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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 / 이은림

 

 

1
 달은 제 몸을 부풀리며 신음한다 月下, 나도 식은땀 흘리며 앓고 있다 창을 타고 흐르는 달빛, 붉다 양손바닥에 달빛 고인다
덜거덕덜거덕, 갑자기 귓속에 쌓이기 시작하는 소리 희미한 사각의 어둠이 흔들린다 달포 전, 이사오면서 두고 온 녹슨 세탁기의 웅얼거림 같은 저 소리 나는 눈을 감는다

 

2
 절은 때투성이의 나를 삼키고 덜거덕덜거덕 쉴새없이 웅얼대는 세탁기, 싸구려 세제와 표백제가 내 몸을 에워싼다 누런 호스가 붉고 비릿한 찌꺼기를 토해낸다 아흐,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다 위태로운 빨랫줄에 걸려 너풀거리는 텅 빈 내 가죽, 허옇게 탈색된 채 버석버석 메말라 가는 나를 노려보는 세탁기도 빠른 속도로 늙어가기 시작한다 

 

3
 창문 가득 끈적거리는 붉은 달빛, 흐른다 내 몸에서 빠져나간 것들이 창백하던 달을 가득 채워 놓았다 부푼다 넘쳐 흐른다 저 달 그러다 어느 순간, 붉고 뜨거운 것을 다시 내 안에 밀어 넣는다 차갑게 지친 몸 쓰다듬는 달의 손가락들 나는 필사적으로 몸을 구부린다 굳어버린 뼈들을 부러뜨려가면서

 

4
 천지사방으로 흩어지는 달빛의 신음,

누가 이 깊은 밤에 빨래를 하나 웅웅거리는 세탁기 소리가 어둠을 돌돌 만다 머리 속은 어느새 소용돌이로 가득 찬다 붉은 알약을 물과 함께 삼킨다 서쪽 창을 기웃거리며 지나가는 달, 제 살들을 내게 조금씩 옮겨 놓으며 그렇게 가라앉는 저 붉고 끈적한

 

 2001년 <작가세계> 등단작

 

 


사거리 정육점 / 이은림

 

 

 후두둑, 난데없는 밤소낙비다 빗물이 사방으로 튀어오른다 옷자락이 젖고 머리카락이 무거워진다 빗방울을 핑계 삼아 안경은 마음껏 세상을 왜곡시킨다 일그러지는 붉은 빛, 몇 개의 십자가가 공중에 삐딱하게 떠 있다 오호, 붉은 빛은 바닥에도 있다 축축하고 끈끈한 저것 희희락락 하는 것 어둠의 거친 살을 핥는다 어둠은 기우뚱한다 신음한다 골목 끝으로 달아나며 뒹군다 낼름대는 혓바닥 공기는 다시 눅눅해진다 사거리에는 정육점이 있다 유곽의 한 켠처럼 음침하게 환한 곳 살집 좋은 암소 뒷다리 붉은 불빛 뒤집어쓰고 매달려 있다 바둥거린다 뚝뚝 떨어지는 피 아직도 붉고 선명하다 사라진 몸 찾아 돌고도는 따스한 피 정육점 여자의 손등에 투둑,

 

2001년 <작가세계>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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