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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 은여우 / 이은봉   

 

 

봄바람은 은여우다 부르지 않아도 저 스스로 달려와 산언덕 위 폴짝폴짝 뛰어다닌다

은여우의 뒷덜미를 바라보고 있으면 두 다리 자꾸 후들거린다

온몸에서 살비듬 떨어져 내린다

햇볕 환하고 겉옷 가벼워질수록 산언덕 위 더욱 까불대는 은여우

손가락 꼽아 기다리지 않아도 그녀는 온다

때가 되면 온몸을 흔들며 산언덕 가득 진달래꽃 더미, 벚꽃 더미 피워 올린다

너무 오래 꽃 더미에 취해 있으면 안 된다

발톱을 세워 가슴 한쪽 칵, 할퀴어대며 꼬라지를 부리는 은여우

그녀는 질투심 많은 새침데기 소녀다

짓이 나면 솜털처럼 따스하다가도 골이 나면 쇠갈퀴처럼 차가워진다

차가워질수록 더욱 재주를 부리는 은여우, 그녀는 발톱을 숨기고 달려오는 황사바람이다.

 

 

 

봄바람, 은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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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두 번째 맞는 송수권 시문학상본상에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인 이은봉(63) 시인의 열번째 시집 봄바람, 은여우(도서출판b,2016)’가 선정됐다.

 

또 올해의 남도시인상에는 배용제(54) 시인의 시집 다정(문학과지성,2015))’, 젊은 시인상에는 이병일(35) 시인의 아흔아홉 개의 빛을 가진(창비, 2016)’이 각각 선정됐다.

 

전남 고흥군이 주최하고 송수권 시문학상 운영위원회가 주관하는 2회 송수권 시문학상시상식은 내달 3일 고흥문화회관에서 시낭송대회와 함께 열린다.

 

본상 수상자에게는 상금 3000만원이, 올해 남도시인상과 젊은시인상 수상자에게는 각각 상금 1000만원과 500만원이 수여된다.

 

본상 수상작인 이은봉 시인의 시집 봄바람, 은여우는 자연 대상을 인간의 삶과 관련 짓고 그것을 다시 우주적 존재로 확대 해석하는 상상력의 긴축과 확장을 구현해 송수권 시인이 이룩한 문학적 성취와 각별히 연결됐다는 평을 받았다.

 

펴낸 시집에 실린 해설에서 김종훈 문학평론가는 변화무쌍한 바람과 맞물려 시집이 지향하는 의미가 어느 하나로 고정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동시에 평면에 깊이를 확보했던 것처럼 봄의 풍경에 다른 시간이 있다는 것을 환기해 준다고 평가했다.

 

이은봉 시인은 충남 공주출신으로 숭실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84년 창작과비평 17인 신작시집에 좋은 세상등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발표 시집으로는 좋은 세상’, ‘봄 여름 가을 겨울’, ‘절망은 어깨동무를 하고’, ‘무엇이 너를 키우니’, ‘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등이 있고, 그 외에도 평론집으로는 실사구시의 시학’, ‘진실의 시학등을 펴냈다.

 

현재 한국작가회의 부이사장, 광주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으며, 질마재문학상과 한국가톨릭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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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가 움찔할 때 외 4편 / 안성군  

이른 아침 무에 들었던 

거무스름한 살얼음 


점퍼를 덮고 잠든 사람 

그 사람 밖으로 삐죽  빠져나온 

푸릇한 발을 한참 바라본 적이 있다. 


햇살 들 때까지만 바라봐야지 

햇살에 무가 움찔할 때까지만 

바라보아야지 하며 

지켜본 적이 있다. 


동사(凍死), 제 계절에 죽지 못한 

철없는 주검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무는 구덩이에 묻혀 

노란 싹을 뚫는 봄을 기다리고 

생채기 많던 손을 골라내고 

흙 묻은 신발을 골라내던 

아무리 끌어 덮어도 

모자란 겨울밤이 있다. 


마치 웅크린 몸을 지키는 

문지기처럼 나와 있던 

무의 파란 웃통을 본 적이 있다. 




집이 운다


한파주의보에도 

잠잠한 집 

바짝 웅크린 잠 같은 집 위로 

흰 눈이 내렸다. 


