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 외 3편 / 박은영
넓은 들판이었다
우물가 동백꽃도 다 떨어진 조용한 오후였다
어머니는 햇빛을 등진 채
어린 쑥의 시린 발꿈치를 어루만졌다
바위인 듯 봉분인 듯
월남치마는 봄바람에 부어오르고
살아온 세월만큼 더딘 걸음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산 벚나무 환하게 눈을 뜨는 봄마다
당신의 갈라진 손끝은 푸른 물이 배고
대소쿠리는 이른 봄으로 묵직했다
먼 들판을 보고 있으면 입안에 쓴물이 고였다
쓰디쓴 봄의 흔적을 지우고 자주꽃 피던 날
양지 바른 자리에 웅크린 어머니
내 가슴 깊은 곳에서
된장뚝배기가 끓고 찰진 떡 치대는 소리가 났다
엄마 엄마 부르면
꽃대 같은 고개를 들어 낭창거리고
다시금 몸을 숙이던 어머니
까막눈 당신은 저물도록 들판을 읽어내려갔다
추운 겨울을 견뎌낸 푸른 쑥이
내 눈물콧물에 버무려지고 있었다
개구리 우는 논두렁을 지나
산 벚꽃 흩날리는 들판을 내달리다 넘어진
어린 무릎에 쑥물 든 시절이었다
매화 / 박은영
사립문 밖 먼 길에 해가 저물자 월곶댁이 창호문을 엽니다
댓돌에 가지런히 벗어놓은 흙 묻은 신발이 아들 내외 그림자를 따라 신작로를 걸어갑니다 걸음걸음 길 잃은 새떼를 불러 모으는 저녁, 옹이진 어깨가 어둠속으로 기웁니다
목 꺾인 수숫대를 휘돌던 바람이 멀어지는 길을 지우는 사이, 백구가 신 한 짝을 물고 토방에 엎드립니다
녹슨 문고리를 쥔 할머니 기침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 갓난쟁이 친손녀, 동녘은 별자리마다 꽃눈을 틔우고 월곶댁은 자장자장 쉰 목소리로 달래주지만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울어대는 젖먹이
조그만 입속에서
아직 피도 마르지 않은 연한 입속에서
매화 향 짙게 퍼지는 봄
토담 너머 하현달이 제 흰 젖을 짜냅니다
시디신 울음이 사립문을 열고 신작로를 넘어가면 청매실 익어가는 아침이 올까요
쇠부엉이가 깊은 숨을 얹어놓는 마당귀, 휘어진 늙은 가지에서 자지러지게 매화 피는 밤입니다
재첩잡이 / 박은영
섬진강을 들여다보는 늙은 아낙들
수면을 훑는 왜가리 울음소리, 산허리 꺾이는 소리를 고무대야에 담고
흐르는 강에 빈 젖을 댄다
윤슬을 걷어 올려 탁한 기억을 가라앉히고 가만가만 강의 속살을 더듬으면
지난날은 얕아지는 여울목을 돌아나가고
재첩의 숨이 쇠갈퀴 잡은 손을 간질이는 것이다
사흘에 한 번씩 물 빠질 때를 기다리는 일
샛바람을 등에 업은 채 허리를 구부려 속을 비우고
욕심 없는 손 노릇으로 모래바닥을 자작거리는 일
발목을 쥔 찬 기운에도 흔들리지 않고,
단풍이 회목을 돌아 물살 깊이 번질 때까지 묵묵히 강바닥을 들여다보는 일
재첩 잡는 일은
뜨끈한 뚝배기 한 그릇을 아침상에 올려놓기 위함이다
철교 너머 강변마을, 재첩껍데기 같은 빈 집으로 석양이 들고
강 한복판에서 잔잔하게 물주름진 아낙들
섬진강의 젖줄이 되어 오래 흘러간다
오포리의 봄 / 박은영
강구오일장,
초입에서부터 욕지기가 나왔다
아이들은 은멸치 떼처럼 몰려다니고
나무궤짝 안의 동태눈이 봄볕에 녹고 있었다
마수걸이를 못한 상인들
바다를 향해 벌어진 두툼한 입에서
짜디짠 한기가 쏟아져 나왔다
물미역, 파래, 청가사리 물결치는 오후
아버지의 봄은 오일마다 찾아왔다
겨우내 얼어있던 빈속을
늦김치와 더운 밥 한 덩이로 채운 가장
움푹 파인 나무도마에 칼질 소리 고이고
토막 난 바다가 장바구니에서 넘실거리는 길
강구 앞바다 뱃고동에
야윈 그림자가 등지느러미를 세워 물살을 갈랐다
저 멀리 선착장 너머로 해는 이울고
동태의 내장을 모두 끄집어낸 아버지
자리를 털고 일어난 생의 바닥이
해동된 비린내로 축축했다
이제 아버지의 내일은 오일이 지나야 한다
짐을 갈무리 해, 손수레를 끌고 가는 뒷모습
그 쓸쓸한 우수리는
장터에서 나고 자란 바람의 몫이었다
봄바다가 덤으로 얹혔다
수상소감
시골의 밤이 그랬습니다. 해 지면 바로 깊은 어둠입니다.
조금씩 속내를 내보이고 야박하리만큼 아주 조금씩 내 말에 귀를 기울여줬습니다. 이젠 잔별 하나 그 자리에 보이지 않아도, 달의 혈색만 변해도 어디가 불편한지 내게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시골 밤이 온전히 마음을 열어 내게로 향하기까지 세상 한 귀퉁이가 따뜻해지기까지 꼬박 6년이 걸렸습니다. 그 순간순간의 다가섬을 잊을 수 없습니다.
심사위원님들 감사합니다. 저는 이곳에서 밤이 전하는 소리를 토씨 하나 놓치지 않고 열심히 받아 적겠습니다.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 언제나 내 편이 되어줄 부모님, 먼 길을 따라와 준 아들, 나의 손을 가만히 잡아주는 사람이 있어 이 순간 보름달이 뜹니다.
눈물을 감출 수 없는 환한 밤입니다.
바람이 산마루를 넘어 갑니다. 그 바람에 감사한 마음을 실어 하나님께로 보냅니다
박은영
동아인재대학 졸업.
기독교시모임<품시>동인
제2회 천강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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