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 한상록
보십시오. 내게 빈 하늘을 열어
가벼운 마음 옷차림으로 흙을 밟게 하십시오
어디선가 두엄 지피는 향내 그윽하고
새살 돋는 들풀의 움직임 간지럽지 않습니까
돌아오지 않았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꿀벌의 잉잉거림 속에 묻어오고
겨우내 강을 건너지 못했던 나무들의 희미한 그림자가
아지랑이 실핏줄로 살아나지 않습니까
잃은 것이 있다면 내 뜰로 와서 찾으시지요
이제 내 뜨락에 샘을 내므로
흩어진 목숨붙이들 찾아 모으려 합니다
바람만 드나들던 수족관을 가셔내고 맑은 수면에다
튀어오르는 날빛 지느러미를 풀어놓으면
찰랑거리는 햇빛을 입고 내 생의 물보라 아름다울 겁니다
옥상에 내어걸린 빨래 나날이 눈부시어가고
누군가가 돋움발로 벗어붙힌 몸을 넘겨다 보면
산록의 묵은잠을 흔들어 놓을
아스라한 진달래향 더욱 곱지 않겠습니까
저 만치 다가오는 나무들의 길이 보이고
새순같은 배꼽을 드러낸 개구쟁이 아들놈
동화 속의 악당을 찾아 타앙 탕 말을 달리면
그 길목을 따라 몇굽이의 강이 흘러서
우리의 얼어붙은 꿈도 촉촉이 적셔지지 않겠습니까
[당선소감] 견뎌내기 힘든 나날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
동지를 몇 시간 앞두고 퍼져있는 겨울햇살이 온누리를 물들여 가고 있다. 그 햇살의 누리를 뚫고 겨울나무의 깡마른 우듬지가 마지막 남은 허공 몇 점을 어루만져 주고 있다. 우주가 품고 있는 넓고 깊은 섭리의 눈초리는 저 작은 매만짐 하나하나 마저 놓치지 않는 치밀함으로 가득해 있으리라.
당선통보를 받기 바로 전에는 내게 짐 지워진 삶의 녹록치 않음을 두고 마냥 한탄만 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삶에 대한 내 나름의 고집이 있지 않으면 견뎌내기 힘든 나날이었다. 고진감래라고 했던가. 비루하기 짝이 없고 손대는 족족 막히기만 했던 내 인생의 나날 가운데 참고 견디다 보니 이런 엄청난 홍복까지 주어지는 날도 있다니, 이 당선소감을 쓰고 있는 이 시간까지도 얼떨떨하기만 하다.
이십 년 전에 나는 어느 문예지의 신인상을 받으면서 당선소감문에 백의종군하는 마음가짐으로 오직 한 길만을 걸어가겠다고 힘주어 말한 적이 있다. 그 다짐이 있어서였는지는 몰라도 나의 글 쓰는 일을 가로막는 많은 악조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는 일념으로 견뎌냈다. 하지만 바늘구멍보다 뚫기 힘들다는 신춘문예 당선이 어디 일념 하나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란 말인가.
나는 이번 신춘문예 당선을 통해 다시 한번 깨닫는다. 보이지 않는 도움의 손길이 없으면 결코 얻어질 수 없는 자리에 내가 서 있다는 사실 말이다. 끝으로 이번 당선을 통해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와 글 쓰는 일을 계속해나갈 명분을 안겨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과 불교신문사에 멀리서나마 큰절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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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재주 부리지 않고 평상심 거스르지 않았다
뽑는 자는 눈이 번쩍 뜨이는 작품을 바라는 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작품이 “여기 나 있소” 하고 나타나는 일은 쉬운 노릇이 아니다. 이번의 응모작 가운데서 나에게 뽑혀온 작품들을 세 등급으로 나누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들을 다시 골랐다. 네 번씩이나 읽은 나머지였다. 그것이 ‘검’, ‘나무의 모든 냄새들에 대하여’, ‘돌고래 정착기’, ‘물 위에 지은 집’, ‘단풍’, ‘남술이’, ‘연보라 제비꽃’, ‘귀공’, ‘느그는 좋겠다’, ‘봄’, ‘풍경’, ‘산사에 눈이 내리면’, ‘서울 아리랑’이었다. 이 가운데서 ‘봄’이 마지막까지 남았다. ‘봄’의 인상은 첫째 안정감이다. 들쭉날쭉하지 않다. 재주 부리지도 않는다. 언어에 무리가 생기는 일이 드물었다. 진부한 표현이 한 두군데서 걸렸으나 작품 전체의 평상심을 그다지 거스르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러나 이 작품 바로 다음에 ‘검’, ‘나무의 모든 냄새들에 대하여’가 아쉽게 뽑히지 못한 사실에 빚지고 있다.
심사위원 고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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