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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새는, / 이시하(이향미)

 

 

낡고 어두운 그림자를 제 발목에 묶고 생의 안쪽으로 타박타박 걸어들었을 테지 비에 젖은

 

발목을 끌며 어린 날개를 무겁게 무겁게 퍼덕였을 테지, 가느다란 목덜미를 돌아 흐르는 제 절박한 울음소리를 자꾸자꾸 밀어냈을 테지 여물지 못한 발톱을 내려다보며 새는, 저 혼자 그만 부끄러웠을 테지, 그러다 또 울먹울먹도 했을 테지

 

어둠이 깊었으므로

이제,

어린 새의 이야기를 해도 좋으리

 

나지막이 울음 잦아들던 어깨와 눈치껏 떨어내던 오래된 흉터들을 이제, 이야기해도 좋으리 잊혀가는 전설을 들려주듯,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 낯설고 차가운 이국의 신화를 들려주듯 이제, 당신에게 어린 새를 이야기해도 좋으리

 

새는,

따스운 생의 아랫목에

제 그림자를 누이고

푸득푸득, 혼잣말을 했을 테지

흥건하게 번지는 어둠을

쓰윽, 닦아내기도 했을 테지

 

새는.

 

 

 

나쁜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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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박새의 장례식 / 김우진

 

 

벚나무 가지에 하얀점박이 새울음이 걸려 있다 요란한 울음에 꽃들이 화르르 무너진다 안절부절, 이 나무 저 나무를 콩콩 뛰어날며 마음을 땅에 내려놓지 못하는 저 박새, 품고 살아온 내 안의 통한 같은 긴 소리, 바람이 눈물을 지우려고 따라다닌다

 

벚나무 뒷담, 끈끈이 쥐약통에 붙은 수컷, 눈을 뜨고 죽었다 나동그라진 비명이 서늘히 식었다 허공을 박차던 힘찬 날개는 고요히 접혔다 곁을 맴도는 암컷, 마음이 다급하다 사흘을 굶은 저 곡소리, 벚나무 가지가 철렁 내려앉는다

 

봄꽃들도 문상을 한다 나뭇가지에 걸린 바람이 새울음을 쓰다듬는다 조문객으로 끼어 든 봄비의 눈시울이 촉촉하다

 

해 질 녘 꽃비 내리는 벚나무 아래 새를 묻는다 찌찌찌, 마지막 울음도 함께 묻힌다 그제서야 마음을 내려놓고 포르르 빗속으로 날아가는 새 한 마리, 꽃잎이 새의 무덤을 덮는다

 

 

 

 

 

[우수상] 슈퍼맨의 꿈 / 최준영(김경선)

 

 

하늘대학 항공과 졸업생, 그는 추락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약발이 다 떨어진 슈퍼맨 4년째 악몽에 시달린다 휘날리던 망토는 가시나무에 걸려 궤도 이탈, 배터리는 바닥이다 또 한 차례 사막의 모래바람이 몰려온다 무릎이 푹푹 빠진다 삼각팬티 한 장이 전부인 슈퍼맨, 단봉낙타 등에 빨대를 꽂아 연명한다

 

모래물결무늬 속에 바다가 숨어있다 죽은 물고기가 하늘로 튀어오른다 감금당한 바다가 사라지던 날 키 큰 선인장이 앞치마를 두르고 이젠 안 속아 붉은 눈으로 사막의 중심을 쏘아본다 미라가 사막을 벌컥벌컥 삼켜 버릴 거야 한 때 슈퍼맨을 지지하던 낙타가 짙은 안개를 변명처럼 게워낸다 붉은 여우도 길의 꼬리를 놓쳤다 사막을 폭식한 슈퍼맨이 달그락달그락 라면을 끓여 먹는다 퉁퉁 불은 달은 오래도록 차갑게 식었다

 

천하무적 슈퍼맨 모래언덕에 빠졌다 푸드득 조개무늬가 순식간에 날아간다 숨어있던 나뭇잎 무늬도 팔랑팔랑 사라진다 모래바람 소리가 밤새 낙타의 등에 쌓인다 사막에서 건너온 뙤약볕, 미라의 몸에 균열이 생긴다 수북한 모래봉분 속으로 실종된 꿈이 덤덤하게 걸어들어간다

 

무덤이 하나 더 늘었다 이제 아무도 슈퍼맨을 믿지 않는다 정보지 구인란을 훑어보는 슈퍼맨 몸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져 나온다 쿵! 침대 밑으로 백수건달 사내가 굴러 떨어진다

 

 

 

 

 

[우수상] 버드나무 장례식 / 이종섶

 

 

두 팔을 벌려야 겨우 안을 수 있었던

동네 어귀 버드나무 한 그루

길을 넓히기 위해 베어낼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연고조차 없어 애를 태웠으나

