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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흰죽* / 변희수

 

 

불편해지면 죽을

끓입니다

 

식사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가볍게 훌훌 넘기고 싶다는 말

어제의 파도는 우물우물 삼켜도 된다는 그 말

 

그게 잘 안 돼요

부드럽게라는 말이 목에 걸려요

 

당분간 절식이나 금식

이상적인 처방이라는 건 알아요 미련이 생겨서

나는 죽을 먹습니다

 

맑고 흰죽을

 

한 숟가락 또 한 숟가락

돌아서서 코를 풀었죠

조금 묽어졌다는 뜻이지만

눈물은 짜니까

빨간 눈으론 돌아다닐 수 없으니까

그런 날은 손바닥마다 노란 가시선인장꽃

울지 않은 척 했어요

얹혔을 거라고 수군거릴 때마다

이 고비는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생각에 걸려

 

어제도 오늘도 삼키죠 백번도 더 생각하죠

죽이고 죽이다 보면 또 다시 죽

 

이렇게 맑고 흰죽

목이 메여요 달랑 죽 한 그릇인데

눈이 부셔요

 

새로 태어난 것처럼

몸속을 돌아다니는 물기가

어제의 죽이라 하겠지만

밤마다 복닥복닥 탕! !

죽 끓이는 시간이 또 다시 찾아오고

 

죽은 조금만 쑤어도 넘치게 한 솥이에요

후회도 한 솥 미움도 한 솥이어서

나는 먹고 또 먹을 테죠

다행이다 싶지만

 

맑고 흰,

무명의 시간들

 

좀 서운해요 돌아서면 고프고

어떻게든 달래고 싶은데

받는 게 이것 밖에 없는 이 속이

내 속이 그렇다는 거죠 지금

 

* 4.3 사건 피해자인 진아영 할머니는 턱과 이가 없어 평생 소화불량으로 인한 위장병과 영양실조를 달고 살았다.

 

 

 

 

거기서부터 사랑을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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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역사를 가정해서 말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하여 말한다면 어떨까? 가령 4 ? 3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이 제주 땅에 극도의 비극적인 역사는 출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통곡과 반목과 질시의 고통스런 아수라의 세계 역시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역사는 이미 일어난 과거 사실이므로 당연히 되돌릴 수 없다. 더불어 이념의 대립과 충돌의 소용돌이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희생양들의 아픔과 슬픔도 지워질 수 없다. 그것은 우리의 안쪽과 바깥쪽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수시로 우리를 힘들게 하고 있다. 그것을 걷어내지 않으면 미래는 암울할 뿐이다. 흔히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는데, 더는 참담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지나간 4 ? 3의 역사를 똑바로 직시하고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는 거울로 삼아 마땅하다. 이번에 시행되는 <8회 제주4 ? 3평화문학상>도 그런 취지에서 시행됨은 물론이다.

 

이번에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을 면밀히 살펴보는 과정에서 심사위원들이 공통점으로 느낀 견해를 몇 가지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작품에 투영된 작가의 시선들이 대체적으로 4 ? 3을 피상적이거나 관념적으로 보는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뿐 아니라 4 ? 3의 현장성이나 리얼리티를 천착하는 과정에서 4 ? 3의 역사성이나 정신적인 측면이 간과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또는 과잉된 수사의 현란한 사용 등으로 독자(심사위원)와의 소통을 어렵게 하는 작품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4 ? 3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다소 왜곡된 시 쓰기가 이루어진 경우도 없지 않았다. 앞뒤가 맞지 않은 비유를 사용하거나 난해한 시 쓰기가 시적 진실을 가려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런 가운데 더욱 문제점이라 할 수 있는 점은 응모작품들이 다루는 소재나 내용, 의미 등이 일정한 틀 안에 갇혀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점이다. 어떤 한계성을 극복하는 노력과 작품의 생산이 요망된다. 이제 4 ? 3문학은 제주만의 4 ? 3, 또는 흔적에 국한된 4 ? 3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이를 뛰어넘어 보다 세계사적인 범위로 의미를 확장해나가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위에서 말한 내용 모두를 해결하거나 충족시키는 작품은 물론 아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사위원들은 시맑고 흰 죽을 당선작으로 선정하는 쪽으로 가닥을 모았다. 이 작품은 4 ? 3사건의 피해자인 진아영 할머니에 대해 그리고 있다. 그녀는 턱과 이가 없어 평생 소화불량으로 인한 위장병과 영양실조를 몸에 달고 살았다 한다.

