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정거장 / 곽효환
사람들 드문드문 들고 나는
호젓한 시골마을 간이역 철길을 이어
백두대간 숲 속 깊은 곳에
작은 역 하나 더 지어야겠다
간이역과 간이역을 잇는 기차
하루에 한 번 혹은 두 번 오고가게 해야겠다
비자나무 가죽나무 굴참나무 측백나무 팔 벌리고
작은 짐승들 새들 벌레들 분주함 가득한
숲의 정거장엔
철커덕 철커덕 쉼 없이 달려왔을 기차도
같이 온 바람도 잠시 숨 고르리라
플랫폼에 이어진 호젓한 오솔길 따라
나란히 흐르는 계곡물에 발 담갔다가
단청 고운 절집 탱화아래 앉아
잠시 먼 산에 한눈팔아도 좋겠다
세상의 시간과 일상이 한동안 멈춰
몸 부리고 쉬었다 느릿느릿 흘러가는
작은 역 하나 숲의 양식대로 지어야겠다
빛바랜 회색 기와집 아래 의상실과 세탁소
슬레이트 지붕집엔 전파사와 분식집
붉은 벽돌집에 포목점과 연쇄점
그리고 방앗간이 더러는 정겹게
더러는 힘겹게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한적한 시골마을 간이역
한때는 열차들 분주히 들고 나고
수많은 사람들 멈추고 떠나며
흥성하게 장도 이루었을 텐데
그 기억과 시간이 떠난 자리에
숲의 정거장에 넘치게 붐비는
느림을 멈춤을 고요를 실어다
고루 나누어 줘야겠다
두 역을 오가는 기차의 차장을 해야 할 지
두 역 중 어느 역의 역장을 맡아야 할 지
고민은 초록과 함께 깊어간다
[심사평]
에피쿠로스는 스토아 학파의 금욕주의의 반대방향에서 쾌락주의를 최고의 선으로 주창하였지만, 그러나 그의 쾌락주의는 주지육림 속의 방탕이 아니라, 언제, 어느 때나 근검 절약하는 금욕주의 속의 쾌락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인생의 목표는 쾌락”이지만, 그 쾌락은 육체적인 고통을 당하지 않는 것과 번민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었다. 에피쿠로스는 인간의 욕망을 세 가지로 구분한 바가 있었다. 첫 번째는 자연적이면서도 필요한 욕망이고, 두 번째는 자연적이면서도 필요 이상의 허영적인 욕망이며, 마지막 세 번째로는 자연적이지도, 꼭 필요하지도 않은 욕망이다. 이 세 번째 욕망은 필요 이상의 허영적인 욕망과는 달리, 타인이 가졌으니 나도 갖겠다는 모방욕망을 말한다. 에피쿠로스는 이 두 번째 욕망과 세 번째 욕망을 거절하고, 공부를 하고, 또 공부를 하면서 조용한 전원생활을 즐기는 소박한 쾌락주의자라고 하지 않을 없다.
제11회 애지문학상 후보작품으로는 박형준의 [불탄 집], 고영민의 [민물], 송종규의 [알람에 관한 편견], 이승희의 [결], 박종인의 [고고학적인 악수], 이은봉의 [지구 아가씨], 김지녀의 [선], 김백겸의 [스핑크스의 수수께끼], 장옥관의 [달도 없는 먹지 하늘], 곽효환의 [숲의 정거장]이 올라와 있었고, 이 후보작품들 중에서 박형준의 [불탄 집]과 이승희의 [결], 박종인의 [고고학적인 악수], 곽효환의 [숲의 정거장]을 집중적으로 심의한 끝에, 우리는 곽효환의 [숲의 정거장]을 제11회 애지문학상 수상작품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곽효환의 [숲의 정거장]은 “빛바랜 회색 기와집 아래 의상실과 세탁소/ 슬레이트 지붕 집엔 전파사와 분식집/ 붉은 벽돌집에 포목점과 연쇄점/ 그리고 방앗간이 더러는 정겹게/ 더러는 힘겹게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한적한 시골마을 간이역”에서 이 간이역마저도 존폐의 위기에 몰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간이역과 “백두대간 숲속 깊은 곳에” “작은 역 하나 더 지어” 그 “느림을 멈춤을 고요를 실어다” 나르는 “차장”(역장)의 간절한 꿈을 노래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대도시는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는 빠름의 시간이고, 시골은 그 도시의 욕망이 아무런 소용도 없는 느림의 시간이다. 빠름의 시간은 거짓, 사기, 폭력, 약탈 등이 난무하는 가짜의 시간이고, 느림의 시간은 그 모든 것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진정한 삶의 시간이다.
모든 경전들은 인간의 욕망을 죄악시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인간의 욕망이 만악의 근원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나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는 이 욕망을 더욱더 풀어놓고 그 어떠한 제동장치도 마련해 놓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종교배와 고령화 사회, 자원고갈과 원자력발전소의 대폭발은 자본주의 사회의 음화이고, 따라서 인간의 욕망이 만악의 근원임이 그 무엇보다도 정확하게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곽효환의 [숲의 정거장]은 이 욕망의 가속도의 시대에 반하여, 에피쿠로스적인 전원생활의 행복을 노래하고 있는 시이며, 우리 인간들이 하루바삐 자기 자신의 인간성을 회복하여 건강한 자연인의 삶을 살아가라는 삶의 본능을 옹호한 찬가라고 할 수가 있다.
시는 인간의 욕망을 제어하여 인간다운 삶을 향유할 수 있게 해주는 최종적인 구원의 장치이다. 시인은 인간 영혼의 치료사이며, 우리는 시인이 있기 때문에 이 어렵고 힘든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제11회 애지문학상 수상자인 곽효환 시인에게 진심으로 축하를 드린다.
- 심사위원 반경환, 이형권, 황정산 일동
제11회 애지문학상에 곽효환(46) 시인이 선정됐다고 시 전문지 ‘애지’가 20일 밝혔다. 수상작은 ‘숲의 정거장’. 심사위원들은 “에피쿠로스적인 전원 생활의 행복을 노래하고 있는 수상작은 우리 인간들이 하루바삐 자신의 인간성을 회복하여 건강한 자연인의 삶을 살아가라는 찬가”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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