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집에 구멍을 빌려 지으면서 시작된 식탐이다
무엇이든 훔쳐야 직성이 풀리는 업보다
어둠을 갉아먹으며 사람들의 은밀한 말소리를 귀담아듣는다
정해진 목적지는 없으므로 속절없이 칸칸이 들어찬 어둠을 헤맨다
침묵이 답이라 믿으며 썩은 음식물 냄새로 묵묵히 이동할 뿐이다
이따금씩 고양이 소리에 눈을 번뜩이며 살기를 맛본다
눈알은 갖고 있으나 몽유하는 혼령처럼 스스로를 볼 수 없다
끊임없이 헤매도 변하지 않는 역마살
어디서 시작되고 끝은 어디쯤인지 가늠하지 못한다
풀벌레가 뱉어내는 소리는 비명 같다
가느다란 수염은 한껏 거추장스러운 자존심이다
진술실의 조명처럼 가로등은 꺼질 줄 모르고
쥐가 가는 길을 탐색한다
달이 한 겹씩 탈피를 해도 여전히 같은 곳을 뒹굴듯
보이지 않는 틀 속에서 질주한다
치부를 드러낸 채 무방비 상태로 널브러진 쓰레기봉투 위에
까닭 없이 올라서 보기도 하며 허무를 베어먹는다
어쩌면 도사리고 있는 덫 사이를 정처 없이 떠도는
시한부 목숨일지도, 긴 꼬리로 지나온 길을 곱씹으며
막다른 길로 질주한다, 막다른 길이 집이다
[당선소감] “시인의 붓으로 시를 쓰며 내 삶을 증명해 보이겠다”
나는 침묵부터 배웠다. 문장을 꼭꼭 씹으면 해체된 자음과 모음이 입안에서 굴러다녀서 애를 먹었다. 내 눈길이 닿는 곳마다 나를 바라보는 내가 있었다. 거울 속엔 아직 덜 자란 저편의 내가 불쑥 울어버릴 것처럼 앉아 있었고 계절을 지나온 지문 투성이 과거들은 쉽게 금이 갔다.
타자로서 스스로를 되비추는 과정은 결말뿐이라고 생각한다. 글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어제의 나를 능가할 새로운 가치관을 찾아야 하는 일은 아직도 나의 숙제이다. 간절함에 대해 믿지 않았으나 일기장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내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할 때, 시는 금세 다가와 주었다가도 뭔가 끄적이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다시 어둠 속에 꼬리를 감춰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서로를 견뎌내는 방식은 배웅과 마중이었으므로 나는 기꺼이 다시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 시는 슬며시 고개를 들었고, 어쩌면 나는 잠깐 그 얼굴을 본 것도 같다. 그 뿐이었다. 나는 아직 시의 손을 잡지 못했다. 입 맞추지 못했다.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을 하던 중 소식이 당도했다. 이른 초여름 햇살이 세상의 녹음을 짙게 하듯, 그렇게 불현듯 가슴 벅찬 순간이 내게 올 줄이야.
본인 외에는, 심지어 나 자신조차도 작품에 대해 폄하하지 않게 하시고 시의 광활한 세계를 열어주신 최금진 선생님께 가장 먼저 가슴 깊이 감사드린다. 선생님의 가르침 덕에 여기까지 걸어왔으니 앞으로는 쉴 틈 없이 달려갈 것을 약속드리고 싶다. 늘 사랑으로 다독여주시고 이끌어주셨던 문지원 선생님, 그리고 작품을 발표할 때면 기성 작가처럼 대우해주시며 과감하게 시를 앓을 수 있게 해주신 박찬일 교수님 외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님들께 감사드린다.