밑동이 잘려 우지끈 넘어진 나무를

운구하기 알맞게 자르기 시작했을 때

하나 둘 나타나는 유족들

가족들의 뿌리였던 할머니 위로

든든한 기둥이었던 남편이 먼저 내려왔고

그 위에 있던 자식들도 차례로 도착했다

평생 살을 맞대고 살던 남편이

허공으로 뻗어가는 어린 가지들 뒷바라지가 힘겨워

노모를 돌볼 생각조차 못 했던 아들과 딸들이

기계톱의 부음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것이다

잠시 후면 트럭을 타고 떠나갈 가족들

유품으로 남긴 나이테 편지를 읽었을까

언제나 동구 밖을 바라보며 살았던 할머니

떠나간 가족들이 보고 싶을 때는

땅속을 헤집는 뿌리 끝까지 그리움이 사무쳤는데

자를 건 자르고 뽑을 건 뽑으면서

가족들에 대한 추억을 하나씩 수습한 후

마침내 지상에서 그 흔적을 완전히 지웠다

움푹 파인 집에 남겨진 뿌리들은

간혹 할머니의 기억을 틔우기도 하겠지만

빈집을 헤매다 숨을 거둘 것이다

 

 

 

 

수선공 K씨의 구두학 구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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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390명의 투고 작품 중에서 본심에 올라온 것은 모두 51명의 작품이었다. 투고된 작품의 양도 적지 않았지만, 본심에 오른 작품의 수준도 만만치 않아 이 상에 대한 신인들의 뜨거운 관심이 놀라웠다. 이 상이 10회를 거듭해 오는 동안 좋은 시인을 발굴하고 또 시에 뜻을 둔 사람들을 고무시켜 우리 시단에 긍정적인 기여를 하여 왔음을 반갑고 기쁘게 느낄 수 있었다. 원고에서 투고자의 이름을 모두 빼고 가능한 한 모든 선입견을 배제한 상태에서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심사를 진행한 것도 이 상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데 기여했으리라 생각된다. ‘수주 변영로라는 큰 시인의 이름과 10년의 전통과 심사의 공정성을 두루 생각한다면, 수상자나 투고자 모두 이 상에 대한 자긍심을 가져도 좋다고 생각한다.

 

본심에서 선자들의 손에 끝까지 남은 작품은 버드나무 장례식4(이종섶), 박새의 장례식4(김우진), 슈퍼맨의 꿈4(최준영), 새는,4(이향미) 등이었다.

 

버드나무 장례식4편은 일상적인 삶의 평범한 경험을 극적인 형식에 담고 있지만, 나뭇잎 지는 것을 등 위에 벼랑을 만들어 한순간에 떨어지는 종소리로 표현하는 것과 같이 그것을 드러내는 이미지는 평범하지 않다. 그 이미지는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과 미적 감각을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시에 삶과 세계에 대한 상식적인 깨달음을 담아 제시하려는 태도가 보여 아쉬웠다.

 

박새의 장례식4편은 삶이나 자연의 비극적인 순간을 포착하여 그것을 극적으로 엮고 압축해내는 솜씨가 매우 뛰어나다. 이 시의 이미지는 밀도와 집중력과 긴장으로 내면의 부정적인 정서를 미적으로 변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을 밀어내는 힘이 진정성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것인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적 완성도를 의식하고 지나치게 잘 쓰려고 하면 그것이 오히려 시적 완성도를 떨어뜨린다는 점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슈퍼맨의 꿈4편은 우선 재미있다. 그 재미는 부조리하고 무거운 삶과 일상을 경쾌하고 가벼운 어조로 웃게 만드는 반어적인 유희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그 유희는 삶을 억압하는 거짓과 모순을 떠올리게 하고, 그것을 통쾌하게 웃음거리로 만든다. 그러나 충분히 육화되지 않아 장난스러워 보이는 표현과 태도가 가끔 눈에 띄었다.

 

새는,4편은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내면적인 정서에 새겨진 상처를 위무한다. 이 시들은 화려하고 세련된 표현은 없지만, 삶의 경험을 과장하거나 꾸미지 않고 객관적으로 응시하며 그것이 충분히 숙성되기를 기다리는 태도를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좋은 미덕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그것을 자신만의 개성으로 강력하게 밀어 올리는 에너지가 다소 약해서 시가 밋밋해 보인다는 것이 단점으로 지적될 수 있겠다.

 

논의된 네 분의 작품 모두 나름대로의 개성적인 특징과 함께 단점을 가지고 있어서 어느 한 작품을 단번에 고르기는 쉽지 않았으나, 결국 이향미씨의 작품을 대상으로 밀기로 하였다. 이향미씨의 대상 수상을 축하하며, 아울러 우수상을 수상한 세 분에게도 축하를 드린다.

