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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는 끝없이 구른다 / 문지원

 

 

드디어 팡파레 소리가 만국기처럼 펄럭인다.
좌석 뒤에 돗자리를 편 가족은
다닥다닥 붙어 앉아 간밤의 꿈을 응원한다
십이월의 바람은 시린 호주머니에 가득하고
배팅 된 전광판의 숫자가 달음질치기 시작한다
박수 소리보다 선수들의 헬맷이 야무지게 빛난다
비탈 진 길에서는 페달을 더욱 세차게 밟아야 한다
함성이 선수들의 붉은 다리만큼 굵어지면
욕설도 응원을 비는 무슨 부적이라고 간간이
카악 칵 가래침까지 뒤통수에 붙여준다
누가 들여왔을까 세 발 자전거, 아이의
작은 발등에 노란 전표가 붙었다 날아간다
경기 막바지에 다다른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빠르다
허기진 오후까지 채워주는 알진 통감자
사람들 입에서 뜨거운 김이 뿜어져 나온다
자리다툼하는 바퀴에 햇살이 사납게 퉁겨진다
조금만 더! 저기가 고지다!
선수들의 각진 턱이 페달과 함께 부러질 것 같다
골인 지점을 막 지나가는 바퀴들을 향해
사람들의 눈에선 정밀한 플래시 불빛이 터진다
우승한 선수의 주변으로 환성이 모였다 흩어지고
풀죽은 어깨들이 전표처럼 구겨진다
우승을 점치던 책자들과 빨갛게 벌렁거리던 밑줄들과
차갑게 식은 한숨들이 텅 빈 관람석에 채워지고
갈기갈기 라인이 그려진 가슴들이
하루를 올라타고 페달을 굴린다 갑자기 컴컴해져 오는 저녁을
응시하는 눈동자들, 두 개의 검은 바퀴가
이탈할 수 없는 어둠 속 트랙을 따라 털털털 굴러가고 있다.

 

 

 

 

[당선소감]

 

나는 아주 작은 꿈을 가꾸고 만족하며 살고 싶었다.
그러나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던 뜨거운 열정은 절망의 다른 이름이었고
나는 기구하게도 그것을 껴안을 수 밖에 없었으며
내가 안았던 것들은 다 재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러 해를 알 수 없는 방황으로 시달려야만 했고
그 대가는 혹독한 상처와 감당할 수 없는 깨달음뿐이었다
혹자는 상처 입은 사람만이 시를 쓸 수 있다고 했지만
그 말은 내게 위로가 되지 못했다

아직까지도 무엇이 나를 이 자리까지 오게 했는지 모르겠다
나에겐 재능도 욕심도 없었으며 단 한번도 제대로 된 시를 갖지 못했다
다만, 시의 마력에 이끌렸을 뿐이고 나도 모르게 휘갈겼던 글들이
부족하나마 시의 형태를 갖게 된 것은 최근이었다
그래서일까 당선의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항상 하찮고 낮은 것들에 내 손길이 닿아 사랑의 문장으로
보살펴질 수 있기만 바랄 뿐이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 드린다
나의 행로를 격려해주시고 지켜봐 주신 부모님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늘 옆에서 힘이 되어 준 미경 언니, 시를 깨우치는데 큰 도움을 준 <시처럼> 회원들
그리고 박주택 교수님, 나를 아는 모든 분들과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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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참신한 상상력을 연마한 이만이...

 

너무 상식적인 말 같지만 아무나 시를 쓸 수 있으나 누구나 시인이 되는 건 아니다. 삶의 핍진한 경험과 사유의 깊이 그리고 이의 시적 형상화를 위한 참신한 상상력을 연마한 이만이 겨우 몇 줄의 시를 쓸 수 있다는 건 응모자들도 잘 알리라.

 

150여명의 응모자 가운데 이런 요건을 갖춘 경우는 불과 5명정도. 이중 이은규의 '흑백사진 한 장'은 잿빛 아스팔트에 치인 얼룩고양이를 통해 문명의 '참을 수 없이 가벼운 레퀴엠'을 연주할 수 있는 능력이 돋보였고, 김명희의 '새야 새야 바람새야'는 전통적인 가락의 변용을 통해 '살풀이로 건너가는 무명의 이파리들'의 신음을 읊어낸 점이 좋았다. 장정희의 '적멸의 집'은 현란한 이미지와 현학적이리만치 요란한 사유의 전개를 보여준 게 장점과 함께 오히려 단점이 되기도 했고, 이종숙의 '노파'는 "소리가 죽은 그녀의 귀에 바람이 둥지를 틀고"라는 절절한 표현도 있지만 그의 싯구대로 "보이는 것만"을 보는 게 흠이었다.

 

위 네분은 무엇보다 예시한 작품외에 고를 수 있는 작품이 거의 없는데 반해 다행이 당선자인 문지원(본명 스나)은 '막다른 집', '검은 눈사람을 본 적이 있다', '바퀴는 끝없이 구른다'등 세 작품에서 버려진 치매노인과 문 닫힌 탄광의 "눈도 코도 잃어버린 탄가루의" 검은 눈사람, 그리고 경륜(競輪) 도박장에서 전표처럼 구겨지는 풀죽은 어깨들의 참담한 삶을 치밀한 묘사와 절도있는 진술로 이끌어낸게 그 능력에 값하였다. 그런데 앞의 두 작품이 비유 등에서 훨씬 더 성공을 거두고 있지만 "빛보다는 어둠에 더 익숙해져" 그 자체로 암전(暗電)되어버린 반면에 '바퀴는 끝없이 구른다'는 시적 내용에 맞는 형식의 속도감, "함성이 선수들의 붉은 다리만큼 굵어지면/욕설도 응원을 비는 무슨 부적이라고 간간이/카악 칵 가래침까지 뒤통수에 붙여준다"는 표현 등의 거쿨진 힘이 경륜 도박으로 상징된 삶의 왜곡된 욕망을 드러내는데 적격이라 생각되어 당선작으로 민다.

 

신인에겐 항상 새로운 실험의식과 자기만의 독특한 표현이 요구된다. 하지만 그것이 자칫 가벼운 개그 수준의 재기발랄이나 애매모호한 현학취미로 빠지는 경우를 늘 보아온 터에 당선자처럼 삶의 진정성으로 밀어붙이는 그 치열함이 요즘 시단에서 더 요구되는 게 아닐까.

 

심사위원 고재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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