈 손이 거칠어졌을 뿐
무럭무럭 자라나는 어린 자식들에게는
코뚜레에 족쇄를 채우고 싶지 않았다
가끔씩 구멍 뚫린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아버지도 고삐를 풀고 음머어- 음머어-
목 놓아 울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우수상] 벼는 쉬이 눕지 않는다 / 조철형
벼는, 바람이 제 허리를 감싸 안고 유혹해도
쉬이 눕지 않는 다
간혹, 제 입술을 훔쳐가는 얄미운 비를 따라
쉬이 길을 나서지도 않는 다
바람이 가슴을 뚫고 지나갈 때마다 외로움이 커가도
발끝까지 온통 눈물처럼 비가 적셔도
마지막 그리운 임을 기다리며 뿌리를 깊게 내린 다
중천에 오롯이 빛나는 임에 대한 사랑이 깊어 갈수록
수줍음만 자라난 다
한낮의 태양이 내리쬐면
벼는 부끄러움도 모른 채 들녘에서 옷을 벗는 다
빛나는 한때를 위해 제 어깨를 태워버린다
뜨거운 제 사랑과의 강렬한 입맞춤이 끝난 후
제 안에 숨 쉬는 사랑의 씨 톨을 단단하게 만든 후
시집가는 처녀인 양 고개가 땅에 떨어진 후
서산에 떨어지는 태양을 따라 딱 한 번 길을 나선다.
[우수상] 호조추야수
바다는
천년을 *호조벌로 꿈을 안고 달려와
하얀 제 속살을 다 드러내놓고 만삭의 몸을 날마다 풀었다
바다가 몸을 푼 날은
바다의 눈물이 햇볕에 은빛처럼 반짝거리고
바다가 품고 온 풍어들은 허공에서 늘 제 비린내를 털어내었다
이제 바다는 더는 달려오지 않는 다
풍어는 제 비린내를 털어내려
다시는 파닥거리며 날아오르지 않았고
일렁이며 달려오던 바다보다 먼저 눕던 갈대와
바람과 입맞춤하던 게들의 이별도 사라졌다
사람들은 바다가 영원히 잠든 이곳에서
바다의 비늘을 줍는 일도 탯줄을 묶는 일도 하지 않는 다
바다는 다시는 달려오지 않았고
바람도 바다를 밀고 더는 오지 않는
파닥거리던 풍어들의 비린내가 사라진 들녘에서
바람과 별과 나는 또다시 천년의 꿈을 꾼다.
* 호조추야수는 시흥시 매화동 및 하중동 앞 뜰(시흥팔경 중 하나)로 조선 경종 1년(1721) 무렵에 완공된 방죽으로 인하여 형성된 시흥시 중부의 넓은 벌판을 말한다. 염전지대를 간척사업으로 하중동과 포동에 방대한 농경지가 새로 조성되었고 이를 농민들에게 경작하게 하였다. 시흥의 곡창지대로 호조에서 막았다하여 호조벌, 호조들, 호조방죽이라고 부르며 가을 황금들녘이 매우 아름답다.
..........................................................................................................................................................................
고향의 가을
고향은
언제나 바람의 가슴에 그리운 꿈을 꾸게 한다
향수가 어린 들녘엔
삶의 한 조각 푸른 그림들이
의미 있게 그리운 향기를 잔잔히 자아내며 바라본다
가을에 바라보는 내 고향 하늘은
꿈에서라도 불러보고 싶은 그리운 이름들을 찾아서
돌아온 자식들을 지긋이 바라보는
사랑하는 임이 머무는 곳이다.
......................................................................................................................................................................
가을걷이
낙엽 지는 오후
타 악 탁 도리깨 질 하는 한 여인 있어 다가서니
바람도 고요한데 들깨 냄새 지척을 뒤흔들어
구수한 향기에 취한 바람
어느새 고향 하늘을 날고 있다
떠나 올 때마다
어머니께서는 들기름, 참기름 한 병씩 주셨다
그때는 미처 몰랐다
그 깊은 사랑을.
..........................................................................................................................................................................
허수아비
누런 저 들녘
여기저기 나불나불 춤추며
헤죽헤죽 웃는 우리님들
주인들 마음 하나같이 풍년 기원하나
이곳저곳 방향도 제 각기
아들 생각 딸 생각
하늘 나는 참새생각
이웃 집 바라보다
살며시 얼굴 붉히는
그대는 수줍은 허수아비.
............................................................................................................................................................................
가을의 주인
가을 아침
들녘마다 햇살이 꿈들을 내려놓는 다
저 빛깔들을 보라
빛으로 해마다 승천하는 꿈들의 향연을
저마다 꿈을 품고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들은
가끔은 휘어질지언정 아주 눕지는 않는 다
가을에 빛나는 것은
한낮의 태양과 이 땅에 살아 숨 쉬는 생명, 생명들
오늘도 저 충만한 빛깔들의 아우성을
사랑하는 벗들에게 나르느라 바람이 분주하다
가을에 허기진 것들은
밤이 되면 어둠의 비늘 하나라도 매일 품어야 한 다
텅 빈 가슴을 파고 들 겨울바람이 다가오기 전
한 겹 바람막이라도 만들어야
제 각각 가을의 주인이 될 수 있을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