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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청옥산에서 / 임종훈


그 산을 찾아가는 길은 멀고 힘들어

사람도 차도 늦재 발치께에 이르면

숨이 턱까지 차올라 저 높은 고개

어찌 넘을까 아득해지는데 힘든 만큼

그 산에 들기만 하면 공으로

저잣거리에서의 오래되어 묵은 숨들을

날것 그대로의 싱싱한 숨들로 바꾸어

감히 불사(不死)를 꿈꾸지는 못하더라도

마치 한 목숨 새로 얻은 듯할 터이니

기꺼이 넘지 않고 어쩌겠는가?


산에 들면 산의 법칙을 따라야 하는 법.

불길로 타오르다 스러져 그 안에 재로

두텁게 쌓여 있을 세간에서의 시시(是是)

비비(非非) 따위는 남김없이 털어 내고

대신 텅 빈 그곳에다 그늘조차도 훤한

산의 깊은 속내 한움큼 심어볼 일이다.

아름드리 나무들의 오랜 사색(思索)이

은은한 향(香)으로 떠도는 원시(原始)의 숲에서

고요히 눈감고 앉아 깊은 숨 들이쉰다.

가슴속에서 쉴새없이 와글대던 말들이

일시에 차분해지며 내 안에도

침묵의 산 하나 만들어진다.

다시 말로써 말많은,

수다스러운 세간(世間)으로 내려가도

들리는 말들에 연연해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쉬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청옥산에서는,

무심한 바람이 나무의 겨드랑이를

스치고 지나는 파도소리나

골 따라 흐르는 물소리, 심지어

꽃이나 잎들이 피고 지는 소리조차

오랜 묵언(默言)의 수행(修行) 끝에

비로소 입을 연, 산의 한 소식만 같아

모름지기 귀를 세우게 된다.


늦재:현동과 태백을 잇는 고개의 이름


 

 

 

 

금상


 

나는 산을 보았다 / 최영미


바라만 보았을 때는 알지 못했다

하늘은 점점 낮아지고

구름은 유유히 발 아래로 흐르며

바람은 어디에도 부딪침 없이 나에게로 온다는 것을,


바라만 보았을 때는 알지 못했다

이름모를 야생화 한 송이에도 동공이 열리고

가슴이 어느새 나무를 향해 서면

몸은 말없이 가벼워져 잠시 세상을 잊기도 한다는 것을,


바라만 보았을 때는 알지 못했다

나와 가까이 걷고 있는 사람과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과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의 향기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바라만 보았을 때는 알지 못했다

먼 산은 멀리에 있을 뿐

봉우리에 오르지 않고는

산을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산을 보았다고 말하며 살고 싶다.


 

 

 

 

은상

 


 

미루나무 / 이근창


몸 가득 이파리들 짊어지고 강가에 사는 미루나무

문득 살찐 젖가슴에 푹 안기고 싶어진다

땀 뻘뻘 흘리며 서 있는 미루나무는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긴 목을 빼어

사방을 쉴새없이 두리번거리고 헤아릴 수없이

많은 손바닥들을 흔들어 반짝반짝 누구를

애타게 부르고 있다


지친 바람들 가슴에 안았다 떠나보내고

어스름에 찾아오는 집 없는 새들 재워 주고

진종일 울어대는 매미들 등때기에 업고

아무도 반기지 않는 흉물스런 벌레들 끌어안고

물 속에서 나오지 못하는 송사리들 그늘 드리워 덮어주고


아하, 알겠다 천수천안관음보살처럼

미루나무는 푸른 이파리마다 밝은 눈 열어

세상의 아픈 소리들을 읽는구나 그리하여

서러운 것들 모두 불러모으는 것이다




 

동상

 


광릉 숲에서 / 정애자


올망졸망한 복수초 제비꽃 진달래 얼레지 다투어 피는 광릉숲길로 접어드니

한 움큼 마신 숲의 공기 내 폐부로 흘러들어가 어디까지 물처럼 흘러들어 오는지

가도 가도 광릉 숲 끝나지 않고 습지원 푸른 이끼와 원추리를 지나서

수생식물원 창포와 수련의 잎을 만나고 관목원, 고산 식물원, 활엽수원 지나는 길에는

이리저리 뛰노는 다람쥐들 정겹다

이렇게 한가롭게 광릉숲길을 걸어가니 나는 한그루 나무.

걸어 다니는 나무, 내 흔들리는 팔에 나비 떼 와 앉고

내 걸어가는 다리에 풀잎이 와 매달린다.

아 광릉 숲 향기에 나는 잠시 섬백리향, 그대는 금강봄맞이꽃,

졸망졸망 따라오는 아이들은 눈이 부신 초롱꽃,

광릉 숲은 하루 쉬었다 가는 시골집 뒷마당처럼

가도 가도 아직 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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