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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 / 변선우

 

 

나는 기나긴 몸짓이다 흥건하게 엎질러져 있고 그렇담 액체인걸까 어딘가로 흐르고 있고 흐른다는 건 결국인 걸까 힘을 다해 펼쳐져 있다 그렇담 일기인 걸까 저 두 발은 두 눈을 써내려가는 걸까 드러낼 자신이 없고 드러낼 문장이 없다 나는 손이 있었다면 총을 쏘아보았을 것이다 꽝! 하는 소리와 살아나는 사람들, 나는 기뻐할 수 있을까 그렇담 사람인 걸까 질투는 씹어 삼키는 걸까 살아있는 건 나밖에 없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걸까 고래가 나를 건너간다 고래의 두 발은 내 아래에서 자유롭다 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고래의 이야기는 시작도 안했으며 채식을 시작한 고래가 있다 저 끝에 과수원이 있다 고래는 풀밭에 매달려 나를 읽어내린다 나의 미래는 거기에 적혀있을까 나의 몸이 다시 시작되고 잘려지고 이어지는데 과일들은 입을 지우지 않는다 고래의 고향이 싱싱해지는 신호인 걸까 멀어지는 장면에서 검정이 튀어 오른다 내가 저걸 건너간다면복도의 이야기가 아니다 길을 사이에 두고 무수한 과일이 열리고 있다 그 안에 무수한 손잡이

 

 

 

2018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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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잠들기 전 다시, 시를 쓰러 떠나겠습니다 나를 잡아먹는, 한없이 살아있는 밤 속으로

 

어둡고 축축한 시간을 지나오다 당선 소식을 들은 건, 서점 화장실이었습니다. 그만, 맨바닥에 널브러졌습니다. 오래 달린 사람처럼 다리가 무거웠습니다. 영혼을 거울 속에 박제해두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왜 거기에 두고 왔을까질문을 업고 방에 들어왔는데, 책상에 엎질러진 진통제 상자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저 모서리들이 나를 지나다니는 것 같은 기분. 자꾸만 아팠습니다. ‘더 쓸 수 있겠구나싶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진통제를 깨물어 먹으며 빈 몸으로 책상에 앉았습니다. 이게 내 전부인 것처럼. 내 몸을 횡단하는 무수한 알약과 슬픔을 사랑할 각오를 했습니다. , 책 몇 권과 영혼을 데리러 어느 날 서점에 가볼 작정입니다.

 

부족한 시를 선택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제 시의 전부인 김완하 선생님, 제 앎의 전부인 조해옥 선생님 고맙습니다. 수없이 깨지고 무너져도 시 속에서 버틸 수 있던 건 손미 선생님 덕분이었어요. 제 롤모델인 박송이 선생님, 감사합니다.

 

우리 소고기 공동체, 응원해 준 연구실 식구들, 고마워요. 나의 친구들, 덕분에 웃을 수 있었어. 대학원 원우님들, 끝까지 함께 가요.

 

나의 전부인 김종중 집사님, 변진순 집사님. 첫 독자, 선미 누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며 잠들기 전 다시, 시를 쓰러 떠나겠습니다. 알약이 내리는 책상 앞으로. 나를 잡아먹는, 한없이 살아있는 밤 속으로.

 

 

 

 

[심사평] 다층적 은유에 의한 소재의 확장 흥미로운 시적 사유의 전개 보여줘

 

본심에 올라온 23명의 작품들은 대체로 일정 수준 이상의 성취도를 보였다. ‘저격수5편은 시적 발상에 있어 독특함과 힘을 보여줬지만 상식적 진술과 지나치게 평이한 문장들이 종종 눈에 띄어 아쉬웠다. ‘저격수이외 작품들이 수준의 편차를 지닌 것도 최종 결정을 유보하게 만들었다. 이는 시적 묘사의 힘을 보여주는 골목의 흉터와 같은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반부와 달리 후반부에서 문장의 탄성이 떨어지고 이 작품 이외의 작품들에서 이를 만회할 만한 신뢰를 구하기는 어려웠다.

