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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 박소란

 

 

한 사람이 나를 향해 돌진하였네 내 너머의 빛을 향해

나는 조용히 나동그라지고

 

한 사람이 내 쪽으로 비질을 하였네 아무렇게나 구겨진 과자봉지처럼

내 모두가 쓸려갈 것 같았네

그러나 어디로도 나는 가지 못했네

 

골목에는 금세 굳고 짙은 어스름이 내려앉아

리코더를 부는 한 사람이 있었네

가파른 계단에 앉아 그 소리를 오래 들었네

뜻 없는 선율이 푸수수 귓가에 공연한 파문을 일으킬 때

 

슬픔이 왔네

실수라는 듯 얼굴을 붉히며

가만히 곁을 파고들었네 새하얀 무릎에 고개를 묻고 잠시 울기도 하였네

 

슬픔은 되돌아가지 않았네

얼마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는, 그 시무룩한 얼굴을 데리고서

한 사람의 닫힌 문을 쾅쾅 두드렸네

 

 

 

한 사람의 닫힌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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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회 노작문학상 수상자로 박소란(39) 시인이 선정됐다.

 

노작홍사용문학관은 수상작에 박 시인의 시집 한 사람의 닫힌 문’(창비)이 선정됐다고 4일 발표했다. 심사는 문정희·안도현 시인, 박수연 문학평론가가 맡았다. 안 시인은 선정작에 대해 사소한 일상을 긴장의 눈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긍정적이고, 소통의 공간으로 시를 이끌어 가고 있다고 평했다.

 

노작문학상은 일제강점기에 동인지 백조를 창간하며 낭만주의 시운동을 주도했던 홍사용 선생의 정신을 기리고자 지난 2001년 제정됐다. 상금은 3000만원이다. 시상식은 오는 926일 경기 화성시 노작홍사용문학관에서 열린다.

 

박 시인은 동국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 2009문학수첩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2015) 등이 있다. 신동엽문학상, 내일의한국작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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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비명悲鳴ㅡ마이크로칩 공장 / 이맹물

 

 

(비명을 지르다, 옥타브. 목청. 남자. 가성假聲, 한계)

내가 발목 잡혀 있는 직장은

백 미터의 직선 복도가 있는 윙윙대는

삑삑대는 간혹 클래식 멜로디의 경보음警報音이 들리는

첨 단 공 장

똑같은 수백 수천개의 형광등이 누릿한 빛을 내며

스물네 시간 정렬한 곳

 

셔틀버스는 일 년 동안 딱 두 번 지각했을 뿐

커다란 덩치를 밀며 사거리 저 모퉁이로

떠오르듯 꺾어 나오지

사람들은 일시에 한 곳으로 쏠려 적당한 양보로

차에 오르고 인사는 늘 생략된다

야간근무를 향하는 사람들은 매일 지정석에 꽂혀

서로 비슷한 표정으로 동시에 말을 잃고

우회전 좌회전 정지 출발을 반복하는 버스의 요동에

엇박자로 흔들려 나간다

줄지어 늘어선 앞사람의 뒤통수 사이로

깨끗하게 정돈된 도시

수백 개의 달처럼 공중에 배달린 가로등

깜빡이는 신호등 깜빡이는 자동차를

흐린 꿈처럼 바라보며 눈을

깜빡인다

 

공장 내부內部가 그러하고 단체 작업복이 그러하고

대형식당의 식판이 그러하고

도로가 그러하고

버스의 좌석이 그러하고 사원아파트의 모양이 그러하듯

속도를 신앙하는 나의 도시는

백열등 아래 피똥을 싸는 닭장 속의 닭을

길러낸다, 우리는 같은 색으로

우리를 사육飼育한다. 그리고 우리는

극히 사소한 거부권만을 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은 도시의 평면도 같은 식판 안에서

딱 한 가지 반찬만을 덜어낸다

그것은 적선積善처럼 버려진다,

다른 이의 식판으로

 

기계들은 충혈된 눈을 자동으로 돌려댄다

신경질적인 알람이 한 줄 비명을 가르면

누구든 서둘러야 한다

직각의 수많은 벽들 나는

우리 공장의 장점을 말하고 싶다

그것이 얼마나 소음을 잘 견디는가를

그것들이 얼마나 소리를 잘 먹어대는가를.

아무리 고함쳐도 사방四方 울기나 할 뿐 기껏

내 폐부肺腑를 흔드는 떨림으로 죽는다

구린 토사물을 남몰래 되삼키고

한낱 복통을

양심으로 나는 적는다. 그러므로 이곳은

무결無缺한 질서이다

계획도시와

거리와

복도와, 식판을 쏘옥 빼닮은

마이크로칩을 생산하는 곳

마 이 크 로 칩 공장

 

 

 

[우수작] 겨울밤, 아기단풍 외 2/ 박소란

 

[우수작] 학춤 외 3편 / 장종의

 

 

 

 

비명 - 마이크로칩 공장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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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우리 시대에 필요한 노동시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올해에도 전태일문학상의 응모자 수가 많아서 심사자들은 즐거웠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시장 가치가 인간의 존엄성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있는 상황인데도 휴머니즘을 추구하는 시를 쓰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사실은, 더욱이 노동문학을 전면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전태일문학상에 응모하는 예비 시인이 많다는 사실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즐거운 일이다. 그 연유가 인간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권력과 불의에 맞서 헌신한 전태일의 정신이 더욱 필요한 시대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또 그 어떤 문학상보다도 전태일문학상이 가장 깨끗하게 운영되고 있다고 신뢰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심사자들은 믿고 싶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을 읽으며 심사자들은 전태일의 정신을 오늘날 어떻게 살려내고 있는가를, 즉 지난 시대의 노동시가 아니라 2005년 현재에 필요한 노동시를 찾고자 했다.

 

그 결과 이맹물의 <비명-마이크로칩 공장>6편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이맹물의 작품들은 호흡이 상당히 길어 시적 긴장력을 잃을 수 있는 위험이 있었지만, 주제와 제재 간의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극복하고 있었다. 그만큼 자신의 삶을 구체적이면서도 성실하게 담아내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상황을 비판 인식으로 그렸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산문적인 느슨함을 경계하면서 작품을 써나가길 기대한다.

 

박소란의 <겨울밤, 아기단풍>2편은 시적 대상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아주 돋보였다. 다만 투고한 작품들이 우리 시대를 이끌어갈 수 있는 만큼의 힘이 약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주었다. 시가 꼭 목소리를 높이 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 사상의 자장을 넓히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장종의의 <학춤>4편도 뛰어난 작품들이다. 소재나 제재를 달리 보는 시각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상상력의 폭이 넓어 참신했다. 또한 소재들을 시어로 조직해내는 능력도 탁월했다. 앞으로 작품의 소재를 선택할 때 시대성을 보다 반영하는 인식을 가졌으면 좋겠다.

 

오진엽의 <철도원 부부>4편은 강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급식 빵> 같은 작품이 좋은 예인데, 삶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란 언어를 수단으로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표현력에 보다 다부지게 달라붙기를 바란다.

 

한편 임효림의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4편을 특별상으로 선정한다. 작품의 수준도 갖추었지만 민주화운동의 공로를 인정해 특별상을 수여하기로 전태일문학상 운영위원회에서 결정했다.

 

이외에 한영숙, 공담, 홍성준, 표왕덕, 변삼학, 김륭 등의 작품에도 주목했다. 모두 다양한 개성을 가지고 있었고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이루고 있었다. 더욱 노력한다면 틀림없이 좋은 작품을 쓸 것이다.

 

- 심사위원 나희덕 (시인맹문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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