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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 필경사 / 김지명

 

 

안개 낀 풍경이 나를 점령 한다

가능한 이성을 다해 착해지려한다

배수진을 친 곳에 야생 골짜기라고 쓴다

가시덤불 속에 붉은 볕이 흩어져 있다

산양이 혀를 거두어 절벽을 오른다

숨을 모은 안개가 물방울 탄환을 쏜다

적막을 디딘 새들만이 소음을 경청한다

저녁 숲이 방언을 흘려보낸다

무릎 꿇은 개가 마른 뼈를 깨물어댄다

절벽 한 쪽이 절개되고

창자 같은 도랑이 넓어진다

사마귀 날개가 짙어진다

산봉우리 몇 개가 북쪽으로 옮겨간다

초록에서 트림 냄새가 난다

밤마다 낮은 거래 되고

낮이 초록을 흥정하는 동안

멀리 안광이 흔들린다

흘레붙은 개가 신음을 흘린다

당신이 자서전에서 외출하고 있다

 

 

 

쇼펜하우어 필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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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꿈 높이 구두를 갈아 신은 아침 같았다. 불현듯 다가온 당신이 동굴 밖에 인형 하나를 그리며 소란했다. 당신의 소리 없는 노래를, 안무 없는 춤을, 감정 없는 사랑을, 동굴 속 어둠을 빌려 수없이 적었다. 당신과 내가 짝짝이 신발이란 걸 알아차린 어느 날, 당신은 떠났다.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이 호흡인 나날을 보냈다. 불안은 짐승 여럿이 사는 움막에서 동거했다. 침묵으로 수태 기간을 보내고 당신을 찾아 나선다. 당신이 날 알아볼 줄 알았다. 꿈 높이 구두로 능동의 영토에 첫 발자국을 만든다. 이제 또 다른 불안을 내 허파에 기른다.

 

모험할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멀리 볼 수 있는 안목과 죽음을 담보로 시작에 임해야 한다고 가르쳐주신 선생님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무작정 시를 좋아하던 설렘을 어깨 힘줄로 길러 준 선목문학회, 에이스동인 혜경, 정현, 성진에게 고마운 마음 전한다. 끝으로 오랫동안 후견인으로 지켜봐 준 남편과 딸에게 기나긴 고마움을 표한다.

 

 

 

다들 컹컹 웃음을 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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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해마다 시 쓰기 열정 많아 향후 발전 가능성에 무게

 

예심을 통과한 열네 분의 작품들을 선자들이 숙독하고 논의했으나, 아쉽게도 올해엔 한눈에 띄는 당선작을 찾지 못했다. 전반적으로 일정한 수준의 기본기는 갖췄으나, 그 ‘너머’에 이르도록 끌고 가거나 들어 올리는 힘을 내재한 시편을 찾아내기란 꽤나 지난한 일이었다. 그러한 추동력이란 삶을 바라보는 서정적 진정성의 관점에서는 물론이려니와 언어 자체가 직조해내는 미묘한 ‘아우라’를 통해서도 발현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최종적으로 네 분의 작품들이 집중 숙고되었는데, 김지명의 ‘쇼펜하우어 필경사’, 지연식의 ‘가금의 서’, 박은선의 ‘흔적 하나’, 이도은의 ‘엄마는 외계인’이 그것들이다. ‘가금의 서’는 가장 활달한 지적 실험정신과 개성 있는 텍스트적 상상력을 보여주어 주목되었는데, 과유불급이랄까 시에 녹아들지 못한 생경한 언술이나 비유들이 흠결로 드러나 완성도라는 점에서 아쉬웠다. ‘흔적 하나’는 창문 틈에 죽은 곤충의 시체를 화자로 한 묘사적 상상력이 진정성에 닿아있어 끝까지 고려되었지만, 군더더기라 할 언술들이 많아 정련미가 부족했다. ‘엄마는 외계인’은 동화적 상상력이라 할 나름의 발성법을 갖고 있어 발전 가능성이 보였으나, 좀 더 웅숭깊은 시선과 시적 사유의 깊이와 넓이를 더해주기를 바란다.

 

고심 끝에 ‘당선작 없음’까지 고려되었으나, 해마다 시 쓰기의 열정을 불태운 투고자들의 고뇌와 절망을 감안하여 향후의 발전 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쇼펜하우어 필경사’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쇼펜하우어 필경사’ 역시 수사적 완성도의 미흡함을 드러내고 있으나 앞으로 각고의 정진을 통해 문체를 획득하게 된다면, 오히려 이런 약점을 자신만의 시학을 구축하는 장점으로 전환시킬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갖게 하는 특유의 힘 있는 시적 언술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높이 산 것이다.

