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 정영애
사랑을 한 적 있었네
수세기 전에 일어났던 연애가 부활되었네
꽃이 지듯 나를 버릴 결심을
그때 했네
모자란 나이를 이어가며
서둘러 늙고 싶었네
사랑은 황폐했지만
죄 짓는 스무 살은 아름다웠네
자주
버스 정류장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곤 했었네
활활 불 지르고 싶었네
나를 엎지르고 싶었네
불쏘시개로 희박해져가는 이름
일으켜 세우고 싶었네
그을린 머리채로 맹세하고 싶었네
나이를 먹지 않는 그리움이
지루한 생에 그림을 그리네
기억은 핏줄처럼 돌아
길 밖에 있는 스무 살, 아직 풋풋하네
길어진 나이를 끊어내며
청년처럼 걸어가면
다시
필사적인 사랑이 시작될까 두근거리네
습지 속 억새처럼
우리 끝내 늙지 못하네
[당선소감]
“당선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가슴만 콩콩거리다 끝내는 퍼질러 앉아 질펀하게 울어버렸습니다. 나를 세상에 눈뜨게 해주신 부모님과 장애가 있어 나를 더 행복하게 해주는 딸 소정이, 아직도 “엄마, 안아주세요”하는 성격 좋은 아들 일출이, 든든한 후원자 남편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14회 지용신인문학상 당선자 정영애씨(사진·52 강원도 속초시) 당선 소식이 놀랍기만 하다는 그는 긴장됐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씨는 이미 지난 2001년 3회 의정부 신인문학상 장원을 시작으로 2003년 강원여성백일장 대상, 2006년 계룡시 전국여성백일장 대상, 2006년 신사임당 문예대전 대상 등 연이어 여러 대회에서 수상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번에 그에게 지용신인문학상의 영광을 안겨 준 작품은 시 ‘4월’. 열두 달 중 가장 화사한 달이면서 가장 불행한 달, 그래서 해마다 가슴 아픈 4월을 그려낸 시다.
“어려운 시는 제가 제일 싫어해요. 첨탑에서 퍼지는 종소리처럼 모두의 가슴에 스며드는 쉬운 시를 쓰고 싶습니다. 앞으로 평생 시와 손을 잡고 가야 하겠지요. 시는 곧 생활이고 제 삶이니까요. 발표할 만한 좋은 시를 많이 쓸 수 있게 되면 시집도 한 권 발간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심사평] ‘압축·생략’으로 시의 참맛 잘 표현
시가 필요 없이 길고 말들이 많다. 컴퓨터로 글을 쓰면서 생긴 버릇이겠지만, 시의 참맛이 압축과 생략에 있다는 점은 예나 지금이나 대체로 동의를 얻고 있는 터다. 또 지나치게 말들이 많다는 것은 시가 설명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소리겠는데, 어쩔 수 없이 초점이 흐려지고 산만해지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래가지고는 활기찬 시가 되기 어렵다는 뜻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4월’(정영애), ‘가끔이란 시간’(김예영) 등 몇 사람의 시는 이 점을 극복하면서 우리 시의 앞날에 대해서 크게 희망과 신뢰를 갖게 해 주었다. ‘4월’은 지나간 사랑을 회상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지만, 그 사랑이 화로 속의 불씨처럼 다른 사랑으로 되살아날 수 있으리라는 암시와 더불어, 수채화처럼 아름답고 달콤하고 슬픈 이미지로 승화되고 있다. 빼어난 감각이 시를 시종 활기차게 만들고 있는 점도 이 시의 미덕이다. 가령 “나를 엎지르고 싶었네” 같은 표현은 아무나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못된다. 그 빼어난 감각이 지금까지 우리 시가 잊고 있었던, 다른 장르의 문학이 가질 수 없는 시의 재미를 복원해 주고 있다는 점도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소재도 유행을 좇는 흔한 것이 아니어서, 이른바 ‘문학학교 시’를 한 걸음 극복하고 있다. 많은 말, 화려한 표현의 유혹을 이겨내고 있는 점도 미덕이다. 좋은 시를 쓸 바탕이 보인다. ‘가끔이란 시간’은 발상도 표현도 신선하고 독특하다. 비슷비슷한 시를 읽다가 접하니 눈이 번쩍 띄었다는 것이 심사자들의 솔직한 고백이다. 하지만 발상이고 표현이고 좀 어리다. 남들과는 사물을 다르게 보고 표현을 다르게 한다는 자세는 값지고 귀하다. 이런 생각을 이어간다면 반드시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시 가운데서 심사자들은 정영애의 ‘4월’을 당선작으로 뽑는데 합의했다.
심사위원 유종호, 신경림 시인
'문예지 신인상 > 지용신인문학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6회 지용신인문학상 / 이기호 (0) | 2011.02.18 |
---|---|
제15회 지용신인문학상 / 황인산 (0) | 2011.02.18 |
제13회 지용신인문학상 / 이수진 (0) | 2011.02.18 |
제12회 지용신인문학상 / 이시하 (0) | 2011.02.18 |
제11회 지용신인문학상 / 현택훈 (0) | 2011.0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