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수목원에서 / 박재근
이른 아침, 빗살무늬 햇살이 온 수목원을 뛰어다니자
주부 크낙새는 강인한 삶을 부리로 담고
맛있는 아침 성찬을 위해 나무들을 노크하기 시작했다
청설모는 나무와 나무 사이를 곡예하며
잠에서 깨지 못한 산새들을 흔들어 깨웠고
아직 어리광이 남아 있는 유치원 잎새는
제 손을 뒤로 한 채 햇살에 얼굴을 내맡겼다
할아버지 소나무는 삭정이를 떨구며
어느새 맨손체조를 끝내는 참이었고
어디선가 부산하게 스적거리는 소리에 보면
싸리비가 제몸을 비스듬히 뉘인 채 벌써
수목원 골목을 쓸고 있었다
수목원에는 예로부터 立秋에 관한 전설이 있었다
누이 단풍나무는 가을 초입부터 수줍음을 타게 된다는
내 기억은 선전포고 없는 계절을 때때로 놓치곤 하지만
할아버지 소나무는 四季에 대해 모든걸 꿰고 있었다
그 수줍음은 수목원에 찬바람이 안주하면서부터라고 했다
찬바람이 은근슬쩍 한 번씩 마실을 올 때마다
누이 단풍나무 얼굴이 한 번씩 붉어지고
그때마다 가을이 오고
연이어 주술에 걸린 듯 온 나무들이
누이 단풍나무의 수줍음을 닮아가기 시작하고
할아버지 소나무의 허허거림 속에
수줍음이 전염병처럼 퍼져
온 수목원은 그야말로 단풍천지가 된다 했다
그제서야 내 지난 기억이 선연하게 부화되었다
땅속으로부터 단풍을 긷던 뿌리가 잠시 일손을 놓는 낮
꾀꼬리 한 마리가 온 수목원에 입방아를 찧고 다녔다
사연인 즉, 참새는 둥지를 틀면서 떡갈나무를 짝사랑했고
떡갈나무는 맞은편 상수리나무를 사모했단다
그 사실을 알고 참새가 떠나겠다 엄포를 놓았지만
떡갈나무는 한 번 준 마음을 돌이킬 수 없다 했다
돌이킬 수 없어 참새는 수목원을 떠났고
이후로 수목원이 아닌 들판을 휩쓸고 다닌단다
삼각관계가 끝나던 날, 수목원의 모든 나무와 새들은
떡갈나무와 상수리나무의 사랑을 축하해 주었다
해질 무렵, 나는 공해로 잠식당한 폐를 안고
점점 더 깊숙이 수목원 안으로 접어들었다
산책길을 오르느라 내 호흡이 가빠지자
소나무가 내 입에 산소호흡기를 물렸다
이내 가빠지던 호흡이 되살아났고
머리가 맑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니 모든 나무가 땅거미로부터 산소를
이수 받아 물관부에 차곡차곡 채우고 있었다
내 걸음걸음마다 나무들이 산소 한 사발씩을 건넸고
나는 산소를 감로수처럼 받아 마셨다, 마시면서
산소를 닮고 싶었다
닮고 싶어 산소에 대해 묻자
갈참나무의 대답 대신 수목원 여기저기서
쿵쿵 소리를 내며 빗장을 질러댔다
어둠의 넝쿨이 점점 발목부터 감아 오르기 시작했고
나는 뒤돌아서 천천히 수목원을 빠져나갔다
내 발자국 뒤로 초록발돋움이 조용히 뒤따랐다
금상
배웅 / 박문수
산을 다 오르도록
산은 아무 말이 없었다.
능선에서 쉬는 동안
구름은 느릿느릿
큰 봉우리 하나를 건너고 있었다.
산을 다 내려오도록
산은 아무 말이 없었다.
숲을 벗어나자
바람에 쓸리는 듯
돌아보면 등 뒤로
작은 봉우리 몇몇이
우두커니 서고
두어 발치 곁에서
한참을 따라 나오는
개울물소리.
은상
봄 산 / 정태영
둥긋이 놓여있는 작은 봄 산에 오릅니다
아버지와 함께 걷는
산으로 이어진 시골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입니다
고개 들어 하늘 보면
얼굴에 와 닿는 깨끗한 공기,
따뜻한 바람은 코끝을 간질이고
눈부신 햇살이 볼에 가슴에
햇볕 냄새를 남깁니다
길을 열어주는
도토리나무, 오리나무, 떡갈나무는
가지마다 꽃보다 더 고운 새잎
피워냅니다
눈길이 마주치는
나뭇가지, 나뭇잎, 돌멩이, 풀꽃
하나하나 환하게 빛나고
고사리가 손 내밀면
고사리 끊어 나물 해먹던 이야기
진달래가 웃으면
진달래 꽃 따먹던 이야기
산과 함께 자란 아버지의 이야기는
끝도 없이
저 구불구불한 하얀 길만큼
이어지겠지요
그 길을 걸어
둥그런 산의 등을 밟고 서 있는
아버지와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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