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잔등거미 / 오유균
달덩이가 창에 붙어 누런 진액을 흘렸다 어머니는 마른 풀잎 같은 기침을 자주 뱉었다 그때마다 등잔불이 자주 흔들렸다 밤이면 대숲이 빈 몸으로 울었다 돌아누운 어머니 등은 무덤처럼 둥글고 검었다
해질 무렵, 어머니는 마을로 내려가 기울어진 달을 이고 올라왔다 휘어진 산길을 돌아서면 바람이 스스슥 소리를 내었다 산새는 검고 깊게 울었다 부른 노래를 또 부르며 어머니 옷자락을 잡고 걸었다 가끔씩 바구니에 담긴 달이 흘러 어머니 얼굴에 줄을 쳤다 내가 아는 노래는 너무 짧았다
낯선 도시 떠다니는 동안 닿지 않는 나를 향해 줄을 내리고 기다림을 익혔다 허공에서 길을 놓친 그날, 햇빛이 들지 않는 습한 방에 담겨 둥글고 검은 눈물을 흘렸다
골목 돌아서서 벽을 후려칠 때
낮게 걸려있는 집 한 채
턱을 박고 체액을 빨고 있는 내가 보인다
어머니가 몸을 푼 집
오그라드는 몸에서 내린 저, 질긴
줄
[심사평] 흠잡을 데 없는 언어의 조탁과 유려한 리듬
본심에 올라온 것은 열 분의 작품들이다. 열 분의 응모작들을 여러 번에 걸쳐 숙독을 했는데, 더러는 응모자들의 상상력이 현실 세계에 작동하는 중력과의 싸움에서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지 못한 점들이 눈에 띄었다. 시적 상상력이 현실의 중력을 뚫지 못할 때 통념적 사유에 갇히고 만다. 좋은 시인은 제 상상력을 독창적이고 비범한 현실 통찰의 힘으로 전환할 줄 알아야 한다. 시의 실패는 현실 이해의 피상성, 깊이를 머금지 못한 독창성, 언어의 공허함, 야무지지 못한 은유의 남발에서 여지없이 전시된다.
먼저 <염소와 제천역> 외, <'고독' 한 접시 안 사실래요> 외, <발들의 내력을 쓰는 피노키오의 편지> 외, <수족관 사용 설명서> 외, <저녁 초대> 외, <강은 과녁을 품고 있다> 외 등의 작품들을 내려놓았다. 이들 작품들에 개성의 촉들이 있고, 살 만한 장점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언어와 체험의 접점이 기대치에 못 미치고, 가치 감각의 영역을 꿰뚫어 보는 안목이 미미했다. 시적 내공이 모자라다는 증거다.
최종적으로 남은 것은 <서쪽 문이 열리고>, <미확인물체>, <꽃밭>, <흑잔등거미> 등을 투고한 네 분의 작품들이다. <서쪽 문이 열리고>는 안정감 있는 호흡과 언어의 운용이 돋보이고, "서쪽으로 가을이 들어오고/내 어깨 너머로 강물 하나가 휘어진다"와 같은 도입부도 마음을 끈다. 허나 뒤로 갈수록 시적 긴장이 이완되는 점이 아쉬웠다. 이는 의식의 치열함을 끝까지 밀고 나갈 사유의 동력이 미약한 탓이다.
<미확인물체>는 시적으로 가용하는 언어 영역을 확장하려는 의도가 돋보인다. 중력과 척력, 블랙홀, 중력 이불 등과 같은 새로운 어휘들은 인지의 지평선을 넓게 그리려는 투고자의 의욕을 보여준다. 하지만 "불면의 밤마다 마신 커피나 내일의 블랙커피처럼 과거와 미래의 블랙홀은 더 많아요"와 같은 구절들은 쉽게 진부한 산문에 갇혀버린다. 그런 구절들이 나온다는 것은 사유의 정밀함과 시적 조형력에서 미흡하다는 혐의를 걸기에 충분하다.
한 투고자의 <꽃밭>, <빈집>, <구름의 확장> 등은 소품이지만, 시적 재능을 느끼게 한다. "꽃밭은 그늘을 잡아당긴다./한 그늘이 끌려가고 있다"와 같은 구절도 날카로운 관찰의 산물이다. 사유의 명랑성, 시적 어조의 활달함이 인상적이고, 단문의 힘을 밀고 나간 것도 좋아보였다. <흑잔등거미>라는 매혹적이고 완성도가 높은 시와 당선을 겨룬다는 게 유일한 불운이었다.
<흑잔등거미>를 흔쾌하게 당선작으로 뽑는다. <흑잔등거미>는 한 편의 작품으로 거의 흠잡을 데가 없이 언어의 조탁과 유려한 리듬을 보여준다. 달-어머니-흑잔등거미로 이어지는 이미지의 연쇄가 자연스럽고, 은유와 상징의 효과는 끝까지 집약적이다. 삶과 현실에 대한 통찰을 이만한 의미 있는 구조 속에 녹여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비극의 전조를 잡아채는 직관을 갖고 있는 시인으로 짐작된다.
큰 시인으로 성장하길 기원한다.
심사위원 장석주(심사위원장), 손택수(예심), 유지소(예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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