 

오렌지 저장소5편은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비유가 참신하고 소재를 시적으로 묘사하는 역량 역시 돋보였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당선작과 더불어 검토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더러 지나치게 설명적인 문장들이 눈에 띄었기에 조금만 덜 친절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이런 점들을 세세히 검토하며 변선우 씨의 복도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우선 응모한 작품 모두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적 역량에 대한 신뢰감을 주었다. ‘복도는 소재를 다층적 은유에 의해 능란하게 확장함으로써 흥미로운 시적 사유의 전개를 보여줬다. 시가 감상에 지나치게 의존하며 과장으로 치닫거나 지적 퍼즐로 스스로를 축소시키는 현상이 빈번하게 목도되는 이즈음에 소재를 집요하게 응시하는 힘과 다층적 사유를 전개하는 역량을 지닌 신인에게 출발의 즐거움과 불쾌하지 않은 부담감을 함께 안겨주는 것이 제법 그럴듯한 일이라고 결론 내렸다. 변선우 씨에게 축하의 악수와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 심사위원 김혜순 시인(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조강석 문학평론가(인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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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 / 이준규

 

 

복도는 복도다, 복도는 걸어갈 수 있고, 복도는 서서 끝을 볼 수 있다, 복도는 너를 사랑한다, 복도는 말이 없고, 겨울밤의 복도는 조금 미쳐 있다, 복도에는 달빛이 흐르지 않고, 가로등빛이 흐르지 않고 복도의 불빛이 흐른다, 그것들은 흐르는 것들이다, 나는 복도의 끝에서 복도의 끝을 본다, 문을 열면서, 복도의 끝을 바라보면, 그 끝은, 어떤 아가리 같다, 용광로, 조금 떠서 날아가면 그 용광로에 삼켜질 수 있을 것 같은, 나는 너를 생각한다, 나는 그를 생각한다, 조금 미쳐서, 고개를 숙이고, 어떤 감동이 있는가, 누구에게도 묻지 않는다, 복도에는 창이 있고, 창밖에는 나무가 있고, 나무의 밖에는 세상이 있고, 세상의 밖에는 망설임이 있고, 망설임의 밖에는 황당함이 있고, 황당함의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것 말고는, 내가 너에게 이 시를 줄 것 같으냐, 나는 조금 미쳐 있고, 조금 미쳐서 겨울밤의 이 누추한 시를 쓰고 있다, 복도는 복도다, 복도에는 어떤 것들이 흐른다, 나는 복도에서 무언가 망설였다, 창을 열면서, 너를 사랑했다, 창을 닫으면서, 너를 사랑했다, 복도는 망설이는 곳이다, 우주처럼, 복도는 우선 복도다, 복도는 하나의 지평을 가지며, 복도는 두 개의 지평을 가지며, 복도는 세 개의 지평을 가진다, 복도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복도에 신문이 떨어질 때, 복도에 아이들이 뛰어갈 때, 복도에 세탁부가 지나갈 때, 복도에 손님이 지나갈 때, 복도는 여전히 복도다, 복도는 우울하다, 복도는 조금 휘어 있다, 복도는 정확한 직선이 아니다, 복도는 조금 미쳐 있다, 조금 미치고 있는 내가 바라보는 복도는 조금 미친 복도다, 복도는 깨끗하지 않다, 복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복도에서 벗어나 문을 열고 마루로 진입해야 한다, 나는 복도에 문득 서 있었다, 복도의 다른 끝에 당신이 있었다, 내가 있었다, 복도는 너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복도, 우리의 시.

 

 

 

 

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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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시 전문지 '시현실'(발행인 원탁희)은 제12회 박인환문학상 수상자로 이준규 시인(수상작 '복도')이 선정됐다고 26일 밝혔다.

 

이준규 시인은 1970년생으로 2000'문학과사회' 여름호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흑백' '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 등이 있다.

 

박인환 문학상은 시인 박인환 선생의 문학 정신을 높이 선양하고 후진 발굴과 양성을 위해 계간 시현실이 1999년 제정한 권위 있는 문학상이다.

 

시상식은 1121일 한국출판문화회관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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