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d Bird / 박찬세
자라는 종양을 보며 웃는 짐승을 본 적 있나요
새들이 허공에서 벗어나려고 퍼득거립니다
물오리들은 얼룩진 강의 지퍼를 열고 동전을 꺼냅니다
꺼낸 동전을 꿀꺽 삼킵니다
내 얘기 좀 들어보실래요
뒤통수에 칼이 박히는 꿈을 꾸면 새가 된다는 전설을 금방 지어내봅니다
얘, 뒤통수에 칼이 박히는 꿈을 꾸면 새가 된대
저 소름 돋는 부리 좀 봐
유리창이 나뭇가지에 내 얼굴을 걸어놓습니다
걸린 얼굴 위로 새 한 마리 날아와 지저귑니다
이렇게 꼭 맞는 방은 처음입니다
문이 없는 방을 어떻게 나서야 할지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똑 똑 밖에 누구 없나요
얘야, 문은 언제나 너였단다
뒤통수를 관통한 칼이 문이 되다니!
젖을 먹이는 새의 전설을 금방 지어내 봅니다
얘, 젖을 먹이는 새가 있대
저 깃털 사이에 삐죽 나온 젖꼭지 좀 봐
부리로 쪼아 먹는 젖에선 피 냄새가 납니다
엄마는 서쪽 하늘로 고개를 돌립니다
북극곰이 물개를 물어뜯습니다
허연 하늘이 핏물로 더럽혀집니다
나는 그녀의 내부였단 사실이 믿기지가 않습니다
밤의 나그네 / 박찬세
호랑지빠귀가 운다
휘-----------이
부리 끝에서
휘-----------이
부리 끝으로
밤이 그네를 탄다
너의 부리에서 태어난 바람이 나의 부리에서 죽는다
새의 울음 속에 갈피 된 편지를 펴 보는 밤이다
산을 오르며 지내고 있어 산새에게 너의 안부를 묻곤해 미안, 돌팔매질을 했어 너에 대한 내 마음은 언제나 초록이라는 말 미안, 초록도 다 같은 초록은 아닌 걸 산에서 보았어
밤에 그네를 타는 너의 울음 속에 초록이 돋고
초록을 물고 날아가는 새의 부러진 발톱 속으로 명이 다한 별들이 몸을 숨긴다
그믐달은 밤의 장단지에 찍힌 그네 자국이라고 너는 말한다
기둥에 돌돌 말린 그네 아래서 그믐달이 제 그림자를 그린다
이쪽과 저쪽으로 새들은 멀어져갔지만
발자국은 부리 모양을 하고 서로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골목의 표정 / 박찬세
딱딱해요 툭, 툭 부러지는 골목은
열두 시의 그림자에서 다섯 시의 그림자로 기울어져 가요
아직까지 골목은 소녀를 숨기고 있어요
툭, 골목이 뱉어 낸 비둘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걸어가고
툭, 골목이 뱉어 낸 개가 비둘기를 날려 보내요
문을 열고 나온 사람들은 골목이 부러진 곳에서 사라져요
아직도 골목은 소녀를 숨기고 있어요
휴지조각들은 왜 잔뜩 찡그리고 벽 쪽으로 굴러가나요
발목이 부러진 소녀가 보는 하늘은 어제의 하늘
골목은 가끔씩 조용합니다
불행해지고 싶어요
골목이 숨긴 소리들은 간지러워서
어느 순간 빵! 하고 터집니다
창문들의 닫힌 입속으로 똑같은 풍경이 들어가고
커튼은 말이 없습니다
미칠 것 같아요
엄마는 눈알을 뽑아버리고 싶다고 말했지만
뽑아 버리고 싶은 건 나였겠죠
골목은 왜 같은 표정인가요,
골목이 소녀를 보여 줍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잠깐 숨기는 동안.
