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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곳에 있지 않았다면 / 문태준

 

 

만일에 내가 지금 이곳에 있지 않았다면

창백한 서류와 무뚝뚝한 물품이 빼곡한 도시의 캐비닛 속에 있지 않았다면

맑은 날의 가지에서 초록잎처럼 빛날텐데

집 밖을 나서 논두렁길을 따라 이리로 저리로 갈텐데

흙을 부드럽게 일궈 모종을 할텐데

천지에 작은 구멍을 얻어 한 철을 살도록 내 목숨도 옮겨 심을텐데

민들레가 되었다가 박새가 되었다가 구름이 되었다가 비바람이 되었다가

나는 흙내처럼 평범할텐데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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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어머니의 들판과 필체와 한 편의 시

 

해마다 늦가을이면 나에게는 택배가 배달되어온다. 택배 상자에는 여러 곡물이 들어있다. 볶은 깨와 빻은 고춧가루, 까만 콩 등속이다. 육중한 택배를 들어 올릴 때 나는 하나의 들판을 들어 올리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나는 그 들판에서 일어났을, 힘겨웠을 노동의 하루하루들에 대해 잘 안다. 논과 밭, 그리고 둑에서 싹 트고 자라 오르고 열매 맺은 작물들의 일이며, 그 작물들을 아침저녁으로 보호하고 돌보았을 농부의 지극한 마음에 대해 잘 안다. 그래서 택배가 배달되어오는 날에 내 심경은 만산중(萬山中)에 있는 것만 같다.

 

택배가 배달되어올 때 나는 나의 주소지를 적은 필체를 들여다본다. 볼펜으로 꾹 눌러쓴 내 어머니의 필체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여간 야무진 필체가 아니다. 어머니는 부재시 관리실에 배달 부탁합니다.”라고도 써놓으셨다.

 

나는 어머니의 필체가 호미를 빼닮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특히 ’, ‘’, ‘와 같은 모음을 쓰실 때 어머니는 빨랫줄을 받치기 위해 바지랑대를 높이 들 때처럼 위로 치켜들어 쓰신다. 나는 이 필체가 어머니의 성품과 어머니의 신념과 어머니의 노동의 내용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무슨 일이든 허술하게 하시는 게 없었다. 깨를 털 때에도, 바느질을 할 때에도, 밥 짓고 설거지를 할 때에도, 기도를 할 때에도. 특히 끝맺음의 경우에는 조금의 빈틈도 없었다.

애지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문득 어머니의 필체 생각이 났다. 동시에 나에게 배달되어오는 가을 들판 생각이 났다. 그러면서 한 편의 시도 하나의 필체이며, 하나의 들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시가 고유하고 특별한 필체를 갖고 있는지 또 나의 시가 하나의 들판처럼 고된 노동으로 이뤄진 것인지도 함께 자문해보았다.

 

미흡한 것을 잘 채우고 가다듬어가라고 이 상을 주시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격려인 동시에 반조(反照)를 당부하는 뜻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이 상을 받으니 어머니께서 아주 좋아하시겠다. 시골에 계신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함께 사는 가족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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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상은 목표나 수단이 아니라 단지 결과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상 수상을 목표로 시작을 하거나 문학상을 수단으로 상업성과 유명세를 얻으려는 풍조가 지금 우리 문학계에 만연하고 있다. 우리 문학의 질을 높이고 새로운 문학의 지평을 열어준 작가나 시인에게 문학상이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최근 이런 당위는 사라지고 끼리끼리 상을 나눠 가지고 명망성에 기대 문학상의 위상을 높이려는 반칙들이 횡행하고 있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애지문학상의 의의는 이러한 풍조에 대한 비판이고 거부라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이번 애지문학상 심사는 바로 이러한 우리 문단의 현실을 되돌아보는 작업이었다. 작년 겨울호부터 올해 여름호까지 <애지>를 포함한 여러 문학지들에 실린 작품 중에서 먼저 후보작들을 선정했다. 시인의 명망성은 평가의 중요 기준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한 시인이 얼마나 진정성을 가지고 인간과 세상을 보고 또 얼마나 치열한 언어로 그것을 표현했는지를 중요한 평가 기준으로 삼았다. 먼저 10편을 후보작으로 선정했다. 김혜순의 「떨어진 별처럼」, 문태준 「지금 이곳에 있지 않았다면」, 고영민 「붉은 입술」, 문정희 「거위」, 유종인 「방석집」, 박이화 「한바탕 당신」, 정해영 「종이학」, 박형준 「불광천」, 엄재국 「호모 dew」, 김병호 「일요일」이 후보작이었다. 모두 훌륭한 작품이어서 쉽게 선정할 수 없었다. 많은 논의 끝에 가장 애지의 문학 정신에 가깝다고 생각되는 문태준 시인의 작품을 선정했다.

 

문태준 시인의 「지금 이곳에 있지 않았다면」은 아주 새로운 주제나 표현을 보여주는 작품은 아니다. 문명비판이라는 다소 식상한 주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시인은 그것을 진정성 있는 자기만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쉬운 언어를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쉽게 도달할 수 없는 삶의 인식에 가닿고 있다. 이 작품을 읽다보면 우리가 얼마나 비루한 삶속에서 우리 자신을 낭비하며 자신의 가능성을 가두고 살고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소박하지만 새로운 꿈으로 새 삶을 준비할 수 있음을 스스로 믿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를 읽으면 슬프다. 그 슬픔은 내가 여기에 있다는 비극적 현실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시인은 이 슬픔을 통해서 단순한 문명비판을 넘어 인간의 삶에 대한 근원적 성찰과 우리 시대에 대한 비판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우리가 문태준 시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쉬운 언어, 공감의 표현, 소통의 화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상투와 단순함을 넘어서는 사유의 깊이 그것이 바로 문태준표 문학이다.

 

문태준 시인의 수상을 축하하며 아울러 이번 수상이 시인에게나 우리 <애지>에게나 큰 영광이었으면 한다.

 

심사위원 일동(황정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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