 

- 심사위원: 이가림ㆍ김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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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애벌레 / 이종섶

 

 

낡은 책장은 망치로 부수는 것보다
드라이버를 사용하는 것이 더 간단하다
나무의 이음새마다 박혀있는 나사못
숨쉬기 위해 열어놓은 십자정수리를 비틀면
내장까지 한꺼번에 또르르 딸려 올라오고
허물처럼 남아있는 벌레의 집에
어두운 그림자가 밀려들었다
안간힘을 다해 붙어있는 것들을
대여섯 마리씩 잡을 때마다
하나 둘 떨어져나가는 책장의 근육들
바닥에 납작 주저앉을 무렵엔
한 줌 넘게 모인 애벌레가 제법 묵직했다
가지와 가지 사이를 물고
깊은 잠을 자야했던 동면기가 끝나면
훨훨 나비가 되어 숲속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책장이 늙어버린 탓에
애벌레만 집을 잃고 말았다
꼼지락거리는 것들 땅바닥에 던져버리려다
회오리돌기가 마디마디 살아있어
공구함에 보관해둔다
상처도 없고 눈물도 없으니 언젠가는
다시 나무속에 들어가 살게 될지도 모른다
밤만 되면 꾸물꾸물 기어 다니는 소리
나무의 빈 젖을 물고 싶어 오물거리는 소리
고아원의 밤이 깊어간다

 

 

 

수선공 K씨의 구두학 구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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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시는 진실한 나의 평생친구”

 

시를 습작하기 시작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시와 함께 걸어온 듯 했으나 실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시는 날마다 나의 위로와 기도가 되었으나 나는 돌아서면 시를 잊어버렸다. 시는 나에게 기꺼이 친구가 되어주었으나 나는 결코 시의 친구가 되어주지 못했다. 시가 나에게 찾아와 조용히 말을 걸 때마다 나는 귀 기울여 들어주지 못했고 내 길을 가기에만 바빴던 것이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시 쓰기를 한 이후는 오히려 내가 시를 붙잡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고, 동시에 시를 절망하고 원망하는 일이 많았었다. 뒤늦게 다시 손을 벌리는 내가 친구에게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 친구와 함께 계속 한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 또다시 저울질 하곤 했었는데, 바로 그 순간 시가 슬며시 내게로 와서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오랜 친구와의 반가운 해후가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이제 서로의 마음을 깊이 알고 이해하는 사이가 되었으니, 그동안 시가 나를 친구로 대해주며 나를 지켜주었던 것처럼 나도 시를 내 진실한 친구로 대하며 살고 싶다. 친구 이야기를 잘 듣고 잘 전하며 살고 싶은 것이다.

이 친구를 내게 보내주신 하나님께 제일 먼저 감사드린다. 가족과 함께 몇몇 이름도 부르고 싶다. 사랑하는 아내 선미와 두 딸 가을과 하늘, 시를 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던 최영환 조수일 백미경 시인, 시의 깊이를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박은영 시인, 함께 동행하고 싶은 최은묵 시인.

무엇보다 심사위원들께 머리 숙여 깊이 감사드린다. 부족한 시를 뽑아주신 그 뜻을 알고 더욱 정진할 것을 약속드린다. ‘18일에 본심이 끝났으나 성탄선물을 드리려고 24일에 전화했다’는 대전일보사에도 가슴 벅찬 감사를 드린다.

 

 

 

 

바람의 구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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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독특한 상상력… 개성 돋보여”

 

결심에 오른 작품들의 수준은 작년보다 높았다. 언어를 다루는 능력이나 깊이 있는 주제를 다루려고 노력한 점 등에서 대부분의 작품이 일정 수준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신춘문예 투고작들이 종종 그렇듯이 요설로 인해 불필요하게 글이 길어진 작품이 많다는 점, 그리고 개성적인 작품이 드물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 중에서 다섯 사람의 작품이 거론되었다. ‘흑백필름’은 착상의 신선함에서, ‘털과 향로’는 섬세한 언어구사에서, ‘졸참나무 숲’은 주제를 추구하는 힘에서 좋은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약간씩의 결점도 가지고 있어 당선작으로 밀기에는 미진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집’과 ‘책장애벌레’를 놓고 꽤 오랜 시간 숙의하였다. 나름대로의 장점을 갖추고 있어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웠던 때문이다.

‘그녀의 집’의 지은이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다양한 시어를 자유롭게 엮어가는 솜씨가 돋보인다. 특히 이 작품은 장애를 가진 몸으로 아이를 길러내는 여인을 토마토 나무와 연결하여 건강성을 추구한 짜임새 있는 전개가 좋았다.

‘책장애벌레’는 독특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낡은 책장을 부수는 과정을 담은 이 시는, 해체된 책장 자체보다 책장을 지탱하였던 나사들에 주목하였다. 나무를 물려 책장을 구성했다가 할 일을 잃은 나사들에게 연민과 애정을 표현한 이 시는, 이 시대에 자기 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상실감을 우회적으로 전달한다.

숙고 끝에 심사위원들은 시적 표현의 세련미보다는 개성 쪽의 손을 들어주기로 했다. ‘책장애벌레’는 생생하고 힘이 있어 감동을 창출하는 데 좀 더 강했다. ‘그녀의 집’도 당선작이 될 만한 역량을 가지고 있었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좌절하지 말고 좋은 시를 쓰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김명인, 양애경 / 예심 심사위원: 이정록, 박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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