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을 주세요 / 박연준
어제 나는 남자와 자고 나서 홀로 걷는 새벽길
여린 풀잎들, 기울어지는 고개를 마주하고도 울지 않아요
공원 바닥에 커피우유, 그 모래 빛 눈물을 흩뿌리며
이게 나였으면, 이게 나였으면!
하고 장난질도 안쳐요
더 이상 날아가는 초승달 잡으려고 손을 내뻗지도
걸어가는 꿈을 쫓아 신발 끈을 묶지도
오렌지주스가 시큼하다고 비명을 지르지도
않아요, 나는 무럭무럭 늙느라
케이크 위에 내 건조한 몸을 찔러 넣고 싶어요
조명을 끄고
누군가 내 머리칼에 불을 붙이면 경건하게 타들어 갈지도
늙은 봄을 위해 박수를 치는 관객들이 보일지도
몰라요, 모르겠어요
추억은 칼과 같아 반짝 하며 나를 찌르겠죠
그러면 나는 흐르는 내 생리 혈을 손에 묻혀
속살 구석구석에 붉은 도장을 찍으며 혼자 놀래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새벽길들이 내 몸에 흘러와 머물지
모르죠, 해바라기들이 모가지를 꺾는 가을도
궁금해하며 몇 번은 내 안부를 묻겠죠
그러나 이제 나는 멍든 새벽길, 휘어진 계단에서
늙은 신문배달원과 마주쳐도
울지 않아요
[당선소감] "내 여윈 손가락 닮은 그런 시 쓰겠다 다짐"
이른 아침 학교 가는 길에 별안간 날벼락을 맞은 아이처럼 두려워 벌벌 떨고 있습니다. 누군가 날 두드려 주길, 날 꺼내가 주길 간절히 바랐지만, 이렇게 빨리 밖으로 나오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눈곱도 못 떼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인사드리게 되어 숨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저를 오래도록 뱃속에 품고 기르다, 예쁘게 낳아주신 김사인 선생님, 제 시의 뿌리, 존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옥동의 한 아이'처럼 씩씩하게 걸어갈게요.) "너는 차오르는 달이다. 시가 목구멍까지 차올라 조금만 움직여도 울컥! 쏟아져 나올 때까지 써야 한다!"고 가르치고 붙잡아 주신 장석주 선생님, 감사합니다. 글쟁이로서의 삶을 직접 보여주신 이만희 선생님, 하일지 선생님, 조병무 선생님, 귀한 가르침들 정말 사합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 특히 아무렇게나 흩어지던 아버지, 눈썹부터 꼼꼼히 늙어가던 아버지, 감사합니다. 멀리 미국에서 응원해 주신 할머니, 할아버지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마음을 추스르고 그동안 습작했던 노트들을 꺼내어 보니 결코 가볍지 않은 낙서 형태의 글들이 만져집니다. "내겐 연필이 아닌 손가락 하나만 있어, 나는 여윈 손가락을 닮은 시를 쓸 거야. 내 시가, 내 덜 익은 김치 같은 날것의 시가 세상을 비출 수 있을 때까지 나는 손가락을 부지런히 깎고, 깎을 테야!" 능력도 없으면서, 대책 없이 목숨만 질겼던 저의 '꿈'에게 키스를 보냅니다. 눈물을 흘리며 했던 이 다짐을 항상 기억하고 실천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세상의 모든 시인들과 '부도 난 눈물공장'에서 아직 눈도 못 뜬 '아기 시인'으로 태어나게 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심사평] 발랄하고 생생한 시어 매력적 경험·상상 아우른 솜씨 뛰어나
이 가을에 신인들이 쓴 새로운 시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골방에서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와 삶의 현장들이 반응하는 시적 사유를 개진하고, 한국어의 새로운 울림에 골몰하는 신인들을 생각하면 정말 뿌듯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신인문학상은 한 사람의 신인만을 골라내야 한다. 전체적으로 예심을 통과하여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을 읽고 나서 본심 위원들이 개진한 의견들은 공통되었다.
우선 시를 많이 써본 경험이 풍부한 응모작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런 작품일수록 편안하게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시인들이 생산해온 시의 틀, 어조, 수사를 그대로 답습한 시들이 대부분이었다. 시를 쓴 사람의 목소리가 자신이 쓴 시의 어디에 숨어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반면에 패기만만하게 자신의 시적 스타일을 개발해본 응모작들의 경우엔 어법에 맞지 않는 오문과 생경한 관념의 직접 노출이 지적되었다. 왜 그런 내용을 유독 시라는 장르를 선택해 써야만 했을까 하는 장르에 대한 자의식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겠다.
주영중의 작품들은 병치적 언술과 공간에 대한 사유가 새로웠다. 행인들이 스쳐지나가는 찰나적 공간을 볼록하기도 하고, 오목하기도 한 렌즈로 낯설게 하여 탐구하는 그의 시적 전개 방식도 새로웠다. '푸른 알을 낳는 거위' 등에서 구축한 공간은 하나의 회화 작품처럼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그 구축된 공간에서 암시적 목소리가 들리지 않거나 미약했다.
반대로 강호승의 작품들은 시간을 탐구했다. 진지한 목소리로 하루 중 어느 시간대에 처한 인간군상의 다양한 모습을 이처럼 세밀하게 발굴해내는 시구들도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반복과 나열, 과다한 비유, 설명적 어투 등은 개선해야 할 문제로 지적되었다.
최영동의 시들은 얼핏 보면 밋밋하고 단순하지만 그 속에 나름대로 촌철살인의 지혜를 감추고 있었다. 더구나 단순한 시구들 속에 감춰진 슬픔의 정서는 시를 읽고난 여운을 길게 했다. 그러나 심사위원들은 그의 소품이 아닌 작품들을 읽고 싶었다. 소품이 좋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몇 마디 작은 세밀묘사 속에도 커다란 규모가 숨쉴 수 있는 것이 시라는 장르가 품은 특징이기 때문이다.
박연준의 시들은 생동하고 자연스럽다. 다른 신인 작품과 비교해 보아도 그 어조와 언술 내용이 훨씬 생생했다. 자신의 내밀한 직접 경험과 욕망의 상처를 드러내는 상상적 경험을 결합하는 솜씨도 뛰어났다. 상투적이지 않고, 발랄했다. 자연스럽게 툭툭 던지는 말속에 생의 비의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계속 시를 써나가는 과정 속에서 자극적인 말들의 생산이라는 또 다른 타성에 젖을까 봐 겁이 나기도 했다.
심사위원들은 박연준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정하는 데에는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 즐거운 심사 과정을 거쳤다. 새로운 시인의 새 목소리의 탄생을 축하한다.
심사위원 김혜순. 이시영(대표집필:김혜순) / 예심 고형렬. 김경미. 이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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