 그 사이 짬을 내어 풀린 한파 

웅크렸던 집이 

훌쩍훌쩍 

똑똑 운다. 

지붕 밑 주림을 

지붕 끝이 안다는 듯이 

적요하게 집이 운다. 


우는 집은 고아 같다 

어쩌다 화목한 기회를 모두 놓치고 

망연하게 서서 울던 집 

을씨년스러운 집은 모두 단란(團欒)의 유품 같다. 

집 마당에서 떨고 있는 개 

개를 만져주는 푸르뎅뎅한 손 

두 귀가 한껏 넘어 간다. 


무럭무럭 조난신호 같은 연통 

그 난로 속으로 

한 토막 넣어 주고 싶은 

소주 반 병 

울던 집도 뚝 그치고 

유일한 소일엔 바람이 빠져 있다. 


하루의 끝자락은 

꾸덕꾸덕 힘이 세다. 






총체적인 총체 


엄마는 자주 

총체(總體)로 나를 때리곤 했다. 


엄마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화근인 나를 화풀이처럼 털어내곤 했다. 

나는 총체적 난국인 셈이다. 


엄마의 주특기는 

총체로 온 집 안 구석구석을 털어내는 일. 

나는 집안의 어디쯤에 

웅크리고 있는 구석일까 


엄마와 나는 서로의 근심 

 근심이 구석이라고 생각했다. 


총체는 구석만 만나면 

먼지만 만나면 

춤추는 듯 즐겁게 

분란을 일으켰다. 


먼지들의 대장도 못 되는 나는 

어느 꼬리를 닮은 털이범은 더욱 못 된다. 


엄마의 취미는 창문을 열고 

분란을 밖으로 털어내는 일 

분란이 다 빠져나간 내 방은 또 

을씨년스럽다. 







털신


그 집을 지나치다 

털이 수북한 신발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을 본다. 

언젠가 노인 한 분이 

저 털이 수북한 신발을 신고 

자꾸 나를 돌아보던 생각이 났다. 


불시에 사람과 맞닥뜨린 짐승이 

어둑한 저녁 쪽으로  사라지던 그 풍경 

사람과 짐승의 경계도 아직은 

살 만하다는 듯이 

저녁이면 불이 켜지고 

아침이면 밭은 기침 소리가 들리곤 했다. 


네 발과 두 발을 두고 

고민하는 듯 

한 사람의 생애가 기울어지고 

때로는 하늘이 넘치곤 했다. 


천천히 발부터 

짐승으로 변해가는 그 집의 노인 

어떤 걸음을 택할지 

고민하듯 천천히 걷고 있는 

털이 수북한  발이 자꾸 생각나는 것이다 








노는 땅 


우리 동네에는 노는 땅이 많다. 

생전의 할머니가 가끔 다녀오시던 

노구를 짜내어 흥겹게 춤추던 

관광버스 풍경처럼 노는 땅 많다. 

그런 노는 땅을 찾아내서 

같이 놀던 할머니 


노는 땅들은 바쁘다. 

종자를 가리지 않고 몰려든 풀들 

온갖 곤충들부터 고양이까지 

누군가 버리고 간 가전제품 

환삼덩굴 줄기를 타고 신나게 논다 


논다. 라는 말엔 

감출 수 없는 흥겨움과 한적함이 동시에 있다. 

그런 노는 땅과 놀던 할머니 

지금은, 밑으로부터 여섯 칸 

우로 네 번째에서 무료하시다. 


비가 내리는 날 

질퍽질퍽 땅들은 잘도 논다 

찡그리거나 구겨지다 슬금슬금 펴지는 것들 

호미, 낫, 지팡이, 수레 

각종 농기구를 가지고 논다. 


노는 땅들은 오늘도 

우거지고 가지런해진다. 









