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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탠로드*를 빠져나오며 / 박진규

 

 

달이 저 많은 사스레피나무 가는 가지마다
마른 솔잎들을 촘촘히 걸어놓았다 달빛인 양
지난 밤 바람에 우수수 쏟아진 그리움들
산책자들은 젖은 내면을 한 장씩 달빛에 태우며
만조처럼 차오른 심연으로 걸어들어간다
그러면 이곳이 너무 단조가락이어서 탈이라는 듯
동해남부선 기차가 한바탕 지나간다
누가 알았으랴, 그 때마다 묵정밭의 무들이
허연 목을 내밀고 실뿌리로 흙을 움켜쥐었다는 것을
해국(海菊)은 왜 가파른 해변 언덕에만 다닥다닥 피었는지
아찔한 각도에서 빚어지는 어떤 황홀을 막 지나온 듯
연보라색 꽃잎들은 성한 것이 없다
강풍주의보가 내려진 청사포 절벽을 떨며 기어갈 때
아슬아슬한 정착지를 떠나지 못한 무화과나무
잎을 몽땅 떨어뜨린 채 마지막 열매를 붙잡고 있다
그렇게 지쳐 다시 꽃 피는 것일까
누구나 문탠로드를 미끄덩하고 빠져나와 그믐처럼 시작한다

※ 문탠로드(Moontan Road)대한팔경의 하나인 해운대 달맞이언덕에서 달빛의 기운을 받으며 산책을 즐길수 있도록 조성된 2.2㎞의 산책로.

 

 

 

 

문탠로드를 빠져나오며

 

nefing.com

 



[당선소감] "詩를 아는 사스레피나무가 준 선물"


강풍주의보가 내려진 어느날, 해운대 문탠로드에 갔습니다.


사스레피나무가 아주 많은 산책길이었는데 그 나뭇가지마다 마른 솔잎들이 거꾸로, 일렬로, 촘촘히, 걸려 있었습니다.


사스레피나무란 응당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그 풍경은 장관이었습니다. 그런 희한한 취미를 가진 나무가 어디에 있을까요.
뽑아주신 시는 정말 시를 아는 사스레피나무가 준 것이었습니다.


지난 2년여 동안 그랬습니다. 유난히 나무들이 저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두 발이 지상에 심긴 채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었던 저에게 나무들은 괜찮아, 괜찮아 하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더 이상 신발이 필요없는 요양원 병실에서 괴로운 투병을 하고 있는 당신이고서야 얼마나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저 버짐 핀 과묵한 플라타너스처럼 무언의 세계에 갇힌 당신이고서야 얼마나 저에게 많은 말씀을 하시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젖은 장작 같았던 저에게 시의 불꽃을 피워준 이가 당신이기에 이 당선의 기쁨을 뜨거운 채로 드립니다. 그리고 널. 나의 첫 독자였던 경아, 나의 거의 전부를 알고 있는 아내이기에 앞뒤없는 신랄한 언어로 나의 중심을 흔들어 주어서 정말 고맙구나.


살갑지도, 냉철하지도 않은 제자를 언제나 바위처럼 기다려주시던 강남주 교수님, 문학동인 잡어의 동지들과도 기쁨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날 것의 졸시에 환한 꽃다발을 심어주신 심사위원님들과 국제신문사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심사평] "삶의 깊이 응시하는 내면의 시선 미더워"

 

전체적으로 수준이 고르고 안정된 느낌이었다.


부산경남 지역보다 오히려 타 지역에서 응모한 시가 훨씬 많았다. 신춘문예만큼은 더 이상 중앙과 지역을 구분해서 차별화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종심에서 거론된 시는 모두가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작품들이었다. 다만 언어적 기교나 시적 수사가 지나치게 정형화된 느낌이 들어 신인으로서의 시적 개성을 발견하기가 어려웠다.


좀 서투른 감이 있더라도 확연히 눈에 띄는 작품을 찾을 수 없어서 심사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함박눈', '탁구치는 자전거', '나무의 온도', '뭉게구름을 확장하다', '문탠로드를 빠져나오며'를 두고 마지막까지 논의를 하였다.


심사위원들은 일정한 틀에 맞추어 패턴화된 시보다는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이미지가 육화된 개성 있는 시를 찾는 데 주력했다.


낡고 진부한 서정에 갇힌 시보다는 풍경과 일상을 응시하는 내적 깊이가 시정신의 심화를 불러오는 작품을 주목하였다.

 

그 결과 고심 끝에 '문탠로드를 빠져나오며'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들도 일정한 수준을 갖추었고, 삶의 깊이를 내면으로 응시하는 시적 긴장을 유지하고 있어서 미더웠다.


다만 응모 작품들 간에 시적 경향의 편차가 두드러진다는 점이 흠으로 지적되었다.


이러한 점은 신인으로서 자신만의 개성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어 당선작으로 뽑는 데 주저하지는 않았다.

 

당선자에게는 축하의 말을 전한다. 그리고 최종심에서 안타깝게 떨어진 예비 시인들에게는 따뜻한 격려를 보낸다.
앞으로 시와 더불어 더욱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본심위원 정호승(시인) 최영철(시인) 하상일(문학평론가·동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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