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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의 비 / 김영산

 

 

순간, 골목 어귀에서 어둠이 비틀거린다 플라타너스와 체르니 사이 흩뿌리는 가랑비에 자정의 목덜미가 젖는다 푸른 선풍기 느리게 돌고 있는 주점은 칠부쯤 눈을 감았다 빗물 낯바닥에 어리는 불빛 아무리 밟아 뭉개도 꺼지지 않는다 우우 데모하여 바람의 꽁무니 쫓아다니는 적막이여 국제건강약국 낡은 입간판에 붐비는 부식의 시간이여 벼룩신문 어느 광고에 중고 희망 매물은 나온 게 없을까 가슴에 꽂힌 향기로운 절망도 시들어 버린 지 오래다 수천 갈래 생의 교차로에 녹색 신호등 플러그가 빠져있다 집으로 가는 길이 막차 보내고 난 장의자에 길게 드러 눕는다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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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 / 김학중

 

 

1

 

눈먼자가 처음 그 벽에 부딪쳤을 때 벽이 거기 있다는 그의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사람들이 벽을 발견하게 된 것은 눈먼자가 자신의 몸을 뜯어 그린 벽화를 보고 나서였다.

 

2

 

벽화는 아름다웠다. 거친 손놀림이 지나간 자리는

 

벽의 안과 밖을 꿰매놓은 듯했고 스스로 빛을 내듯 현란했다. 색색의 실타래들이 서로 몸을 섞어 꿈틀대는 그림은 벽에서 뛰쳐나가려는 심장 같았다. 그 아름다움은

 

벽의 것인지 벽화의 것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벽화를 본 사람들은 구토와 현기증을 호소했다. 그들은 벽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고, 환희인지 고통인지 알 수 없는 감각을 느끼며 벽에서 뜯어내기 시작했다. 벽화가 부서지고 있었다. 벽 앞에 모여든 사람들이 무너지고 있었다.

 

3

 

벽화의 잔해를 손에 쥐고 나서야 사람들은 거기 벽이 있었음을 알았다. 벽화를 그린 자에 대해서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단지 그들은 그 자를 눈먼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를 부를 이름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붙인

 

이름 아닌 이름

벽을 나누어 가지고도

벽을 볼 수 없었던 자들은 흩어지며

그 이름만을 나누어 갔다.

 

 

 

 

창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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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중(40·사진) 시인이 제18회 박인환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고 계간 시 전문지 시현실23일 밝혔다.

 

수상작은 벽화를 비롯한 시 4. 시현실의 심사위원들은 거대한 자본의 성채에서 쫓겨나거나 소외된 소시민과 젊은이들의 꿈과 도전을 눈먼 신의 유희에 빗대어 블랙 유머로 은유했다신화적 서사와 실험적 사유의 미학을 높이 평가했다고 말했다.

 

선천적으로 눈이 좋지 않았던 김 시인은 갈수록 시력이 약화하는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다. 하지만 역경을 딛고 경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9문학사상으로 등단한 후 지난 4월 첫 시집 창세를 출간했다.

 

박인환문학상은 요절한 모더니스트 시인 박인환(19261956)을 기리기 위해 1999년 제정됐다. 시상식은 오는 1129일 서울 동숭로 예술가의 집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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