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술사 / 황봉학
태초에 땅에는 검은 돌이 있었다
그리고 그 돌로 점을 치는 주술사가 있었다
그는 돌에서 화살촉을 꺼내 이리떼를 죽이고 곰을 죽였다
이리와 곰을 먹고 자란 그는
주술의 힘을 빌려 다른 종족의 머리에 화살을 박았다
화살촉이 두려운 종족은 그의 종이 되고
그는 돌에서 황금을 꺼내 왕관을 만들고
자궁을 향락이라는 이름으로 병들게 했다
그는 돌에서 탑을 꺼내 신전을 세우고 신을 만들었다
주술의 힘은 악어의 자궁보다도 강하다
그는 마침내 돌에서 우라늄을 꺼내 스스로 신이 되었다
주술 한 마디로 이 땅을 또 다른 돌로 만들 수 있다는 그는
또 다른 주술사가 탄생하는 것이 두려워
주술 읊는 것을 법으로 금지시켰다
주술사는 태초에 어둠에서 태어난 것임을 그는 잘 안다
하지만 아무리 불을 밝혀도 어둠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땅 곳곳에서 새로운 주술사가 태어나고
주술의 힘을 믿는 그들은 또 다른 종족의 머리에
잘 다듬어진 돌을 겨눌 것이다
[수상소감]
어릴 적 내가 고뿔을 앓으면 어머니는 무당을 불러 굿을 하곤 했습니다.
무당이 부르는 신들, 주문들, 무구巫具들이 정신이 가물가물하고 열이 오르는 아픔 속에서도 나는 딴 세상을 경험하고는 했습니다. 특히 무당의 시퍼런 칼날이 내 입을 벌리고 차가운 물을 흘러내리면 나는 꾀병처럼 고뿔이 낫고는 하였습니다.
그때 본 무당을 나는 내가 갈 수 없는 먼 세상의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무당이 굿을 하며 읊어대던 주술,
그 주술을 나도 읊어보고 싶었습니다.
아무나 가지 못하는 또 다른 세상으로 나도 가 보고 싶었습니다.
오늘도 주술을 읊으려고 산마루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주술은 도중에 끊어지고 주술 읊기는 중단되기 일쑤입니다.
어른이 되어 첫 여행지인 타이완박물관에서 나는 또 주술사의 흔적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만난 무구인, 거북이 등껍질을 보고 상형문자처럼 생긴 문형이 아득한 옛 인류의 메시지라고 생각하며 자리를 뜨지 못했던 기억이, 그 후 내가 다시 거북이 등껍질을 보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줍니다.
향일암이었습니다.
돌에 촘촘히 새겨진 거북이 문형, 나는 주술을 외우면 저 태고의 조상들이 남기고 간 메시지를 읽어 낼 것만 같았습니다.
그 후로 나는 돌을 들여다보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돌만 보면 아득한 지구의 탄생을 알 것만 같고 돌이 인류의 삶을 결정지어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주술이 새겨진 돌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 믿고 돌을 찾아 산과 강을 헤맸습니다.
이 혼돈의 세계를, 모순의 세계를 풀어줄 주술이 어딘가에 있을 것입니다.
주술의 첫 마디를 풀게 해준 <애지>와 애지 회원 여러분 감사합니다.
또 다음 마디를 풀어줄 주술을 찾아 길을 떠나야겠습니다.
[심사평]
시의 묘미는 사물이나 상황에 빗대어 차이성 속에서 유사성을 필요충분조건으로 비유를 사용하는 데 있다. 황봉학 시인의 「주술사」는 주술사가 ‘주술’을 통하여 보이지 않게 세상을 지배하는 권력자(신)가 되고,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온갖 비책묘계를 다 짜낸다는 스토리텔링 구조로 희화화시킨 수작秀作이라고 할 수가 있다. 주술 한 마디, 즉, ‘자유’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군주 국가를 몰락시키거나 대대손손 왕권을 잡는 일을 금하고, 민주주의를 내세워 여기저기 주술사 (통치자)를 속출시키지만, 결코 어둠은 사라지지 않는다. 즉, 최고 권력자들의 권력 남용과 전쟁으로 다른 종족의 머리에 위협을 가하는 세태를 꼬집고 있다.
2016년도 애지문학회 작품상에는 42명이 투표에 참여하였다. 강서완의 단축적 이미지들로 속도감 있게 엮은 「고전적 불볕」과 황봉학의 스토리텔링이라는 이야기 구조 「주술사」가 경합을 벌였다. 2위와 3표의 차이로 12표를 얻어 황봉학 시인의 「주술사」가 1위의 영광을 차지하게 됐다. 황봉학 시인께 축하 인사를 전한다.
-심사위원 : 애지문학회 회원 일동(글, 박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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