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음 이전 / 황학주
한밤중 아파트 뒤안길에서 남자가 울부짖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음으로 이루어진 비명-
나는 골목을 돌아 들어가다 멈칫한다
남자는 이마를 전봇대에 걸어놓은 듯 붙이고 서서 후들대었다
아픈 것이 터져 생기는 소리를
이렇게 둥근 모음으로만 만들 수 있다니
으우어어아아아
둥근 모음들의 낯선 비애가 뾰족한 칼끝에 몸을 싣는다
몸을 떠는 골목, 갈라진 동굴 바닥 균열에서
몇 만 년의 석순이 자음처럼 자라지만
찢어진 자음을 발음하기엔 우리 몸은 너무 둥글지 않은가
둥근 눈동자 둥근 배 둥글게 다듬질된 부드러운 관절들
둥근 폐와 심장과 콩팥의 다정함으로
치욕을 견디는 모음의 존재들이 전봇대마다 하나씩 서 있다
오므리거나 퍼지는 발성을 배워야 살아남는
오오흐흐에에- 생존을 위한 응급처치, 추운 밤 입 벌리고
자음의 세계로 진입하면서
영악한 영장류가 되거나 자폐증을 품게 된
지친 고독들이 피크닉을 와 서성인다 칼끝을 합치고 쌓은
아파트 빌딩 우거진 동굴들의 원시림에서
골목 담벼락에 매달려 검은 그림자가 울부짖는다 나도 저
울부짖음과 함께 울부짖음으로 동무해주며
수수만 년 전 동굴에 버려진 늑대의 아이가 그러했듯이
멀리 떨어진 부족의 전사들이 동시에 그러했듯이
모음의 발성으로 자음을 애도하며
나도 칼끝 위에서
헤로인 / 안정옥
아편은 양귀비꽃의 상처였다 덜 익은 열매에 흠(欠)을 낸 즙액이다 독이 독을 다독인다 열매의 이지러짐에서 모르핀을, 모르핀의 이지러짐에서 헤로인을 뽑아냈다 누군가 말한 치유의 힘센 이는 헤로인, 힘센 상처는 강렬하다 술값이 비싸서 가난한 사람들이 마셨던 아편, 작가나 시인들 아픈 아기와 여자들에게 흔히 권했던 시절, 얼마 전까진 그랬다 이천 개가 넘는 영국의 커피하우스에 여자들은 들어가질 못했다 얼마 전까진, 우리 몸은 얼마 전까지를 가장 잘 받아들이는 물질이다 그런 물질들이 한꺼번에 등장한 것은 상처들이 포효했기 때문인가 취한 이들의 시간은 거나하다 홀린 듯 산마루 위에 둥둥 떠다니는 나를 잊음이 거나하다 마음을 들어 올려준다 제 몸과 맞바꿀 수 있는 것은 죽음뿐이다 이젠 마지막이라 말했다 내 성하지 않음을 중얼거려 본다 홀랑 들이키라는 건 아니었다 그러면 붉은 양귀비꽃의 흠(欠)이 당신에게 안착한다 성하지 못한 당신 마음에 양귀비꽃의 그런 마음이 당겨졌다 호주머니 그해엔 다녔다 헤로인을 자주 겉옷의 넣고
깊숙이 그해엔 넣고 호주머니 자주 깊숙이 헤로인을 다녔다 겉옷의
계간 시 전문지 '애지'가 주관하는 제9회 애지문학상 수상자로 남자 시 부문에 황학주, 여자 시 부문에 안정옥이 18일 선정됐다. 수상작은 '자음 이전'과 '헤로인'이다.
심사위원들은 "황학주의 시에서 자음의 세계는 현대문명사회의 원시림과 이전투구의 세계를 뜻하고, 모음의 세계는 어머니의 세계이며 사랑과 평화의 세계를 뜻한다"고 평가했고 "'헤로인'은 '만병통치약'이 없는 세계에서 '아편의 중독성'을 더없이 자연스럽고 깊이 있게 성찰한 수작"이라고 선정 이유를 설명했다.
상금은 각각 500만 원이며 시상식은 12월 5일 대전 유성에서 열린다.
'문예지작품상 > 애지문학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1회 애지문학상 / 곽효환 (0) | 2015.09.11 |
---|---|
제10회 애지문학상 / 함기석, 양애경 (0) | 2015.09.11 |
제8회 애지문학상 / 김혜영 (0) | 2011.10.10 |
제7회 애지문학상 / 윤의섭 (0) | 2011.10.10 |
제6회 애지문학상 / 민경환 (0) | 2011.1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