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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움 / 장승리

 

 

무덤 속 시체들이 벌떡 벌떡 발기하는 동틀 녘

난 가끔씩 내 무덤에 알리움 한 송이 들고 찾아간다 (무덤에 다다르려면 낡은 나룻배를 타고 가야해

할머니 환한 주름 같은 서글픈 물결을 따라 강을 건너야 하지)

무덤에 다다르면 알리움 한 송이 무덤 앞에 내려놓고

내 이름이 적혀있는 묘비 앞에서 잠시 눈을 감는다

눈물샘에서 헤엄치고 있던 잉어 한 마리 파드득 몸부림 칠 때

눈물샘에 동글동글한 파장이 생겨 그 모습에 또다시 코끝이 찡해져 올 때

그제야 난 눈을 뜬다

나를 태우고 왔던 나룻배마냥

무덤도 강물 따라 소리 없이 흘러가고

내 몸에서 여문 꽃잎 하나씩 따다 무덤 위로 떨어뜨리니

꽃잎을 밟고 가는 무덤의 발자국 소리가 내 얼굴을 밟고 간다

강물 위를 떠돌던 하얀 물새는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무덤은 붉은 열매처럼 빛나는데

내 집 담장 너머를 기웃거린 죄

한참을 서성이다 초인종을 누르고 냅다 도망친 죄

나보다 더 큰 내 원죄를 임신한 저 무덤이 내 얼굴을 밟고 간다

 

* 알리움 '끝없는 슬픔'이라는 꽃말을 가진 꽃 이름

 

 

 

 

2002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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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견딜 수 없던 그런 것들이 시를 쓰게 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엇을 하십니까?

-나 자신을 견딥니다."-E M 시오랑

대학 다닐 때 한 교수님은 늘 강조하셨다.

"삶을 향유해라." 만져지지 않는 말이었다.

몸으로 감지되는 삶이란 내게 있어 향유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강간범 같은 아침을 견디는 일이었다.

삶 앞에 무기력하게 가랑이를 벌리고 있는 내 자신을 견디는 일이었다.

며칠 전 누군가 내게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하루하루를 견디느냐고.

생각해보지 않은 당혹스러운 질문이었지만 난 의외로 쉽게,

그러나 단호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견딜 수 없게 하는 것들이 날 견딜 수 있게 해준다고.

그렇다. 견딜 수 없게 하는 것들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했다.

날 살게 했다.

어머니. 아버지, 투병 중이신 고모를 비롯한 나를 나 되게 한 모든 인연들과

그 인연들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당선의 영광을 돌리고 싶다.

내 자신이 시작(詩作)의 열쇠임을 깨닫게 해주신 정호승 선생님과 문학학교 식구들,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오늘은 오래간만에 나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

나는 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줄까?

귀를 기울여야겠다.

 

 

 

 

무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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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신인문학상을 통해 한 사람의 시인을 새로 선보인다는 것은, 세상에 한 사람의 시인을 더 보태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안 그래도 세상엔 시인이란 직함을 가지고 활자 매체에 시를 발표하는 시인들이 많고 많다. 모름지기 우리나라의 시단에 새 이름을 내거는 사람은 우리나라의 시인들이 이제까지 만들어왔던 시의 스펙트럼에 자기만이 내뿜을 수 있는 하나의 색깔을 빛낼 수 있어야 하리라고 본다. 그래서 모국어의 지평을 넓히고, 뒤집고, 아름다이 하는데 기여할 수 있게 된다면 더욱 바람직한 일이 아니겠는가.

 

예심을 통과해 심사위원에게 전달된 작품들 대부분은 모두 일정한 수준에 올라 있었지만, 새로움의 면에 있어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대부분이 기성 시인들의 발성법, 이미지 구사를 그대로 답습하고, 심지어는 그들의 수사적 표현을 흉내내고 있었다. 더구나 문법을 이기려는 시적 표현을 구사하는 것이 아니라 문법이 아예 틀린 표현들이 즐비한 시들을 읽을 때는 무척 괴로웠다.

 

우선, 예심을 통과한 신인 스무 명의 작품을 하나하나 검토하고, 토론하여 여섯 명의 작품을 최종심에 올리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 두 명의 작품들을 남겨 검토한 다음, 장시간의 토론을 통해 당선작을 결정하였다.

 

우선, 천서봉의 플라시보 당신 외 4편의 시들은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돋보였다. 시를 많이 써본 사람의 솜씨였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이 신인이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비유적 표현들이 새롭게 읽히기보다는 장식적으로 읽힌다는 점이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망설이게 했다.

 

조은주의 서커스가 지나간다 외 4편의 시들은 세세한 일상의 순간적 현상들 속에 숨은 세상의 이치, 자신의 인식을 촌철살인으로 내보이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가시적인 세계에서 비가시적인 세계로 진입할 때의 비약, 각 시편들의 단순성이 단점으로 지적되었다.

 

김종훈의 태풍의 눈 외 5편의 시들 속엔 서로 상이한 두 가지 시 세계가 공존해 있었다. 추상적이고 산문적인 시들보다는 차분한 스케치, 언어로 그림을 그린 듯한 묘사시들이 훨씬 더 설득력 있었다.

 

이근화의 고등어 외 6편의 시들은 비유적 묘사보다는 현상을 직시한 다음, 그것을 단순하게 묘사하고, 그 묘사한 것들을 중첩하는 방법을 통해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또다른 세계가 현상 뒤에 숨어 있음을 밝히는 시들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시적 화자가 직접 개입할 때의 피상성의 노출 등이 단점으로 지적되었다.

 

안숲의 새장에서 외 4편의 시는 응모된 작품들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더구나 차분한 묘사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나름대로 해석하는 작가적 역량이 돋보였다. 지속적이고 긴 시간을 짧은 순간에 압축하는 능력, 세상을 바라보는 깊이 있는 시각도 있었다. 더구나 "코끼리의 무덤처럼 길이 끝나는 곳, 후미진 곳에 가로수들의 무덤이 있을 것이다"(가을에) 같은 문장들이 읽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그와 아울러 상투적인 표현들이 더 많았다.

 

장승리의 알리움외 14편의 시들은 우선 표현들이 신선하고, 자신만의 일상적이고도 심리적인 경험과 접합된 지점에서 터져 나오는 것 같은 언술들이 시선을 붙들었다.

 

15편의 시들 속엔 간혹 극적이고, 작위적인 상황을 노출하는 시들도 있었지만, 그러한 시들은 여성적 화자가 억압적 상황을 고발하고 타개하려는 지난한 몸짓으로 읽혀졌다. 그러나 이 시들 속에서 우리나라 여성 시인들이 이제까지 개척하고, 확대한 시적 언술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부인할 순 없었다. 자신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를 가다듬어야 하리라.

 

안숲의 계단에서와 장승리의 알리움 중에서 알리움을 당선작으로 선하였다. 계단에서 등등의 익숙함보다는 알리움을 비롯한 그 밖의 작품들 곳곳에서 번뜩이는 신선미를 선택하였다. 장시간에 걸친 토론이었지만 합의는 신속하고, 유쾌하게 이루어졌다.

 

심사위원 이시영.김혜순 / 예심 강형철.나희덕.하응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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