 

이 작품은 을 통해 불편한 몸을 떠올리고, 그 불편함을 야기한 사건을 되새기면서, 그 사건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을 쉽게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하에서, 주어진 삶을 힘겹게 가누어나가는 한 인간의 애잔한 안간힘을 그려내고 있다.

 

죽을 먹을 수밖에 없지만, 언제나 부드럽게라는 말이 가시처럼 목에 걸리는 삶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죽이고 죽이는 비극적인 사태를 떠올리는 매개체이면서 언제나 목 메이게 하는 것으로 가장 절실한 삶의 영양소이다. 음식을 통해 쓰디쓴 역사의 맛을 되새기는 절실함이 가슴을 울리게 하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당선을 축하한다.

 

심사위원 이상국, 이하석, 김광렬

 

 

 

아무 것도 아닌,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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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회 제주4.3평화문학상 수상자로 시 부문 변희수 시인과 논픽션 부문 김여정 작가가 결정됐다.

 

제주4.3평화재단(이사장 양조훈)은 지난 20일 제주4.3평화기념관 대회의실에서 4.3평화문학상 시상식을 개최하고, 두 수상자에게 상패와 각 2000만원의 상금을 수여했다.

 

제주4.3평화문학상 운영위원회(위원장 현기영)가 주최하고 제주4.3평화재단이 주관한 이번 시상식은 코로나 19 확산 방지를 위해 수상작가와 가족을 비롯해 현기영 운영위원장, 송승문 4.3희생자유족회장 등 20명 내외의 최소인원만 참석했다.

 

양조훈 이사장은 인사말을 통해 "제주4.3의 지난한 진상규명운동 과정에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 이산하의 시 '한라산' 등 많은 문학 작품들이 4.3의 증언자 역할을 해주었다""제주4.3이 평화와 인권, 화해와 정의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로 만개하는데 4.3평화문학상이 가교가 되고 이정표가 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변희수 시인은 수상 소감을 통해 "4.3사건에 관한 작품을 누군가 계속해서 쓰고 또 누군가 계속 읽는다면 진아영 할머니를 비롯해서 수많은 희생자들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그것이 문학의 가장 큰 힘이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김여정 작가는 "'그해 여름'은 한국전사에 기록되지 못한 전쟁의 참혹함을 경험한 보광동 사람들의 이야기로 지난 3년여의 시간 동안 수없이 많은 막걸리를 마시면서 가슴 속 깊은 곳에 송곳처럼 박힌 이야기를 꺼내서 들려주신 보광동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한다"고 소감을 전했다.

 

한편 제9회 제주4.3평화문학상은 오는 7월 중 공모를 시작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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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가 있는 골목 / 변희수

- 李箱에게

 

 

아오?

의자에게는 자세가 있소

자세가 있다는 건 기억해둘 만한 일이오

의자는 오늘도 무엇인가 줄기차게 기다리오

기다리면서도 기다리는 티를 내지 않소

오직 자세를 보여줄 뿐이오

어떤 기다림에도 무릎 꿇지 않소

 

의자는 책상처럼 편견이 없어서 참 좋소

의자와는 좀 통할 것 같소

기다리는 자세로 떠나보내는 자세로

대화는 자세만으로도 충분하오

의자 곁을 빙빙 돌기만 하는 사람과는

대화하기 힘드오 그런 사람들은 조금 불행하오

자세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이오

 