[당선소감] 


  시는 여전히 어렵습니다. 아닙니다, 사실은 시까지 끌고 가거나 끌고 와야 될 관계들과의 소통이 어렵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사람에게는 누구나 나름의 방식이라는 것이 있어 그 얄팍한 방식을 고집한 끝에 당선 통보를 받았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한쪽 방향으로만 쏟아지는 밤, 새벽 틈새 속에서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어야 했던 지난날들이 잠깐의 단잠에 들겠습니다. 어릴적부터 꿈꾸었던 것이 이렇게 부풀어 시인이라는 이름을 갖게 해 주신 심사 위원분들께 감사합니다.  믿고 기다려 주시고 지원을 아끼지 않은 부모님, 감사합니다. 다시 새로운 계획 앞에 선 성희에게도 힘내라는 말 전합니다. 넌 할 수 있다고 매일매일 응원해 준 준섭아, 고맙다. 그리고 같이 등단하자고 다독여 주고 어설픈 글들 많이 봐줬던 형석이 형, 형의 친절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항상 시의 기초에 대해, 인간의 품성에 대해 이야기해 주시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신 임동확 교수님께 존경의 감사를 드립니다. 


  시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아직 진행중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직도 배워야 하고 써야 할게 너무 많은 저에게 시는 슬쩍 구석 한 편에 감춰두고 싶은 소중한 보물 상자와도 같습니다.  언젠가 시를 가르치는 위치에 설 수 있다면, 이 진행중인 감정들을 나직하게 이야기해 주고 싶습니다. 




[심사평] 


 올해 《실천문학》신인상에는 총 198명이 응모했으며, 예심을 거친 6명의 작품이 본심에서 논의되었다. 이번 신인상 심사를 통해 얻은 인상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많은 응모자들이 이미 언어의 조탁자로서 뛰어난 시적 기술을 발휘했지만 과도한 외국어 및 외래어 사용, 지나친 관념어 남용, 관념적 사변 취향은 시의 본질을 흐리게 만들었고, 심사위원들을 다소 피곤하게 만들었다. 

  이하루 씨의 작품들은 개성 있는 상상력과 담대한 시의 전개가 인상적인데,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구구절절한 문장들을 통해 오히려 시인이 표현하고 싶은 핵심을 놓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조시현 씨는 미학적인 서사를 시에서 구현하고자 한 노력이 돋보이지만, 응모한 작품들 모두가 산문적일 뿐 아니라 비슷한 구조와 어조를 반복하고 있어 지루해질 우려가 있다. 장안아 씨의 시는 일상을 재발견하는 시선을 담고 있으며 리듬감 있게 읽히는 맛이 있다. 그러나 글쓴이의 신성한 착상을 시의 몸으로 담아내기 위해서는 좀 더 끈질긴 싸움이 필요할 것이다. 장주영 씨는 어떤 거대한 세계 앞에서도 훼손 될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을 그려냈다. 그러나 역시 시 속에 너무 많은 '할 말'들을 욱여 넣음으로써 시의 본질을 놓치고 있지 않은가 한다. 석범진 씨는 다체로운 주제와 소재를 자신만의 감각으로 끌어올려 심사 위원들에게 새로운 프레임을 전해 주었다. 다만 시의 주제의식을 더욱 집요하게 끝까지 펼쳐낸다면 더 큰 가능성을 가진 문청으로 성장하리라 믿는다. 

 당선작으로 뽑은 안성군 씨의 시는 화려하지도 발랄하지도 않다. 하지만 편편의 시가 서정성을 갖고 자기만의 시선과 호흡을 견지하고 있다는 데서 남다른 인상을 주었다. 이는 근래에 우리 시단이 얼마나 소통 가능한 시에 목말라 했는지를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음에 와 닿는 시는 어떤 것인가, 생활이 있고, 육성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각성과 성찰을 가져다 주는 시를 기다린 심사 위원들에게 이 젊은 당선자의 시는 한겨울에 "삐죽 빠져나운 푸릇한 발"(무가 움찔할 때)처럼 선명하게 우리를 각성하게 했다.  

 또한 '조난 신호'같은 연통이 있고, '훌쩍훌쩍' 울기도 하는 집이지만 "하루의 끝자락은/꾸덕꾸덕 힘이 세다"(집이 울다)라는 표현을 통해 이 시인이 가진 결기,'꾸덕꾸덕'버티며 세상과 맞서는 복서와 같은 자세를 심사 위원들은 확신할 수 있었다. 

  안성군 씨가 그려낸 시 속 주인공은 대개 반백수거나 노동자거나 노인이다. 안성군 씨는 그들을 응시하고 발견함으로써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으로서 끈끈한 동류의식을 발현하고 있다. 그리하여 시인은 마침내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람이요, 어떤 위협앞에서도 자신의 서정과 역사를 수호하고자 하는 '문지기'에 다름 아님을 확인시켜 준다. 

