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히아 / 김재홍
중남미의 어느 공화국 시민인 그는 동란과 쿠데타를 딛고 선 아시아의 작은공화 정부의 취업비자를 받아 뜨끈뜨끈한 잠실야구장 타석에 섰다(왜 중남미 선수들은 교범에도 없는 말타기 자세를 하는지 몰라)
메시아가 어디 사는지도 모르면서 검게 붉게 얽은 얼굴을 하고 그는 처음에 야구공과 방망이를 손난로처럼 품고 한겨울 국제공항 청사를 두리번거리며 어슬렁거리며 나왔을 것이다(머리통이 얼마나 작으면 헬멧 속에 모자를 또 썼을까)
그는 당당하게 2루타를 쳤다 베이스를 밟고 선 두 다리가 덜덜 떨렸다 수천 개 눈동자가 일순간 그의 몸을 향해 함성을 지르고 파도타기처럼 술렁거리며 비명을 지르고 거대한 솥단지가 되어 펄펄 끓다가 더 작은 체구의 다음 타자가 안타를 칠 수 있을지 의심한다(관중석에 앉으면 왜 선수들은 모두 야구공처럼 보일까)
비쩍 마른 붉은 눈의 게바라를 읽고 싶었다 국경을 뛰어넘는 공화국의 깃발을 보고 싶었지만 그는 너무 작았고 액정 화면에 잡힌 그의 헬멧에는 국적 불명의 독수리 이니셜만 코를 벌름거리며 박혀 있었다
멕시코와 푸에르토리코와 쿠바 출신의 운수 좋은 메이저리거들도 타석에 서면 구부정하게 허리 굽히고 꼭 말 타는 자세로 방망이를 든다
* 메히아 : 국내 프로야구팀 '한화이글스'의 외국인 선수
[당선소감]
그제는 제가 자란 울산 장생포에 갔습니다. 마을은 모두 사라지고 제가 살던 집은 무너진 채 골조만 남아 있었습니다. 흥청대던 고래잡이 항구는 이름만 남았습니다. 제가 난 강원도 태백, 거기 살던 집은 납석 광산이 되어 있습니다. 저의 살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강원도 산막에 내리던 별빛만 있어도 좋겠다. 장생포 바다 은빛 물너울만 있어도 좋겠다. 지나온 자취를 모두 담아둘 수는 없지만, 거기 싱싱하게 살아 있는 은밀한 목소리를 기억해야겠다. 그래서 우리 삶의 뜨거운 메시지를 찾아내야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서정춘 선생님께서는 어버이처럼 자상하게 격려해 주셨습니다. 고형렬 선생님께서는 시로 가는 길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일깨워 주셨습니다. 김영산 시인은 저에게 친형제와 같은 분입니다. 아니 친형제 이상의 혈육의 정감을 나누고 있습니다.
함께 시의 길을 걸으며 밤새워 어깨를 부대낀 김태수 시인.정일근 시인을 비롯한 울산의 선배 시인들께 감사합니다. 모두가 제게는 박복한 속에 복 받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제 아버지 산소엘 다녀왔습니다. 새벽 1시의 시립공원묘지는 후텁지근했습니다. 아버지의 살내음과도 같은 산그림자와 더불어 한참 있다 왔습니다.
[심사평]
홍삼득의 '생각 2'는 반복적 율동에 의지한 조금 단순한 구조이지만 이른바 시를 만들 줄 아는 솜씨가 빛나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약점은 그 변화의 추이에만 모든 감각과 시선을 집중한 나머지 자신의 상상력이 그만 "나는 생각들 속에서/생각을 호흡하며…산다" 는 식으로 사유의 단순구조에 사로잡힌 것에 유의하지 않은 점이다. 그러나 심사자들은 '연두색 벌레'를 비롯해 그의 다른 작품도 모두 시를 향해 섬세하게 열려 있음에 주목했다.
응모작 중 사유의 복잡다기함과 변환에 능한 작품은 이호준의 '상징들'이었다. 그의 시는 선행시(先行詩)인 조정권의 '산정묘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 낡은, 죽음이 가득한 세계를 가장 다채로운 언어로 은유하면서 우리를 상상의 한 극점까지 몰고 간다. 이 거침없는 언어를 보라.
