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들다 / 송종철
가까이 있는 모든 것은 서로 집중하고 있다 폭우로 뻘겋게 드러난 교회 언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녹색으로 변했다 몇 해 전부터 카페가 들어서기 시작한 거리 빈터 여기저기에 경작금지라는 팻말이 보인다 누군가는 스며들고 또 누군가는 닮아간다
물든다는 것은 당신의 책 속 주장에 동의한다는 말이고 어릴 적 나와의 약속을 저버리는 일이다 오랜 기침이 가라앉는 학하리의 아침은 새로운 습관이 된다 유튜브 ‘내 편이 필요할 때’ 광고 배경음악을 하나하나 찾아 듣는 오후 창문 안으로 스며드는 아카시아 향기, 물들고 싶다는 것은 날리는 꽃잎을 맞으며 당신의 집에 다가가는 일이다 날 저물도록 걸어가는 벗어나기 힘든 길이다 길게 늘어진 주차 행렬이 내려다보이는 벤치 오래 머무르는 풍경이다
당신의 색깔로 변해가는 시간 맨 앞에는 두꺼운 기억의 막이 있다 머금고 있는 생각이 단단해진 땅을 흠뻑 적시는 동안 기억 속 이름들을 견딘다 사람들은 유행처럼 곧 지나갈 거라고 말한다 작은 흙 알갱이 사이로 촉촉한 생각이 울먹울먹 배어 나오는 동안 버릇처럼 온몸으로 번져나가는 당신
서서히 겹쳐지는 익숙한 화면 나는 나의 손을 놓는다
[당선소감]
시 공부를 시작하면서 김사인 시인의 특강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일상, 나날의 형언들은 모두 시가 될 수 있다. 시는 무엇을 무엇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그 무엇에 대한 존경과 경외의 표시가 바로 시이다.” 공학을 해오던 나에게 간단해 보이는 이 정의는 시를 쓰는 기본 알고리듬처럼 들렸습니다. 하지만 지금껏 마음속으로 늘 되뇌고 있습니다. 나는 특별하게 알아주고 불러줄 일상을 찾아내지 못하는구나. 그리고 무엇을 무엇이라고 부를까 애를 씁니다. 매번 원점, 시를 쓰기 위해 주위와 대면하는 시간은 늘 겸손해지려고 노력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내년에는 소바처럼 낮고 슴슴한 시를 써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중에 당선 통보를 받았습니다. 기쁨보다는 부족한 글을 마지막까지 들고 읽어줬다는 놀라움이 앞섰습니다.
지금까지 한남대와 대전문학관에서 시의 세계로 이끌어주신 성은주 교수님, 길상호 시인님, 김영남 시인님, 양예경 교수님 그리고 최은묵 시인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많은 시간 동안 습작을 읽어주고 소중한 조언을 해주신 최현주, 김미옥, 김광명 시인님과도 이 기쁨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맨 처음 소리 내 작품을 읽어주는 아내 한경민, 언제나 우리는 원팀 미란, 미선과 근홍 고맙고, 사랑해
어려운 시기에도 기회를 주시고 제 글을 뽑아주신 뉴스라인제주와 심사위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좋은 시를 쓰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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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부드러운 언어의 전개와 잔잔하게 발화하는 서정의 향기
제주의 중심 인터넷신문 <뉴스라인제주>가 <2022 영주신춘문예>를 공모한 결과 전국에서 예년처럼 북적북적 많은 예비 시인들이 모여들어 그들의 심장 소리를 들려주었다. 자본주의 세상과는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분야가 문학이라지만, 갈수록 팍팍해지는 우리들의 삶을 만져주는 작품들이 용호상박 치열한 각축을 벌였다.
최후까지 검토한 작품은 시조 2작품, 시 3작품이었다.
김미진의 시조 ‘콩나물 이력서’는 진술의 발상이 상큼하여 매력적이었다. 김미경의 시조 ‘대숲을 읽다’는 시상 전개가 깔끔하였다. 송종철의 시 ‘섭지코지 문서’와 ‘물들다’는 세밀한 묘사와 진술, 호흡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힘을 보여주었다. 송문희의 시‘뜨거운 외출’은 땡볕 속에서 말라가는 지렁이의 모습을 ‘펄펄 끓는 오후의 번제’로 보고, 그것을 요즘의 구직인(求職人)과 결부시켜 형상화한 수작이었다.
고심을 거듭한 끝에 신선한 비유, 부드러운 언어의 전개와 서정의 향기가 잔잔하게 발화하는 송종철의 ‘물들다’에 눈길이 머물렀다. 이어 함께 보내온 작품들이 일정 수준에 도달함을 확인하고 당선작으로 뽑아 들었다. 독특한 상상으로 N포 세대 청춘들의 아픔과 희망을 노래한 김미진의 ‘콩나물 이력서’와 송문희의 ‘뜨거운 외출’도 끝까지 붙들고 있었다. 다음 기회에 좋은 결과를 기대한다. 당선자께 축하의 말씀을 드린다.
심사위원 김춘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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