  안성군 당선자의 새로 출발을 축하하며, 한국 문학의 미래를 잇는 시인으로서 성장하길 바란다. 아울러 신인상에 응모해 주신 많은 분들에겓게도 고마움을 표한다.  


- 심사위원 : 김은경, 이승하, 이은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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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레옷을 입은 구름 / 이은봉

 

 

걸레옷을 입은 구름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자꾸 달과 나 사이의 교신을 끊는다 교신이 끊기면 달에 살고 있는 잠의 여신을 불러올 수 없다

 

옛날 구름은 그냥 수증기, 수증기로는 나와 달 사이의 교신을 끊지 못한다 지금 구름은 고름 덩어리, 걸레옷을 입은 구름은 제 뱃속 가득 납과 카드뮴 감추고 있다

 

이제 내 숨결은 달에게로 가지 못한다 달의 숨결도 더는 내게로 오지 못한다

 

달과 숨결을 주고받을 때라야 잠의 여신은 숨결을 타고 내려와 내 몸을 껴안을 수 있다 잠의 여신이 내게로 내려오지 못하는 것은 걸레옷을 입은 구름이 제 뱃속에 납과 카드뮴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걸레옷을 입은 구름이 중화학공장 출신이라도 되는가

 

도대체 바람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아직도 비닐장갑을 낀 채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저 한심한 바람이라니! 잔뜩 인상을 찡그린 채 도시의 뒷골목 어슬렁대고 있는 저 조폭 똘마니 같은 바람이라니!

 

걸레옷을 입은 구름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자꾸 나와 달 사이의 교신을 끊는다 교신이 끊기면 달에 살고 있는 잠의 여신을 불러오지 못한다

 

바람이 걸레옷을 입은 구름을 밀어내지 못하면 아무도 잠들지 못한다 하느님도 눈 부릅뜬 채 몇 날 몇 밤을 깨어 있어야 한다.

 

 

 

 

걸레옷을 입은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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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질마재신화혹은 질마재문학상에 대한 몇 가지 상념

 

졸시집 걸레옷을 입은 구름으로 질마재문학상을 받게 되었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아직도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질마재문학상은 우선 미당의 시집 질마재신화(일지사, 1975)를 떠올리게 한다. 질마재신화는 이내 미당의 고향마을로 달려가게 한다. 미당의 생가와 문학관을 방문했던 적이 모두 몇 번인가. 10여 차례가 넘으리라. 학생들과 함께 찾았던 적만 해도 여러 차례이다.

 

질마재문학상은 미당의 시업을 기리는 데 의미가 있다. 우리 세대의 시인 중 미당의 시를 읽지 않고 시를 공부한 사람은 없다. 나도 역시 미당의 시를 읽으며 시를 공부해왔다. 미당 전집을 읽다가 쓴 논문만도 2편이나 된다.

 

한국현대시사에서 미당만큼 좋은 시를 쓴 시인은 많지 않다. 미당의 시집 가운데에서는 질마재신화보다 떠돌이의 시(민음사, 1976)80소년 떠돌이의 시(시와시학사, 1997)를 좀 더 좋아한다. 물론 미당의 시집 중에는 ??늙은 떠돌이의 ??(민음사, 1993)떠돌이라는 말을 쓰고 있기는 하다. 내가 미당의 시집 가운데 떠돌이의 시80소년 떠돌이의 시를 좀 더 좋아하는 까닭은 단순하다. 이들 시집에는 미당 나름으로 받아들인 당대의 삶과 생활과 현실이 좀 더 잘 육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당의 시집 떠돌이의 시80소년 떠돌이의 시를 좀 더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질마재신화를 무시할 수는 없다. 이 시집 질마재신화역시 미당이 받아들인 당대의 삶과 생활과 현실이 잘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이런 이유만으로도 나는 미당의 이 시집 질마재신화를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다.

 

미당의 이 시집 질마재신화는 첫째 백석의 시집 사슴에 대한 대타적 자의식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이 시집에는 새마을운동, 산업화, 개발과 건설 등 이른바 근대화에 대한 미당의 대타적 자의식이 작동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집과 함께 하는 미당의 대타적 자의식 중에는 1960년대 이래 우리 시단을 풍미해오던 모더니즘시에 대한 반감도 들어 있다고 이해된다.

