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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기념사업회' 등이 주관하는 제12회 전태일문학상 수상작으로 소설부문에 김옥숙(35)씨의 ’너의 이름은 희망이다’가, 생활·기록부문에 정경식(45)씨의 ’결코 멈출 수 없다’가 각각 선정됐다. 시 부문은 당선작을 내지 못했다.

 

소설 부문 가작은 서창덕(37)씨의 ’꿈의 전화’와 조채운(24)씨의 ’그 많던 차장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가, 시 부문 가작은 윤석정씨의 ’자목련’외 2편, 임희구(38)씨의 ’곱창’외 6편이, 생활·기록 부문 가작은 김명순(31)씨의 ’운명의 배반’외 1편이 각각 뽑혔다.

심사위원들은 “전태일 열사의 고귀한 정신을 간직하고 이어가되 현장투쟁이라는제한된 소재에 얽매이지 않고 보다 다양한 우리 삶의 진면모를 보여주는 모든 인간보편의 주제를 다룬 작품들의 주제의식이 돋보였다”고 평했다.

시상식은 다음달 7일 오후 5시 민주노총 서울본부 강당 3층에서 열린다. 한편 ’사회평론’은 이들 당선작과 가작을 전부 수록한 제12회 전태일 문학상 수상작품집 「너의 이름은 희망이다(외)」를 출간했다.

 

 

 

 

[가작] 자목련 / 윤석정

 

 

다세대 주택을 지나면 사내의 아이들이 동네 초입 계단에 앉아 졸고 있다 노을이 아이들의 검은 얼굴로 스미면 밥을 안친 아낙들은 어둠을 집으로 당긴다 사내는 일당과 맞바꾼 돼지고기 네 근을 얇은 불볕에 굽는다 한 점, 한 점 사내의 아이들이 입을 벌리며 지저귄다 사내는 상추쌈을 싸서 아이들의 입속에 넣어준다 사내의 혀끝엔 봄 내를 덜 씻은 쑥갓처럼 쓴 약이 퍼진다 방문으로 기웃거리다가 입맛이 돋우어진 목련나무, 꽃망울에 구수한 냄새가 어린다 혹, 집주인이 잠을 털고 나와 홍자색 꽃망울을 바라볼까봐 사내는 조바심을 낸다 달빛이 소곤소곤 잠든 시각, 사내와 아이들은 오롯하게 목련보다 먼저 꽃피운다

 

 

 

 

[가작] 곱창 / 임희구

 


흰눈이 팡 팡 팡 쏟아지는 밤
양철 깔대기에
능글능글한 돼지창자를 까뒤집어 놓고
썩은 똥찌꺼기를 훑어낸다
돼지똥을 만진다
라디오에선 주의 탄일을 축하 축하하고
고무통 속 찬물에 담긴 돼지창자에선
죽어 나자빠질 똥냄새가 퍼진다
모락모락 퍼진다
진동한다
손가락이 얼어터져
손가락이 똥이 될 것만 같다
찜통 속 펄 펄 펄 끓는 물이
똥 뺀 창자를 기다린다
얼어터지다 불 속으로 들어가는
기가 막힌 돼지창자의
싯누런 똥냄새 울려 퍼지는
즐거운 메리 크리스마스

 

 

 

 

너의 이름은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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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의 힘과 전태일의 정신

 

본선에 올라온 작품들은 대체로 높은 수준을 보였고, 안정감이 있었다. 특히 윤석정의 시는 구체적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함께, 대상 사물을 사람의 삶 속에 끌어들여 엮는 솜씨가 뛰어났다.

 

바닥에선 집 나와 서러운 지느러미들이 퍼덕거린다

출항 없이 헛물켠 그의 생활인양

빚진 자리마다 채반은 흠집투성이다

애써 살아보려 했던가

잘못 든 바닷길에서 압류당한 영혼을 채반에 넣고는

그의 굽은 등잔은 물결따라 너울지며 갯내음을 터는 중이다

 

- <멸치>일부

 

위에서 삶의 벼랑에 몰려 서울에서 내려와 멸치잡이가 된 그와 바다에서 잡혀와 말려지는 멸치는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일체가 되어 엮어져 있다. 감정과 사상을 대상 사물에 투사하여 일체감을 만들어내는 것은 시의 기본적 힘이다. 시는 불화와 갈등의 세상을 그러한 힘으로 넘어서려 한다.

그와 멸치의 삶은 모두 세상과 결렬되어 절망적인 상태에 있지만 그 양자가 엮어져 일체감을 형성하면서 그 힘으로 마침내 절망을 희망으로 전화시킨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멸치처럼 굽어 있던 허리를 펴고

묵직하던 지느러미도 높이 펴본다

 

- <멸치> 결말 부분

 

버려진 것, 하찮은 것들로 하여금 비늘을 반짝이듯 희망의 빛을 발하게 하는 시의 힘이 이런 곳에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시의 힘은 전태일의 정신과도 일맥상통할 것이다.