의자는 필요한 것이오,

그런 질문들은 참 난해하오

의자를 옮겨 앉는다 해도 해결되진 않소

책상 위에는 여전히 기다리는 백지가 있소

기다리지 않는 질문들이 있소

다행히 의자에게는 의지가 있소

대화할 자세로 기다리고 있는

저 의자들은 참 의젓하오

 

의자는 이해할 줄 아오

한 줄씩 삐걱거리는 대화를 구겨진 백지를

기다리지 않는 기다림을 이해하오

이해하지 못할 의지들을 이해하오

의자는 의자지만 참 의지가 되오

의자는 그냥 의자가 아닌 듯싶소

의자는 그냥 기다릴 뿐이오

그것으로 족하다 하오

 

밤이오

의자에게 또 빚지고 있소

의자 깊숙이 엉덩이를 밀어 넣소

따뜻하게 남아 있는 의자의 체온

의자가 없는 풍경은 삭막하오 못 견딜 것 같소

의자는 기다리고 있소

아직도 기다리오 계속 기다리오

기다리기만 하오

 

여기 한 의자가 있소

의자에 앉아서

보이지 않는 골목을 보고 있소

두렵진 않소

 

 

 

 

2016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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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의자는 시를 낳는 성소궁합 잘 맞는 난 행운아

 

이 세상에는 의자가 참 많다. 카페에도 도서관에도 지하철에도 의자는 넘쳐난다. 아니다. 의자보다는 엉덩이가 훨씬 더 많다. 내게도 늘 의자를 그리워하는 엉덩이가 있다. 가끔 시를 쓰는 대신 차라리 나무를 심었다면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결국 나는 그 나무로 또 의자를 만들었겠지만 이제 의자와 나무가 같은 혈족이라는 걸 안다.

 

오늘은 잠시 의자와 떨어져 있었고 황송하게도 누워서 당선소식을 받았다. 몽중일까. 눈을 뜨고 있어도 꾸는 꿈처럼 더듬더듬 의자를 끌어당겨 앉아본다. 여전히 내 머리맡을 지키는 의자, 이 기회에 의자에게 한마디 안 할 수가 없다. 의자여! 정말 미안하다, 아니 참 미안했다, 그리고 다시 더 미안하겠다. 당선소감을 쓰는 지금도 나는 의자를 믿고 까분다.

 

나는 행운아다. 의자와 궁합이 잘 맞는 엉덩이를 갖고 있으니. 시를 빌미로 의자와 엉덩이 사이에서 벌어지는 오해가 즐겁다. 언젠가 삐거덕거리던 시들이 끄덕끄덕 고개를 흔들어주는 날들이 올까. 대화는 계속될 것이고 의자는 나의 모든 시들이 마지막으로 태어나는 성소다. 어떤 자세로 의자에 앉아야 할까 늘 함께 고민하는 구밀‘13나의 시동지들과 행운을 나눈다. 의자에 항상 따뜻한 방석을 놓아주는 나의 가족 연, 동 그리고 남편 너무 고맙다. 심사를 해주신 이시영, 황인숙 선생님 그리고 손택수, 김행숙 선생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아울러 경향신문사에도 깊은 마음을 전하고 싶다.

 

영광은, 의자에게 바친다.

 

 

 

거기서부터 사랑을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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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기존 틀 차용했지만 사유를 끌고 가는 의식 우뚝

 

14건의 응모작이 예심에서 올라왔다. 그중 우선 고른 작품이 의자가 있는 골목’ ‘벽과 대화하는 법’ ‘투명한 발목이었다. 이 과정이 수월했다는 건 좀 서글픈 일이다. 새로운 종의 시를 포획하기를 기대하며 무엇이든지 빨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 심사자들의 눈에서 그토록 쉽사리 빠져나가는 시들이라니. 재량껏 성심을 다한 시들을 보내주신 분들께 이런 말씀을 드려 죄송하다. , 하지만 왜 그리 겉도는 거지? 붕붕 떠 있지? 한 걸음 더 성심을 담으시라. 진정을 담으시라. 하긴 열네 분의 시가 근사하면 얼마나 머리가 터졌을까. 고마운 일이다만.