 

미당의 고향 질마재는 아직 그런 대로 잘 보존이 되어 있다. 하지만 내 고향 막은골은 흔적도 사라져버려 자꾸 가슴을 아프게 한다. 세종시가 건설되면서 완전히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나는 내 고향의 모습을 시로라도 남기고 싶어 막은골 이야기연작시에 매달리고 있다. 백석의 시집 사슴이나 미당의 시집 질마재신화가 없었다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질마재문학상을 받은 만큼 더욱 분발해 졸시집 막은골 이야기를 잘 완성해볼 생각이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세 분의 심사위원, 김남조, 문효치, 김승희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특별한 연고가 없는 데도 받는 상, 고맙고, 송구할 따름이다.

 

 

 

걸어 다니는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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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인생을 배운 후에 시가 나올 때의 무르익음의 언어

 

5<질마재 문학상> 심사에 올라온 시집들을 살펴보면서 느낀 것은 지난 한 해의 시집 출간이 양적으로 질적으로 매우 풍성했다는 것과 다양한 개성의 스펙트럼을 지닌 시인들이 기량을 빛내며 만만찮은 성좌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었다. 심사위원들은 예심을 거쳐 올라온 열권 남짓한 시집들을 논의했으며 우리 시단의 풍성함과 다채로움에 오롯한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또한 어떤 시집들은 전문적으로 기교를 배운다는 요즘 가수들을 생각나게 한다는 점에서 기량은 우수하지만 무언가 허전하고도 화려한 공허함을 주기도 했다. 결국 좋은 문학이란 포스트모던 감각으로 명멸하는 이 어지러운 세계에서 그 표피를 스치며 지나가는 얇은 언어들의 무도회라기보다는 깊은 삶에서 시간과 경험의 가혹함을 견디면서 오랜 숙성의 항아리를 거쳐 우러나온 무르익음의 언어가 아닐까, 라는 의견이 오갔다. 결국 시적 언어의 문제는 교감과 감동인 것이다.

 

결국 심사위원 전원의 일치로 이은봉 시인의 시집 걸레옷을 입은 구름이 제5<질마재 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만만찮은 인생의 무게와 시간의 숙성을 거쳐 깊은 상상력과 따뜻한 언어로 묵직한 삶의 정경을 보여주는 이은봉 시인의 시세계는 자연의 넓은 생명력과 인간애를 바탕으로 산업화 시대에 버려진 우리 이웃의 그늘을 잘 보여준다. 그의 시에는 늘 비속한 세계에서 망가진 개인들의 이력이 들어있고 아픈 기억의 시간이 축적되어 있다. 넓은 가슴의 긍정이 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폐타이어에서 지장보살을 보며 지장보살이 아프다/ 땅도 아프다 검게/ 저무는 것은 다 아프다// 아픈 몸으로 그는 다시/ 거름을 만들고 있다 샐비어 몇 송이/ 빨갛게 꽃피울 꿈을 꾸고 있다처럼 망가진 자연의 순환 속에서도 자연과 이물질인 문명과의 불가능한 순환을 꿈꾸기도 한다. 그의 시 속에는 만물이 그물코처럼 얽혀있는 존재의 꿈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하나의 이물질(문명)로 인해 그 만물의 순환이 깨어진 끔찍한 현장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시인이란 바로 그 불가능한 것의 순환의 둥근 원환圓環을 포기하지 않고 꿈꾸는 자가 아니겠는가.

 

시집 <걸레옷을 입은 구름>삶의 어두운 이면을 그리면서도 황폐하지 않고 따뜻한 시선으로 주변의 생을 관찰하는 안정된 상상력”(김남조)민들레꽃이 보여주는 따뜻한 감수성과 자연과의 교감 뒤에 숨어 있는 개인의 슬픔을 포착하는 날카로운 시선”(문효치)을 통해 아름다운 대자연 속에서도 무언가 망가진 부조화를 느끼는(만드는) 근대 인간의 소외와 슬픔을 웃음기 묻은 시선으로 원숙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제5회 질마재 문학상의 수상 시집으로 선정되었다. 축하를 드리며 더욱 대성을 기원한다.

 

심사위원 김남조, 문효치, 김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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