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까치 / 허형만
보슬비 오시는 날
날마다 찾아가는 산길을 걷는데
저만치 산까치 대여섯 마리
보슬보슬 젖는 길에서
신나게 뛰놀고 있다
나도 함께 뛰고 싶어 우산을 접고
비에 젖으며 가만가만 다가가는데
눈치 빠른 산까치들
후르르 나뭇가지 위로 날아오른다
하이고 못 본 척 뒤돌아갈걸
미안해하며 비에 젖어 걷는다
젖어라 시여
심장 깊이 젖어라 시여
산까치도 젖으며 노래하나니
산딸기도 젖으며 붉게 익나니
보슬보슬 젖는 시는 부드럽나니
젖어라 시여
뼛속까지 젖어라 시여
[심사평] 산딸기처럼 詩도 부드럽게 젖어들어
자유와 허무, 방랑의식과 민족혼을 커다란 스케일로 노래했던 공초 오상순 선생의 시적 위의(威儀)는 오늘날 한없이 왜소해진 우리 삶의 성찰적 역상(逆像)이 되어 주고 있다. 이러한 선생의 삶과 시를 기리는 공초문학상 제29회 수상자로 선정된 허형만 시인은 맑고 고운 순수 모국어를 섬세하게 가다듬어 온 우리 시단의 대표적 중진이다.
그의 시 세계는 근원적 보편성을 일관되게 탐색하고 추구함으로써 존재의 기원에 대한 원형적 사유를 줄곧 축적해 왔다. 사물들을 향한 경험적 관찰과 그리움의 에너지를 통해 다양하고도 심원한 형상을 얻어 온 것이다. 이번 수상작 ‘산까치’ 또한 이러한 허형만 브랜드의 정점에서 발화된 결실로 다가오고 있다. 시인은 보슬비 내리는 산길에서 산까치들이 뛰노는 장면을 만난다.
그네들과 함께 뛰고 싶어 우산을 접고 다가가는데 산까치들은 어느새 나뭇가지 위로 날아오른다. 그때 시인은 “젖어라 시여/ 심장 깊이 젖어라 시여”라고 산까치들이 젖으며 노래하는 환청을 듣는다. 산딸기도 젖으며 붉게 익어가고 시인이 상상한 ‘시’(詩)도 부드럽게 젖어간다. “젖어라 시여/ 뼛속까지 젖어라 시여”라는 마지막 외침은 ‘산길=산까치=산딸기’를 살아 있는 형상으로 만들면서 그 형상이 아름답고 처연하게 젖어 가는 순간을 실감 있게 담아내고 있다. 이는 서정시의 광맥을 지속적이고 균질적으로 일구어 온 그만의 미학적 성취다. 허형만 시인이 노래하는 이러한 생명 지향의 언어를 통해 우리는 경험적 진정성과 함께 사물의 존재 형식에 대한 발견에 깊이 참여하게 될 것이다.
- 심사위원 이근배·오탁번 시인, 유성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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