 

벽과 대화하는 법은 감각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이이가 갖춘 표현력에 세상-사물을 읽는 힘, 인식의 힘이 더해지기를 바라며, ‘투명한 발목의자가 있는 골목을 최종심으로 놓았다. ‘투명한 발목은 섬세하고 예민하고 차분한 묘사와 어조로 독자를 시의 정황 속으로 천천히, 깊게 이끄는 시다. 그런데 이 매력적인 시에도, 흠을 잡자고 눈에 불을 켜니, 성근 부분이 있어 아쉽다. ‘의자가 있는 골목을 당선작으로 정했다.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소/ 저렇게까지 조용한 세상은 참 없을 것이오로 시작되는, 이상의 가장 널리 알려진 시 거울의 말투를 베껴서 쓴, 즉 이상 풍으로 쓴 시다. 새로운 시인을 가려 뽑는 자리에 기존 시인이나 시를 패러디함으로써 오마주를 보이는 시를 뽑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이 틀 속에 자기 생각, 자기만의 세계가 담겨 있는 점을 높이 샀다. 사유를 길게 끌고 나가는 힘 있는 진술 속에 시인 의식이 우뚝하다. 그의 다른 응모작들도 두루 소재를 다루는 솜씨가 예사가 아니어서 믿음이 간다. 건필을 빌며 축하드린다!

 

- 심사위원 이시영·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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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 변희수

 

 

아파트 동과 동 사이에 서면 늘 바람이 거세다

조금만 불어도 윙윙, 사나운 소리를 낸다

공기의 흐름을 막아놓아서라고 했다

바람이 뿔났다, 사실

막힌 곳이 많은 우리 집에도 여러 마리 뿔이 산다

공기의 흐름이 심상찮은 날이면 서로 으르렁거린다

그런 날엔 뿔을 함부로 세우는 바람에

잠시 격리될 뻔 한 뿔도, 제 뿔에 제가 걸려 넘어진 뿔도 있다

막힌 곳이 제일 많을 것 같은 아빠는

바람이 잘 통하지 않는 모자 속에 뿔을 숨겨 두었다가

상한 줄도 모르고 꺼낸 적이 있다 꼭 중국산 가짜 같았다

뿔 중에서 가장 약발이 센 뿔은 단연 엄마의 뿔이다

엄마는 알래스카 순록처럼 우아하게

뿔을 장식하고 다니지만 한 번 찔리면 오래 간다

TV에서 일 년에 한 번씩 뿔 갈이 하는 순록들을 보았다

순록들은 바위나 나무에 뿔이 떨어져나갈 때까지

벅벅 문지르고 나서야 새로 태어난 것처럼 온순해졌다

통증의 깊이로 까맣게 익어가는 순록들의 눈망울을 보면

아니, 서로 엉덩이에 난 뿔을 뽑아주려다가 상처투성이가 된

우리 집 뿔들을 보면 후시딘 같은 거 필요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끝없는 설원을 헤매다가 온 것 같은 밤이면

아무리 다정하게 얼굴을 맞대고 잠들어도 뿔 근처가 욱신거린다

우연히 한 우리에 갇히게 된 짐승들처럼

뿔과 뿔이 엉키는 악몽을 꾸기도 한다

막다른 곳에 서면 예민해지는 우리 집 뿔들

툰드라의 이끼처럼 납작하게 엎드려 바람의 출구를 살핀다

쓰자마자 벗어야하는 순록들의 아름다운 을 생각하며

나는 지금 웃자란 내 뿔을 관리하고 있는 중이다

뿔 대신 쫑긋해진 두 귀,

온순하게 한 철을 보낼 작정이다

 

 

 

[수상소감] 나는 빛을 통해서 완성된다

 

햇볕을 망사처럼 펼쳐놓은 들판을 걷는다. 눈이 부시다. 나는 어디쯤 왔을까.