소녀가 단 한번 뒤를 돌아보았을 때
골목은 소녀 같은 표정이었을까요
냉장고 속 크레바스 / 박찬세
냉장고 우는 소리가 들리는 밤은 전화기를 만진다
누군가 울고 있을 것 같아서이다
송신되지 못하는 말들이 손끝에서 우둘두둘 돋아난다
아버지가 크레바스 속으로 사라지던 날
비명을 지르고 쓰러진 어머니는 밤새 이불을 덮어 쓰고 울었다
크레바스는 왜 비명 앞에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일까
들썩이는 이불더미 속에서 냉장고 우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눈보라가 몰아치며 크레바스 위로 눈이 쌓이고 있었다
발명가들은 물건을 만들 때 자신도 모르게 인간의 습성을 답습한다는 데
당신을 오래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젖은 눈 속에 뒷모습을 담아두는 건
말을 배우기 전부터 내려오는 인간의 풍습이다
냉장고를 들어 낼 때면 웅크린 모습으로 남아 있는 얼룩은 잘 지워지지 않았다
담뱃불도 촛불처럼 타오를 때가 있다
남극에서 날아 온 일기장에 적혀 있던 문장이다
문장 안에 도사리고 있는 크레바스의 깊이를 나는 아직 모른다
세상에 문장 하나를 남기고 떠나는 것이 인간이지만
문장을 하나를 건너는 데 꼬박 한 생이 걸리는 것도 인간인 것이다
인간은 멸종 될 때까지 시를 버리지 못할 것이다
냉장고 우는 소리가 들리는 밤은 세상에 남겨진 문장들을 떠올린다
생의 크레바스에서 건져 올린 문장들
한 문장을 건너가고 있는 인간이 밤하늘을 올려다 볼 때
별들이 젖은 눈으로 인간을 내려다보는 건
아무도 크레바스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남극은 있는 것이다
크레바스에 몸을 두고 빠져 나온 비명은 바람이 되고
바람은 남극에서 불어와서 남극으로 불어간다
치밀어 오르는 열과 기침처럼 생각나는 얼굴들은 바람이 피워 놓은 모닥불이었다
이 순간에도 남극을 위하여 낙타는 눈썹을 늘어뜨리며 사막을 걷고 아마존엔 비가 내린다
그래서 남극에선 감기에 대한 농담을 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남극에 밤이 시작되면
암사자들은 새끼를 절벽에서 떨어뜨리고
어머니들은 이웃의 냉장고를 함부로 열어보지 말거라
냉장고 문을 자주 여닫지 말거라 가르친다
아이들은 발견되지 않은 문장을 찾아가기 위해 밤마다 냉장고 우는 소리를 엿들으며 자란다
냉장고 우는 소리가 들리는 밤은 냉장고를 열고 밥상을 차린다
눈보라치는 숟가락 속으로 뾰루퉁한 내가 거꾸로 담긴다
별들의 눈이 젖는다
[심사평]
최종적으로 심사위원들 앞에 놓인 작품은 「때」외 5편, 「그늘을 살해하다」외 9편, 「손의 영정」외 9편, 「서쪽으로의 일출」외 9편, 「밤의 그네」외 19편이다.
「때」외 5편의 응모작 중에서 주목받은 작품은 「몹쓸, 소나타」이다. 이외의 작품들과 함께 이 응모자가 공들인 것은 소재의 병치라는 기법을 활용하여 보여주는 현실의 단면인데, 「몹쓸, 소나타」에는 그 단면의 실상을 시적으로 승화시키려 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다른 작품들이 이 작품의 성취를 받쳐주지 못하고 있다. 결정적으로 문장이 불안하다는 점이 이 응모자의 결점이다. 문장이 불안할 때 시의 리듬도 소멸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늘을 살해하다」외 9편은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사물과 사건에 그것들의 잠재되고 은폐된 의미를 부여하는 작품들이다. 시적 발견을 도모하려는 노력이 돋보이는 셈이다. 그러나그 발견을 위한 언어들의 배치가 평이하다 보니 발견의 노력 자체가 설명적이다. 문제는 발견이 아니라 그 발견을 시적으로 가공하는 능력일 것이다. 이것이 언어를 공교하게 꾸미는 능력을 요청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발견된 시적 의미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시의 구조로 용해되는가의 문제이다. 「손의 영정」외 9편은 무난한 작품들이다. 언어들이 자연스럽고 시상의 형상화에 무리가 없다. 이는 응모자의 시적 공력이 남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려주는것이다. 그런데 한 편의 시가 최종적으로 완결되기 위해서는 그 자연스러움 못지 않게 결기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 결기를 시의 힘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 힘이 시의 언어들에 굴곡을 부여하면서 매듭을 맺어주는 것이다. 이 응모자에게는 그 힘이 좀 더 적극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심사자들은 김은상 씨와 박찬세 씨를 함께 당선작으로 뽑는 데 동의했다. 김은상 씨는 무엇보다도 시적안정과 완결성이, 박찬세 씨는 과감한 상상력이 장점이라고 판단되었다. 우선 김은상 씨는 안정적이고 미적인시상 전개와 아울러 결말부를 맺는 능력이 돋보였다 현실인식도 만만치 않다. 갈고 닦은 언어 능력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는 경우인데, 다만 한 가지 시의 형식이 지나치게 단순해서 상상력을 한정해버릴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두기로 한다. 박찬세 씨의 시는 정격과 파격의 경계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상상의 내용도 그렇고 형식도 그렇다. 이것은 아직 자기 정체성을 고정시키지 않은 신인이기 때문일 터인데, 전범으로부터 벗어나는 일 못지않게 유행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용기야말로 박찬세 씨의 진정한독특성을 만들 수 있는 길일 것이다. 최근의 한국시단은 젊은 상상력의 활기와 소란 그리고 풍문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난 듯 보인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는 일이야말로 흥미 있는 일인데, 신인의 출현을 경험하는 즐거움도 그와 관련된 것이다. 신인들은 한국문학의 새 자리를 어떻게 채워나가게 될까? 실천문학이 내보이는, 크게 대비되는 두 명의 시인이 그 답을 채워주리라고 생각한다. 당선된 분들에게 축하를 보내면서 끝까지 고려 대상이 되었던 분들에게는 격려의 말씀을 드린다.
- 심사위원 : 김선우, 박수연, 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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