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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하 '검은땀의 잉크 우리들 노래의 피(1)' 정동후 '시련이 오리라' 서정홍 '아들에게' 정해민 '우리는 가족이다' |
검은 땀의 잉크, 우리들 노래의 피 1 / 정수하
절름발이 소녀의
낡고 슬픈 무쇠베틀이었다
달 아래
네 노래의 불씨들을 촘촘히 자나가는 저 흰손은
남동 뒷골목
주린 등짝 하얗게 야윈 손등에 달이 뜨면
머언 남쪽나라 강뚝 옛 어머니집에 하얗게 샛바람 뜨면
열두자 종이폭에 이글이글 진달래꽃 수를 놓았다
전라도땅 남동 뒷골목이었다
참새 하나 꿈젖는 양철지붕 붉은 벽돌담에
꺼멓게 탄 등불 기름베로 더덕더덕 기운 저 그림자들
흙바닥에 끌려 억새처럼 뻗신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소녀는 납을 뽑아 판을 짜고
물먹은 잉크덩이 휘휘 저어 로우러를 돌리며
나는 새도록 톱니바퀴 가죽벨트에 달빛을 감아
베틀을 굴렸다
덜커덩 덜컹 실피 뽑아 체인을 타며
삼베 같은 종이폭 길게길게 네 시들을 자았다
달 아래
병들고 지쳐도 기계이빨 앙다물고
네가 부르던 옛싸움의 노래가 줄줄이 공장바닥을 적셨다
검은 잉크땀이 달을 따라 온밤을 벌겋게 먹칠을 했다
아아 지금은 더욱 멀고 애끓는 남도길
소녀의 고향은
한애비 달구질에 쑥잎만 타던 강나루터 철로변이었다
여름날 소쩍새가 옛 투사들의 돌무덤을 치솟아 날고
망월동 가는 외딴 길섶 칙칙한 지하벽마다
내 형제들 두손의 망치질도 끊기고 푸른 만신창이로 뒤척대는
저 고요한 매장 아래 터벅터벅
다시 네가 떡깔나무숲처럼 은밀하게 뿌리를 밀고 가는 밤마다
남동 뒷골목 절름발이 소녀는
닳아빠진 무쇠베틀 덜커덩 덜컹 세월을 짜고
나는 갱지 위에 네 시를 불꽃처럼 심어나갔다
수십년 때묵은 쪽발이나라 재산반입품
철사끈으로 조이며 톱니바퀴 밀고 당겨 목줄을 이어나갔다
절름발이 내 소녀는
침침한 종이뭉치 전등불 아래 얼굴마저 녹아내렸고
나는 모든 절망과 사랑의 노래들을 자판으로 찍어눌렀다
남동 뒷골목이었다
철야의 달은 양철지붕 붉은 담벽을 느릿느릿 흐르고
낡고 슬픈 베틀에 앉아
절름발이 소녀는 새도록 진달래꽃 수를 놓았다
가난이 죄일세라 죄일세라 공장바닥 한구석
엄니 잃은 핏덩이 조카놈을 품에 안고 베틀을 타며
얼어붙은 기름밥에 석탄불을 적셔 삼키며 세월을 꿰맸다
창 너머 푸른 샛빛 저 뜬조각들 하나 둘 종이폭에 엮어나갔다
보아다오, 내 형제들, 민중의 시인이여
너는 언제나 이렇게 다시 태어나고
달빛 젖은 잉크로 저 베틀에서 조금씩 조금씩 길러졌다
밤마다 두툼한 땀과 눈물의 옛 책갈피마다
따뜻한 별과 우렁찬 힘의 무기들이 다듬어져 새겨지고
네 노래는 젊은 일꾼들 손에서 손으로 이어져 거대한 뿌리가 되어갔다
전라도땅 남동 뒷골목이었다
낡고 슬픈 베틀에 앉아
절름발이 소녀는 밤마다 박해받는 세상의 자식들을 노래했다
철삿줄로 꿰맨 고물인쇄기계 톱니바퀴 덜커덩 덜컹
머나먼 옛 고향집 어머니 길따라 네 시들을 종이폭에 짜고
나는 저 달 아래
검은 기름피를 뚝뚝 바닥에 흘리고 있었다
1992년 제4회 전태일문학상 시상식이 종로 뒷골목 민예총 강당에서 있었다. 나는 대학 4학년 소설창작 시간에 아무렇게나 쓴 소설 말고는 처음으로 써본 소설을 가지고 단편소설 부문 상을 받게 되어 그 자리에 참석하고 있었다. 당시에 나는 해직교사라는 신분이었고, 소설 내용은 당시 91년 투쟁의 와중에 전투경찰에 의해 타살당한 성대생 김귀정 열사의 죽음에 항의하는 명동성당 농성에 참여한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지금은 시를 쓰고 있지만, 그때도 나는 소설가보다는 시인이 되고 싶어 했다. 그런데 별 생각 없이 쓴 소설이지만 왠지 그냥 버리기는 아까워 투고를 했다가, 덜컥 상을 받고 보니, 기쁨보다는 부담이 더 크게 다가왔던 기억이 난다.