 

궁금해서 늘 자주 뒤돌아보았다. 초속30만 킬로미터의 속도를 거쳐 내게 달려온 이 빛들은 내게 일종의 언어였다. 이 현란함 앞에서,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 이 똑똑한 실감들 앞에서 나는 제대로 고개 들 수 없을 때가 많다.

 

나는 빛을 통해서 완성된다. 내 어깨에 내 머리칼에 닿은 빛은 언제나 나보다 먼저 완성된 시였다. 빛은 사물을 만지고 사물을 감각한다. 눈을 찌를 듯 아찔하게 빛이 스친 순간마다 한 줄의 시가 태어났다. 그러나 그것의 반쪽은 늘 캄캄한 어둠이었으므로 나의 시는 아직도 구름 속에 들어있다.

 

언젠가 그 어둠이 빛의 다른 언어라는 걸 선명하게 알게 될 때가 있을 것이다.

 

흐리다고 어둡다고 절망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잠시나마 내게 닿았던 빛들에게 축배의 잔을 바치고 싶다. 고배의 잔을 마실 때도 따뜻한 함을 보여주신 천강문학상운영위원과 심사위원께 진심으로 감사를 전한다. 나의 가족과 감사를 전해야할 모든 분들께도 선선한 마음을 실어 보낸다.

 

 

 

 

거기서부터 사랑을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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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인간의 삶의 가치를 고양하는 정신을 내포하고 있어야

 

예심을 거쳐 본심의 대상이 된 작품은 23명의 150여 편이었습니다. 다양해진 현대시의 화원을 보는 듯 자연, 가족, 역사, 일상 등을 소재로 한 다양한 개성적인 몸짓을 접할 수 있어 심사위원들의 눈을 즐겁게 했습니다.

 

5회째를 맞은 천강문학상의 위상에 걸맞게 상당한 수준의 시편들이 응모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들이 감각적 표현을 통한 이미지 조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독자와 소통할 수 있는 주제의식이 전반적으로 미약했습니다. 시적 표현이 묘사로만 집중되어 있어, 시의 정교성은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라는 형식의 그릇은 만들어져서는 곤란합니다. 그 그릇 속에 알찬 내용물이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시편들이 담겨져야 할 내용물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는 시적 대상을 자기화해서 육화하는 힘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결과로 보입니다. 이런 경향이 현재 우리 시단의 한 경향이란 점에서 특별한 현상으로 치부하기는 힘들었습니다. 우리시가 언어적 기교만으로는 독자들의 관심을 끌어내기가 힘들다는 점에서 이런 우리 시의 한 경향에 대해 긍정적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었습니다.

 

응모대상이 된 시편들을 두고 이러한 시적 관점을 취한 이유는 천강문학상이 지향하는 바가 시를 위한 시가 아니라, 인간의 삶의 가치를 고양하는 정신을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심사위원들은 시에서 필요한 개성적 이미지의 형상화도 필요조건이지만,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주제가 선명한 감동적인 시에 더 점수를 주기로 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일차적으로 걸러진 대상은 원앙무덤,디지털 호미,도요와 영산댁,덤불 설계도,등이었습니다.