"나는 낮은 하현(下弦)/사령(死靈)들의 윤무(輪舞), 혀 달린 메타포/생명의 초라한 환유/부질없는 맹세의 램프, 나는"
한자어를 돌올하게 내세우는 것이 좀 거슬리지만-역으로 그것도 그의 시의 특장일 수 있겠으나-그리고 어느 외국 번역시를 읽고 있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그의 상상력은 그침을 모르는 바람처럼 몰아치면서 이 '가짜 항성'의 '회색 여행자'의 '일그러진 외눈'으로 이 시대의 모든 불모의 징후를 명징하게 읽어낸다.
그리하여 이 여행자의 시선에 돋을새김된 세계는 "바람이 불기 전에/떠날 채비를 하는 모래의 영혼과/비 내리기 전에 잠드는 불의 영혼"들이 이글거리는, 즉 "죽음의 고요함"이 끓어 넘치는 표정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선명하고 멈출 줄 모르며 언어의 두려움을 너무 모르는 넘치는 재기 앞에서 심사자들은 한편으로 감응하면서도 곳곳에 과장된 감정의 덩어리들이 제어되지 않은 채 노출돼 작품의 균일한 성취를 방해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김재홍의 '메히아'는 일견 평범한 시다. 아니 앞의 '상징들'과 비교하면 비유도 좀 어눌해 보이고 언어도 매끄럽지 못해 평범의 극치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두번·세번 소리내 읽다보면 입가에 배시시 웃음이 배어나는, 유머와 기지를 속으로 감추고 있는 시다. 이호준의 시가 정색을 하고 쓴 시라면 '메히아'는 짐짓 아닌 척하면서 허술한 표정으로, 그러나 할 말은 다 하고 있는, 앞의 시와는 시적 전략이 다른, 평범을 가장한 시다.
첫 구절부터 보라. "중남미의 어느 공화국" 출신 시민이 역시 그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처지였던 "동란과 쿠데타를 딛고 선 아시아의 작은" 공화정부의 취업비자를 받아 "뜨끈뜨끈한 잠실야구장 타석"에 서게 된 경위에 대한 군더더기 없는 말끔한 사실 묘사부터가 벌써 웃음과 연민을 동시 유발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하여 이 시는 시종일관 이 웃음과 연민의 이중 기조를 잃지 않으면서 '메히아'라는 머리통이 매우 작고, 2루타를 날린 적이 있으며, 비쩍 마른 눈의 체 게바라를 연상시키는, 그리고 늘 타석에 서면 "말 타는 자세로 방망이를 든" 인물을 살아 있는 시적 형상으로 창출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심사자들은 숙고 끝에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밀면서, 동시에 그의 다른 작품인 '평상(平床)' 등에서 확인된, 이 땅의 대지에 뿌리를 내린 듯한 한편으로 미더운 시적 기량이 너무 손쉽게 민중주의적인 인물형상의 탐구에만 매몰되지 않기를, 즉 오늘의 도시민의 피로한 일상 또한 간파할 줄 아는, 산뜻한 현대 시인으로서의 세련된 미적 근대성 또한 갖추게 되기를 특별히 당부하기로 했다. 그 길만이 오늘날 도처에서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는 민중적 정서가 건강하게 되살아날 수 있는 길이다.
그러나 그의 해석이 지나치게 독자적(주관적)인 나머지 "소리를 반사하는 침묵이 선명하다"는 등의 객관적 인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상의 전개가 전체적으로 모호하여 물의 형상을 통한 몸의 탐구라는 시적 주제가 효과적으로 살아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앞의 '메히아'를 압도할 만한 결정적인 새로움이 없었다. 한편 배호남의 '좋은 날'도 매우 아름다운 언어의 그늘을 드리운 작품이었으나 바로 그 '작품됨'이 너무 구투였음을 밝힌다. 응모자 여러분의 건투를 빌면서!
심사위원 김혜순·이시영 / 예심 고형렬·김경미·하응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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