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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널박 / 김지요

 

 

돌아 갈 집이 없는 것은 아니다

 

5분 간격으로 오는 전화에 대고

연신 중얼거린다

상대가 없는 혼잣말을 하듯

여긴 터미널이야

터미널이라고 했잖아

 

타야 할 차를 놓치고도

흥건한 취기에 즐거운 그는

아무 걱정이 없다

 

어디든 데려다 주는 터미널이니까

 

걱정 마 터미 늘이야

 아서 간 다고 했자느

막차 끊기믄 태택시 타믄 대지 머

먼지 쌓인 간이 의자에

목적지에 사로잡혀 달려 온

몸을 다 내려놓는 중이다

 

꼬인 혀는 쉽사리 풀리지 않고

사내의 행동에 실실 웃는 사람들과

어차피 아는 사람이 없으니

같이 웃어도 좋은 사내

 

막차 같은 하루가 저물고

행인 1,2,3이 사라지고

 

애가 타는 신호음이 계속 되어도

괜찮아 터미널이야

 

괜찮아 터미널이야

 

 

 

 

붉은 꽈리의 방

 

nefing.com

 

 

 

[수상소감]

 

8할이 바람이었던 할아버지가 집에 돌아왔다. 할아버지는 마루에 모로 누워 대숲 소리를 듣거나 먼 하늘을 보며 비나 바람이 몰아 올 것을 걱정하곤 했다. 어느 가을 해질 무렵이었다. 저물어가는 석양이 마루에 막 닿기 시작했고 할아버지의 시조창이 시작되었다. 고사리손으로 마루를 닦던 나는 자꾸 눈가가 젖어들었다. 아무 이유 없이 쓸쓸함이 몰아왔다. 체념과 관조로 얼룩진 노래를, 곡비가 되어 대신 울어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어느 날 내게 그늘이 왔고 시가 내게로 왔다.

 

지난한 시간을 그늘을 세공하는데 허비했다. 수상 소식은 잠깐 나의 그늘을 환하게 했다. 다시 구름이 몰려온다. 상을 탄다는 것이 어깨에 짐을 한껏 지게 된 무게감이라는 것을 절감한다.

 

수상소식을 함께 한 지인이 내게 두렵지 않냐고 물었다.

두렵지 않다. 고 했지만 두렵다.  이 함께 있는 나의 오래 된 연인과 새로이 연애할 일이 두렵기만 하다. 미련스러운 미련이 여기까지 오게 했을 것이다. 아픈 연애를 참고 지내 온 스스로 에게 작은 위로를 보낸다. 주목 받지 못하는 모든 변방의 시인들과 이 상을 함께 하고 싶다. 막차 같은 하루를 보낸 터미널박들과도 함께 하고 싶다. 시는 우리를 어디로 건 데려다 줄 것이니까

 

시의 발원지가 못나고 부족한 것들로 시작 된다는 것은 다행이다. 부족한 작품으로 상을 타는 부끄러움을 조금은 눙칠 수 있게 되었다. 애지의 식구들과 지혜출판사에 감사를 드린다.

 

 

 

 

[심사평]

 

에즈라 파운드의 이미지즘 이론이 유입된 이후 한국현대시는 주지적 경향에 음악성, 회화성, 입체성 등을 가미하여 급진적으로 시의 영역과 토대를 확장하여 왔다. 1935년에 김기림이 역설한 시작에 있어서의 주지적 태도는 시에 기교적인 측만 내세운다하여 프로문학 진영의 임화로부터 거센 반발을 받게 되는데, 그 이유는 기교만 내세우다보니 시에 있어서 본질적인 진정성과 내용이 무시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김기림은 결국 시의 내용을 중시한 오든이나 스펜더의 이론을 수용하여 전체시론을 강조하면서 시작에 있어서 주지성뿐만 아니라 핍진성도 고려하자는 대안을 내놓게 되었다. 2000년대 초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한층 진화된 시의 경향들은 한국시의 새로운 주류로 부상하면서 기존의 정형화되어 있던 시와 시작법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시는 읽는 사람의 이해를 돕기 위해 쓰진 않는다. 그렇다고 시라는 개념을 치장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시를 쓰지도 않는다. 시는 그저 시일뿐이다. 그 시를 판단하는 주체는 독자이고 감동에 있다.

 

이번 애지작품상 후보에는 김은상 시인의 첫사랑과 김지요 시인의 터미널박이 올랐다. 이 두 작품은 전형적인 에즈라 파운드 계열과 김기림이 수용한 전체시론을 보는 것 같아 최종심에 올리기까지 많은 고민과 기쁨을 동시에 갖게 되었다. 많은 회원들의 선택은 박빙을 이루었으나 근소한 차이로 김지요 시인의 터미널박이 작품상의 영광을 안았다. 김지요 시인은 2008년 애지로 등단하여 첫 시집 붉은 꽈리의 방을 상재하고 돈독한 시심으로 그만의 시세계를 꾸준히 구축하여 왔다. 그의 첫 시집에 수록된 마루를 읽다는 그의 내밀하고 탄탄한 시력을 증명해주고 있다.

 

애지작품상 수상작인 터미널박도 그러한 일련의 연장선에서 보여준 현대인의 일상 속에 내재되어 있는 고단한 삶을 술에 취한 대화체로 풀어내고 있다. 시가 궁극적으로 전달하는 메시지인 핍진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많은 회원들에게서 인정을 받지 않았나 싶다. “막차 같은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터미널박은 어디든 데려다 주는 터미널이야라고 말하며 스스로 아득한 희망을 확신하고 있다. 그 아슬아슬한 희망을 애가 타는 신호음으로 포착하는 장면은 비단 터미널박 뿐만 아니라 동시대를 고단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터미널박이라는 익숙한 공감대를 이끌어내고 있다.

 

회원을 대표하여 진심으로 축하를 드리고 터미널박을 쓴 김지요 시인이자, 애지를 빛내는 시인으로 영원히 기억되길 바란다.

 

심사위원 애지문학회 회원일동 (글 권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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