 

원앙무덤은 시적 발상은 살만했지만, 하나의 주제 의식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힘이 약했습니다.디지털 호미역시 그 발상이나 아날로그 호미를 디지털 호미로 전환시켜나가는 이미지 전개가 재미나는 시였습니다. 그러나 이 언어적 재미가 남기는 주제 의식은 그렇게 감동적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두 편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편을 두고, 오랜 논의를 했습니다. 나머지 세편의 시를 응모한 세 사람의 시편들이 앞선 두 사람보다는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요와 영산댁은 주제의식은 상당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시의 진술이 약간은 직설적이고, 연 구분을 하지 않고 있어 무거운 주제를 한 호흡으로 급박하게 읽어내리기에는 시적 리듬을 고려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시는 산문이 아니라 노래라는 사실도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은 두 편이 덤불 설계도이었습니다. 덤불 설계도는 시에서 중요한 언어미학이 제대로 구축되어져 있는 깔끔한 시편이었습니다. 시의 완성도라는 점에서 보면, 나무랄 데가 없는 완벽성을 내보이고 있는 시편입니다. 감각적으로 미세한 부분까지 섬세하게 이미지화하고 있는 솜씨는 상당히 뛰어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완벽하게 완성된 덤불 설계도를 통해 독자에게 건네는 감동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서는 언어미학 차원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비해 은 작품 중간 중간에 드러나는 요설에 가까운 시적 서술이 눈에 거슬리기는 하나,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세련미가 있고, 인생 삶의 문제를 일상의 소재를 통해 쉬우면서도 의미 있게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되었습니다. 그리고 주제를 풀어내는 시적 추진력이 남달라 시의 완성도를 더욱 높이고 있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평가되었습니다.

 

그래서 을 대상으로, 덤불 설계도도요와 영산댁을 각각 우수상으로 선정하였습니다. 수상자들에게 박수와 함께 한국시의 미래를 위한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정진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아깝게 수상하지 못한 분들도 부단한 탁마를 통해 입선의 기회를 가지시길 기원합니다. 하늘이 내린 깨끗하고 의미 있는 <천강문학상>이 일취월장하여 한국 문단에서 가장 의로운 문학상으로 발전되어가길 기대합니다.

 

- 심사위원 : 감태준(시인), 남송우(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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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흔한 꽃 / 변희수

 

 

갈 데까지 갔다는 말을
안녕이란 말 대신 쓰고 싶어질 때
쓰레기통 옆 구두 한 켤레
말랑한 기억의 밑창을 덧대고 있다
달릴수록 뒷걸음 치는 배경 박음질 해나가듯
나란히 하나의 길을 꿰고 갔을 텐데
서로 다른 기울기를 가진 한 짝
축을 둥글게 깎고 고르는 순간
길은 저마다 제 발에 꼭 맞는 문수로
열려 있었을 것이지만 떠날 때는
모두, 안개를 배경으로 걸었을 것이다
가파른 직선 혹은 곡선의 에움길을
밀어 넣을 때마다 팽팽하게 긴장하던 구둣볼
끈을 고쳐 매고도
매듭 없이
결의만 다지던 저녁이 온 것처럼
코끝을 돌려놓고 자도
늘 잘 못 든 길처럼 헛갈리는 아침
이정표 없는 허방에도 덜컹, 꽃피는 길 있었는지
밑창에 찍힌 발가락 모양이 꾹꾹 눌러놓은
압화처럼 선명하게 피어 있다
어느 고대국가의 지층에 새겨진 족적처럼
누구나, 뒤축이 닿는 순간 스스로의 삶을
탁본하게 되는 것이므로
몫의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어놓고
서늘하게 빠져나간 맨발
얼룩도 꽃의 흔적을 닮을 수 있는지
헐렁한 구두 속의 여백이 꽉 찬다

 

 

 

거기서부터 사랑을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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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문 밖 지천인 詩의 몸들, 찾아나설 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좋다는 듯, 모월 모일 일요일 오전 열시는 맑고 고요하다.

 

오랜만에 들른 옛집, 아흔에 접어든 아버지의 숨소리도 깃털처럼 가볍다. 나는 지금 애벌레처럼 잠든 아버지 옆에서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할머니의 필사본 가사집을 들여다보고 있다. 낡고 바랜 책갈피를 넘길 때마다 바스라질 것 같던 초서체의 글씨들이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다. 흘림체 글씨들이 어찌나 단정한지 풀어져 있던 마음들이 다 숙연해진다. 한 세기도 더 지난 어떤 열정이 내 피돌기 속으로 주저 없이 걸어들어 옴을 느낀다.