예술대학교에 다니는 예비작가로서 자긍심을 갖게 해주신 교수님들의 지지에 꺾이지 않을 시인의 붓으로 시를 써 보답해드리고 싶다. 사랑으로 나를 빚고 초라한 빈손으로 키워주신 부모님, 나를 아픈 손가락으로 감싸 쥐고 또 다른 부모님처럼 키워주신 이모와 이모부께도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내게 가장 소중하고 사랑하는 동생 현기와도 기쁨을 나누고 싶다. 최초의 독자가 되어준 모든 친구들과 추계예술대 11학번 문창과 동기들에게도 고맙다.
마지막으로, 나지막히 중얼거리던 내 어린 시들을 눈여겨 봐주시고 뽑아주신 신경림 시인과 유종호 선생님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이제야 비로소 내가 그토록 원하던, 시를 쓸 수밖에 없게 되었으니 보다 나은 시로 내 삶을 증명해 보이고 싶다.
[심사평] “답답한 현실에 대한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대변”
응모작품들을 읽으면서 먼저 느낀 것은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좋은 시를 찾아 읽는 데 게으르지 않은가 하는 점이었다. 여기에는 시를 가르치는 대학이나 이른바 강좌의 책임이 클 것이다. 좋은 시를 쓰는 데는 당연히 좋은 시를 읽는 과정이 있어야 할 터인데 응모작들을 보면 그런 점이 모자란다.
어떤 시가 좋은 시인지 분별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쓴 것 같은 작품들이 너무 많다는 얘기다. 또 응모작들이 발상과 형식에 있어 비슷비슷한 것이 많았는데 이 역시 대학의 시교육과 창작강좌 등의 영향일 터이다.
재담이나 비유 같은 것이 너무 뻔하고 낡은 것들, 예컨대 이미 남들이 써먹었거나 가당치도 않은 것들이 많았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응모작들의 수준이 중앙지의 신춘문예에 비해 결코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모집 시기가 중복되지 않은 데 따른 집중 효과 탓인지 오히려 좋은 작품이 더 많았다는 느낌마저 주었다. 응모작 가운데서 심사자들은 우선 김나영, 조대식, 민슬기 세 사람의 작품에 주목했다.
김나영의 시는 발상이 나이브하면서 순박하다. 다른 응모작들과 선명하게 구별되어 확 눈에 띈 점도 없지 않다. 특히 ‘왕따’, ‘어른 대 어른으로’, ‘사랑받을 자격’ 같은 시들은 그가 아니면 보지 못하는 대목을 관찰하여 시의 재미를 맛보게 해 준다. 한데 상이 너무 어리다. 훈련하면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조대식의 시는 안정되어 있는 것이 장점이다.
궁상스럽고 공연히 웅크리고 하는 대목이 전혀 없이 활짝 펴져 있다. 그 중에서도 ‘벚꽃 지는 날’ 같은 시는 독자를 푸근하게 안아 주는, 아주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수작이다. 하지만 너무 평범하고 안이해서 시의 깊이를 떨어트린다. 작품들이 편차가 심한 것도 문제다. 민슬기의 작품은 좀 답답하고 갑갑한 느낌을 준다. 그러면서도 진지하게 오늘을 살고 그 삶을 깊이있게 성찰하는 자세가 돋보였다.
“시한부 목숨일지도, 긴 꼬리로 지나온 길을 곱씹으며” 질주한다는 ‘쥐, 세입자들’은 그의 자화상이자 오늘을 사는 많은 젊은이들의 초상일 터이다. 언니의 낙태가 소재가 된 ‘백목련의 그림자가 없다’도 우울하고 답답한 내용이지만 현실을 드러낸 한 단면도이다. 이런 면에서 그는 오늘의 젊은이들이 하고 싶은 얘기를 대변하고 있는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답답한 현실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고 해서 시의 형식까지 답답해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좀더 활기있고 시원스레 시를 쓰는 길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상 세 사람의 시 중 민슬기의 ‘쥐, 세입자들’을 당선작으로 뽑은 이유는 위의 심사평으로 충분히 설명이 됐을 것이다.
심사위원 유종호 문학평론가, 신경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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