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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원역 / 이애경

 

 

호남선 기차를 타고 가다보면 천원역*과 만나네

노령역 지나 송정리역 다음 나주역에서 내려야 하지만

나는 천원역에서 슬쩍 내리고 싶네

천 원짜리 지폐는 애들도 시큰둥 한다는데

차창 밖 들녘은 천 원이면 뭐든 살 수 있다고

나풀나풀 유혹하고

뻥튀기처럼 부푼 행복이 숨어있을 것 같기도 한

가난한 나는 그만 이 역에서 내리고 싶네

천 원짜리 밭뙈기나 부쳐 먹고

들녘 하늘에 매달린 노을이나 아침햇살 주워 먹으며

저 자라는 청보리처럼 살고 싶네

바람을 지집 삼아 옆구리에 끼고

덤으로 준다는 별빛이며 달빛이며를

평생 이웃하며 희희낙락 살고 싶네

나부끼는 바람과 한바탕 몸을 섞고 나면

내 몸도 그만 투명한 날개 한 쌍 달지 않겠나 싶은 게

뚝뚝 번지는 석양 아래 고단한 날개를 접고

긴 잠에 들면

내 생 언저리가 더 없이 부드럽겠다 싶은 게

자꾸만 입 안 가득 초록물이 도는 것이네

 

* 호남선 간이역

 

 

 

 

 

[심사평] 유유자적의 화법

 

당선작으로 뽑은 시 ‘천원역’은 지역신문이라는 문예공모작의 한계를 극복하고, 중앙지의 신춘문예 당선작과 어깨를 겨룰 만한 시의 품격과 함량을 충족시켜 주는 ‘좋은 시’임을 우선 밝히고 싶다. 당선작 ‘천원역’은 예심을 거쳐 넘어온 여타의 작품을 누르고 군계일학群鷄一鶴의 뛰어난 면모를 보여 당선작으로 뽑는 일이 오히려 쉬웠다.


최종심까지 남은 작품은 ‘귀면각 선인장’, ‘민들레’, ‘누에가 사는 방’, ‘낙엽이 사는 집’, ‘천원역’ 이상 다섯 편이었다. ‘귀면각 선인장’은 아열대에서 자라는 중남미산 기둥선인장을 의인화해서 쓴 재미있는 시이지만, 이야기의 구성이 산만했다는 흠을 지녔다. 그러나 화자의 독특한 시각이 눈에 띈다.


‘민들레’는 시가 예민하고 가늘고 섬세하다. 갈라진 옹벽의 길을 깁고 있는, 노란 불 켜고 있는 민들레 몇 포기가 눈에 선명하게 잡힌다. 그러나 가작 수준이다. ‘누에가 사는 방’은 촘촘하고 비좁은 고시원에서 실밥 터진 책들, 혹은 터진 실밥을 밤새 깁던 고시원생들의 고단한 삶의 얼룩이 보인다. 시적 응축력이 좀더 필요하다. ‘낙엽이 사는 집’은 표현이 거칠고 시적 구성이 약하지만, 기발한 상상력이 시의 재미를 채워준다. 섬세함과 치밀함, 시적 응축력이 좀더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에 비해서 당선작으로 뽑힌 ‘천원역’은 한눈에 심사자를 사로잡았으며, 매끄럽고 잘 숙성된 언어의 리듬으로 유유자적하는 시인의 여유있는 화법을 풀어내고 있다.


이 시에서 ‘천원역’은 가난한 인간이 가보고 싶은, 경제 부담이 전혀 없는 꿈의 역이다. ‘노을이나 아침햇살 주워먹으며’ ‘청보리처럼’ 살아가는 친환경 청정지역이며, ‘내 생언저리가 더없이 부드럽겠다’는 곳이다. 따라서 ‘천 원짜리 밭뙈기나 부쳐먹고’ ‘덤으로 준다는 별빛이며 달빛이며’를 평생 이웃하며 희희낙락 살아가는 곳, 가난한 사람이 꿈꾸는 곳이 ‘천원역’이다. 지명地名이 주는 친근감을 이 시인은 시로서 재미있게 잘 소화해내고 있다. 함께 투고한 ‘염전’, ‘그녀의 재봉틀’도 일정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좋은 시’로 뽑힐 만하다.당선자의 앞날이 기대된다.


심사위원 김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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