임희구의 시에는 삶의 절실함과 함께 구체적 사물과 현상을 통해 세상을 꿰뚫어보고 비트는 풍자성과 그것을 날렵하게 처리하는 재치가 있다.

 

온종일 밥그릇이나 가마솥에서 사람들의 따뜻한

위장 속으로 들어갈 때를 기다리다 지쳐 굳은살

배기던 그 시절. 귀엽게 사랑받던 그때야 늘

내가 당당한 끼니로 군림했었지

 

(……)

 

무엇이 남을까? 어디에도 내가 몸 붙일 곳은 없어

간혹 손님 없는 식당에서 볶음밥이 되려고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 그것은 내가 아니야 숨막히는

전기밥통 속에서 쉴 틈 없이 열 받다가 가끔 변질되어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면 그때야 찬밥이 되지

 

- <찬밥> 일부

 

위 시의 화자는 찬밥이라는 사물이다. 찬밥의 시선으로 사람들의 소중한 끼니가 되었던 과거 찬밥의 처지와 전기밥통 속에서 뜨겁게 달달 볶이다가 변질되어서야 쓰레기로 버려지는 지금의 찬밥의 처지를 비교해 이야기하고 있다. 하찮은 것이 하찮은 것의 시선으로 이야기되면서 신선하고 새롭게 다가온다. 그리고 말미에서 찬밥의 이야기는 사람의 이야기로 전화하면서 우리들에게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 편리한 첨단 문명의 사회야말로 인간을, 노동자를 결국 쓰레기처럼 내던지는 사회가 아니냐고.

 

썩은 찬밥이 되지.

내 설 자리가 없는 지금은 첨단 공화국

그대들도 언젠가 파묻혀 갈,

 

- <찬밥> 마지막 연

 

우리 시에는 풍자시의 전통이 미미하다. 소중한 재능을 잘 키워가기 바란다.

 

윤석정, 임희구의 시를 가작으로 정했다. 당선작으로 하지 않은 것은 두 사람의 시가 많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전태일의 정신을 살리면서 한 시대의 새로운 스타일을 개척하는 시를 만나고 싶다는 심사위원들의 과도한 욕심 때문일 것이다. 더욱 정진하기 바란다.

 

- 심사위원 김진경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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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미용실 / 윤석정

 

 

능선으로 몰려든 검은 구름이 귀밑머리처럼 삐죽삐죽 나온 지붕에 한발을 걸친다 그 사이, 좁다란 골목길이 계단을 오르며 헉헉 숨 내쉬는 곳에 할아범 측백나무와 오페라 미용실이 마주 서 있다 그는 매일 미용실 바깥의 오페라를 감상한다 미용실 눈썹처마에 모아둔 나뭇잎 음표들이 옹알거릴 때 가위를 갈다가 번뜩이는 악보의 밑동, 백지에 오선을 긋던 어머니는 병세를 자르지 못해 머리에 자란 음표를 모두 빼내 옮겨 적었고 연주가 서툰 아버지는 가파른 골목길로 내려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해 오페라를 관람하려고 모여든 사람들은 측백나무에서 음표를 떼어 내던 앙상한 어머니를 목격하였다 어머니를 마구 흔들고 지나간 바람이 옥타브를 높이며 구름 떼를 몰고 오기도 했다 미용실 문이 열리자 그는 내내 벌려 예리해진 가윗날을 접는다 머라숱이 적은 손님의 머리카락이 잘려나갈 때마다 음치인 울음이 미용실에서 뛰쳐나간다 동네 아이들이 집으로 가는 길에선 울음이 두근거리는 아리아로 변주해 울려 퍼지고 측백나무에서 마지막 남은 음표가 눈썹처마에 떨어질 때 낮은 지붕 위로 함박눈이 음계 없이 쏟아진다 나뭇가지 오선지 끝에 하얀 음표가 대롱대롱 매달리고 악보에 없는 동네 사람들이 돌림노래처럼 몰려나와 희희낙락 오페라를 구경한다

 

 

 

 

2005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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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겨울가뭄 극복할 큰 힘 생겨

 

거주민만큼 계단이 많은 동네, 흑석동에서 겨울을 두 번 맞는다. 시간은 어떤 맨홀에 빠져 허우적거렸을까. 되돌아보면 어둔 구멍에 빠져서 며칠 묵었다고 여기게 된다.

 

애벌레처럼 웅크린 잠에서 깨던 날이면 창밖에 내리는 빗소리인지 녹슨 수도꼭지에서 물이 새는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릴 때가 많았다. 그런 소리들은 적막을 밀어내는 음계 같은 거였다. 혹은 내 가슴속에서 총총히 계단을 만드는 시 같은 것. 나는 반지하방에서 꿈틀거리다가 다시 잠이 들곤 했다. 가끔 퇴고를 하는 꿈도 꾸면서.

