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한 골목 / 박한
골목은 왜 이리 얌전한지
자꾸만 쓰다듬고 싶어요
숨을 쉬는데
신호를 기다릴 필요가 없어요
손가락 마디를 보면
내가 헤맸던 길목을 알 수 있죠
매일 걸어 다녀도
달이 지는 법은 배울 수가 없어요
사실 골목은 지붕들이 기르는 것이라서
부르는 이름들이 달라요
고장 난 컴퓨터였다가
산지 직송 고등어였다가
김숙자 씨였다가
지현이 엄마였다가
가끔은 현석아 놀자가 돼요
왜 골목이
밤이면 군데군데 멍이 드는지
술 취해 돌아오는 일용직
김기석씨를 보면 알죠
그래도 골목은 도망치지 않습니다
쫓기는 사람들이
모두 골목으로 숨어드는지는
좁아야만 이해하는 습성
나도 쫓아오는 생활을 따돌리고
골목에서 뒷발로만 서 봅니다
창밖에선 내가 걸어가고 있고요
멀리 돌아갈 수 없는
직선이 없는 지도는
여기에서 발명 되었습니다
깨우지 마세요
난폭하진 않지만 겁이 많은 사람들이
불빛을 말고 숨어버릴지도 몰라요
쫑긋 세운 옥상들이 바람을 듣고 있습니다
당선소감
흘러가는 강 위로 눈이 다 내렸습니다. 두 손을 빼지 못했던 날들이 많이 허물어 진 것 같습니다. 서성인 옥상에서 다 자라지 못한 시들로 새집을 만들었습니다. 스스로 서기엔 둥지가 조금 더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골목을 걸었습니다. 문 앞 눈을 치우는 순한 사람들과 혼자서 비어있는 의자들, 오래도록 누추한 우편물까지 부축해준 모든 것들에 고마웠습니다. 이제 골목을 빠져 나와 더운 무릎을 펴 볼까 합니다.
먼저 많이 부족한 제 시를 선택해 주신 유종호 선생님과 오탁번 시인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한 명의 시인은 하나의 정부라고 자긍심을 심어 주신 이영진 선생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언제나 시로 깊은 감동과 부족함을 일깨워 주는 김일영 시인, 허은실 시인, 정노윤 시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사랑하는 그녀, 그리고 함께 수학해온 분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심사평] 참신한 시적 상상력
올해에도 전국에서 수많은 시인 지망생들이 ‘지용신인문학상’의 등용문을 두드렸다. 이처럼 등단을 꿈꾸는 예비 시인들의 열의는 해가 갈수록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이 시대가 주는 불확실성과 모호성은 원형적인 시창작의 욕망을 자극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현대시사의 금자탑을 쌓아올린 지용도 시인이 살았던 시대가 주는 불안과 절망에서 일탈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으로 시 창작을 했을 것이다.
‘순한 골목’(박한)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순한 골목’은 사물을 보는 따듯한 시선이 동심의 눈을 통하여 알맞게 시화되어 있다. 마치 골목대장 노릇하는 아이처럼 자유분방한 상상력으로 자아와 세계를 연결하는 솜씨가 놀랍다. 사물과 사물을 바라보는 시적 자아를 참신한 상상력으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마지막까지 논의된 작품은 ‘풍차의 집’(박선희), ‘모래시계’(김동연), ‘먼 산’(김정식), ‘다비’(박소미)등 이었다. ‘풍차의 집’과 ‘모래시계’, ‘먼 산’은 시적 구성과 심상의 전개가 믿을만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나 그냥 무난할 뿐이라는 인상을 남겼다. ‘다비’는 마지막까지 당선작과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울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시적 구성이 주제와 이완되는 부분이 눈에 띄어 아쉬웠다.
심사위원 유종호 문학평론가·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오탁번 시인·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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