 

돌아보니 투고를 끝내고 소홀했다 싶었던 며칠이 후딱 지나갔다. 왜 그런지 다시금 목이 말라온다. 문 밖을 나서면 과수원이 있고 과수원을 지나면 동네 어귀에 자그만 예배당이 있다.

 

꿈결일까, 동짓달 카랑한 하늘을 가르고 내 귓가에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종소리가 댕댕거린다. 어떤 통보를 내가 받았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감출 수 없는 설렘에 문을 나선다. 우듬지마다 목마른 새를 기다리는 몇 알의 사과에 눈물이 핑 돈다. 내 시가 딱 저랬으면 좋겠다. 잎사귀들이 푸르게 태질 하는 시간을 지나 눈먼 새까지 달게 목을 축이고 갈 수 있는 그런 나무였으면 싶다.

 

늘 변함없는 미소로 잔잔한 격려를 보태주신 영남대 이기철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청도까지 오르던 먼 길이 오늘에 이르렀음을 잘 안다. 그리고 내 망설임에 참 언어의 결을 환하게 열어 보여주신 경주대 손진은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끓어오르던 시어들을 담금질하던 교수님의 열정이 미흡한 내 시의 깊은 뿌리가 되었음을 고백한다. 늘 따뜻했던 경주대, 영남대 사회교육원 문창반 문우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후원자인 나의 남편과 가족에게도 고마운 마음 전한다.

 

영광과 두려움을 함께 안겨준 영남일보와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를 표하며 문 밖에 지천인 저 시의 몸들, 감히 찾아 나서라는 뜻 헤아릴 것을 약속한다.

 

 

 

아무 것도 아닌,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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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사물과 세계 적절히 통제, 시적긴장 부여"

 

예년에 비추어 특별히 뛰어나다 할 수 없는 올해의 응모작품들을 두고, 심사위원들이 숙고 끝에 마지막으로 간추려보았던 시편은 변희수, 황제윤, 권명호 제씨의 것이었다. 위의 세 분은 균제미가 고루 돋보이는 시적 성취들을 함께 선보이고 있었다.

권명호씨의 시는 생활의 이면들을 어느 정도 생생한 시화로 구체화시킬 줄 아는 응모자의 절제된 구상력을 엿보게 했다.

혈육의 애틋한 정을 일깨운 '아버지의 발등'과 같은 시가 일례일 것이다. 그러나 일상성을 뚫고 솟아오르는 이런 감동이 역설적으로 신인다운 상상력과 개성을 희석시키는 것이 아닐까 판단되었다.

황제윤씨의 시편에는 풍경을 해석하고 감싸 안는 시선의 깊이가 느껴졌다.

웅장하게 세워지는 대불보다 환하게 꽃피운 해당화의 생명력에 주목한 '꽃불'이나, 눈발들의 시각화로 차창 밖의 풍경을 문면 가득 흘러넘치게 한 '운주사, 덜컹거리는' 등은 응모자의 패기와 시적 자질을 충분히 읽어내게 하였다.

변희수씨는 전체적으로 사물과 세계를 적절히 통제해 시적 긴장을 부여할 줄 아는 응모자로 여겨졌다.

범상한 소재들로 삶의 미묘한 국면들을 저울질하고, 그만한 짜임새의 시로 격상시킨 것은 그의 수련이 어느 정도의 성취를 아우를 만한 수준에 이르지 않았을까 기대하게 하였다.

그런 기시감이 황제윤씨의 앞자리에 그를 내세우게 한 까닭이다.

심사위원들은 변희수씨의 응모작 중에서 '아주 흔한 꽃'이 고단하게 걸어온 삶의 내력을 행간과 행간 사이로 더욱 섬세하고 선명하게 부조(浮彫)해 보인다고 평가했다.

심사위원 이하석, 김명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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