 

고교시절, 나의 유일한 친구는 시였다. 나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해주는 소중한 존재로 어느새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시가 내 곁에 그냥 있는 게 아니라고 알았을 때부터 나는 절망을 알게 되었다. 줄곧 비가 내리던 날이 많았다. 겨울이 오면서 눈이 내리길 간절히 기다렸다. 내게 있어 희망이란 어디서나 공평하게 내리는 눈발 같은 거였기에.

 

눈 쌓인 거리를 이유 없이 걷고 싶었다. 꼭 그래야만 지금을 견뎌낼 수 있을 것만 같았으므로. 드디어 청천벽력처럼 전해진 당선소식은 눈발이 되어 쏟아졌다.

 

그 순간 나는 사유의 계단을 찬찬히 오르 내리게 해준 흑석동이 참 고마웠다.

 

나의 긴 겨울가뭄에 눈발을 내려주신 두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고마운 분들이 꽤 많습니다.

 

존경하는 교수님들. 묵묵히 믿어주신 이승하 선생님, 나에게 내릴 눈발을 간절히 기다린 지우 경주. 친구들. 내 시의 고향 그루터기, 시동, 생각만 해도 치열해지는 원광문학회, 멋진 14기 동기들, ·후배님들, 포에티카 선배님들. 식충이를 한없이 믿어준 사랑하는 부모님과 뚝섬 고모, 미순, 석완, 언제나 봄날 같은 누나 미선, 내 귀여운 동생 석민.

 

이제는 길이 가려진 눈길을 더 힘차게 가야겠습니다.

 

 

 

 

[심사평] “발랄한 상상과 비유 돋보여

 

예심을 넘어온 시편들의 기교적 수준은 일반적으로 높았으나 개성과 다양성이 조금 부족한 듯한 느낌이었다. 한 편의 시란, 아무리 작은 규모의 작품이라 할지라도, 재현(현실)의 축과 표현(개성)의 축, 그리고 언어(기호)의 축을 가지고 있게 된다. 어느 한쪽이 너무 과부하를 받거나 결핍되면 진정한 시의 역동적인 생명감이 태어나지 않는다. 시 텍스트는 그러한 삼위일체 긴장의 아비투스 속에서 고유한 생명의 빛을 발하게 된다.

 

많은 응모작 중에서 심사위원은 최명희의 비닐 하우스와 이해존의 이곳은 난청이다’, 윤석정의 오페라 미용실에 주목했다. ‘비닐하우스는 현실감각과 현실의식은 뛰어난데 시속에 들어있는 이야기와 이미지의 전개에서 조금 상투성이 엿보였다. 누군가 한번 해본 소리 같다. 아니 누군가 한번 해본 소리라 하더라도 자기만의 상상력과 언어의 힘으로 표현해낼 때 새로운 자기 작품이 태어난다.

 

이곳은 난청이다는 아주 단단한 작품이다. 그러나 상상력에 한계가 있는 것 같고 나는 비참하다라는 엄살기가 조금 엿보인다. 그러나 이미지의 전개에 밀도가 높고 단단해서 적지 않은 재능을 느낄 수 있다.

 

윤석정의 오페라 미용실을 당선작으로 선택하는데 두 심사위원은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오페라 미용실늙은 측백나무미용실이 마주 보고 서있는,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것만 같은 낯익은 마을 풍경을, 신선한 상상력과 생생한 비유로 하나의 생동감 있는 음악 공간으로 변형시킨다.

 

현실감각도 없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진부한 재현의 세계는 아니며, 아주 발랄하고 풍부한 상상력인데 그렇다고 낯설게 멀리 나아가지도 않았다. 말하자면 재현의 세계와 표현, 언어의 세계가 잘 어울려 아주 맛있게 배합된 시의 맛을 그득하게 한 상() 잘 차려 놓았다. 어디까지나 요약과 압축을 전제로 하는 한 편의 시는 잘 차려낸 모국어의 한 상() 성찬이어야 한다는 시의 매력을 잘 보여준 이 시인은 다른 응모작인 마늘에서도 그 섬세하고도 단단한 재능을 보여준다. “만삭인 나는 아랫배 쓸어본다./ 아기는 얼마나 여물었을까/ 어머닌 내가 태아였을 때도 씨 뿌려두고/ 탯줄이 잘 이어졌는지, 더듬이가 돋은 마음/ 자라는 것에 먼저 닿게 했으리라와 같은 아름다운 섬세함과 상상력의 고요한 역동성은 살아 있다. 더욱 정진하여 대성하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신경림·김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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