시상식장에는 나 말고도 각 부문 수상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런데 딱 한 사람, 시 부문 당선자인 정수하 씨가 보이지 않았다. 시상식이 끝날 때까지도, 그리고 이후에 <지리산>이라는 출판사에서 수상작품집을 내고 축하 모임을 할 때도 정수하 씨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디서 무얼 하는 사람인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도 없었고, 그렇게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졌다. 하지만 나는 가끔 그 사람이 궁금했다. 수상작이 준 강렬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 작품이야 워낙 아마추어 티가 역력해서, 그때 소설 투고작 중에 특별히 눈에 띄는 작품이 없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내가 뽑혔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시 당선작은 마치 김지하의 초기 시처럼 가슴을 고통스럽게 헤집어놓는 힘이 있었다.
수상작품집에는 모두 4편의 시가 실려 있다. 하나 같이 호흡이 긴 작품들이다. 심사를 맡은 신경림, 김남주 두 분이 다음과 같은 심사평을 해놓았다.
정수하는 먼저 시정신의 치열함이 읽는 사람을 사로잡는다. 피나 땀 같은 끈끈한 정서도 이 시가 결코 작자가 손끝으로 쓴 시가 아님을 말해 준다. 또 “나는 모든 돌과 씨앗과 물거품마다 새벽빛을 짜넣고/ 철의 연자매 아래 밤을 빻아 흰 쌀가루를 봉지에 쓸어담으며/ 뿌리처럼 공장과 대지를 전진해 가야 했다”(「멀고 먼 노래의 길 위에서」) 같은 표현은 관념만 가지고 얻을 수 있는 구절이 아니다. 육자배기 가락을 연상시키는 끈적거리고 청승스러운 가락도 시의 내용과 잘 어울린다. 한데 너무 장황하다. 모호한 표현도 군데군데 보인다.
수상작품집에는 ‘1957년 정읍 출생. 사진식자기사․마스타공․설비공․용접사로 근무’라는 간단한 이력이 붙어 있다. 이력을 통해 어렴풋이 살아온 내력을 짐작해볼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의 정보는 어디서도 찾을 길이 없다. 그리고 그 이후 다른 작품이 발표되는 것도 보지 못했다. 그렇게 수수께끼처럼 사라진 정수하 시인!
정수하 시인의 작품을 읽노라면 가슴이 컥! 하고 막힌다. 남도의 한 맺힌 정서를 이렇듯 유장하면서도 절절하게, 그러면서도 힘차게 토해놓을 줄 아는 시인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래서 나는 정수하 시인이 홀연히 나타났다 홀연히 사라진 게 안타깝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우리 문학이 뛰어난 시인 한 사람을 잃어버린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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