 

심사위원 본심: 엄원태`조용미(시인), 예심: 안상학`김이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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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미어캣 / 김지명

 

 

조심은 태초에 파수병이었다 실패한 파수병이었다

 

해바라기로 서서 병정놀이를 한다 멀리서 달려오는 당신 신발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침묵의 하얀 천을 깔고 웃음조차 달아난 각이 서는 아침 쪽으로 서서

 

꼭 그래야만 하는 교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 조심은 병정놀이를 한다 폭식의 근성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목구멍을 채우도록 여기 보세요 당신이 낳은 짐승이에요 간절한 눈빛이 살아있는 쪽에서

 

비가 와서 하루쯤 걸러도 되지만 조심은 병정놀이를 한다 작은 조심들이 배가 고플까봐 어제 받지 못한 답을 들을까봐 엄마 마음으로 발을 움켜쥐고 서서 아빠 자세로 꼿꼿이 서서 벽이 없는 사육장 쪽에서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데 병정놀이를 한다 천리 너머 먹구름 위를 걷는 당신의 양말 냄새에 코를 박고 떼를 쓴다 내 고향은 어디냐고 내 집은 왜 땅굴이냐고

 

그럼에도 믿는다고 병정놀이를 한다 믿음이 뿌리내려 모스크 지붕을 올렸다 뿌리가 칭칭 감아올라 지붕은 호흡이 곤란하다 아교질처럼 끈적한 믿음은 얼마나 물성이 깊은가

 

조마조마 병정놀이를 한다 불안이 조심을 공중으로 들어올리고 조심은 불안을 타고 내려와 공기보다 가볍게 다른 공중으로 엉덩이를 이동 한다 노을이 흩어지는 사원 저쪽으로

 

큰 바위가 울어 모래알로 부서져 내릴 동안 천사 소리인지 악마 소리인지 모를 당신 말씀을 내버렸던 쪽으로 서서

 

 

 

 

쇼펜하우어 필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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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처음은 불편해 붉습니다

 

발이 닿지 않아

추위라는 수목한계선을 몰라

무작정 발걸음을 옮긴

홍가시나무입니다

 

사계절 안부에 귀기울여 본 적 없는

태생은

뒤가 없고

생각도 없어

몸만 초록초록 빛나는 혼자 가는 숲입니다

 

낯선 땅에 고개 꺾어 그림자놀이에 목을 뺍니다

가위가 보자기를 이기고

보자기가 주먹을 이기고 나면

심장 지근거리에서 불안이 집을 짓습니다

시인이란 이름 겨우 올린 시인처럼

더욱 작아지는 그림자의 진술

 

느릿느릿 걷다가 새 울음소리에 몰두하는 고양이처럼

여기 기웃 저기 기웃

멀대처럼 공중의 깊이 속으로

그림자만 검게 길어졌습니다

더 이상 위쪽을 몰라 단단해졌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한쪽으로만 치우쳐

고양이가 왜 나무 위에 우는 새에 집착하는지

시의 꽃으로

시의 낯꽃으로 피어도 되는 건지

주소지를 제대로 모르는

나는 홍가시나무처럼

사계절을 홀로 기웃거립니다

 

처음은 모자라 부끄러워 붉습니다

 

여러모로 부족한데 저를 작품상 수상자로 선정해주신 <애지>와 애지문학회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소중한 배려 잊지 않고 열심히 쓰겠습니다.

 

 

 

 

다들 컹컹 웃음을 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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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지난 9 18일 대전시 용문동에 위치한 이돈형 시인의 사무실에서 10 여 명의 시인들이 추천해 준 25명의 시인들 작 32편을 두고 애지문학 작품상 후보 심사회의를 가졌다. 이 중에서 4편을 선정해야 할 심사는 행복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불편하였다. 후보에 오른 작품들 모두가 각자 지니고 있는 작품세계가 뚜렷한 개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태윤의 <나는 내 감정들을 나의 노조라고 불렀다>, 이돈형의 <간판>, 김지명의 <어쩌다 미어캣>, 정진혁의 <접속사> 4편으로 압축하여 회원들에게 작품상 선정을 위한 투표를 독려했다. 9 28일 투표 마감 결과, 총 투표인원 수 34명에서 11명의 표를 얻어 2위를 차지한 이태윤의 <나는 내 감정들을 나의 노조라고 불렀다>와 각축을 벌여 15명의 표를 획득한 김지명의 <어쩌다 미어캣>에게 작품상이 돌아갔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이 언어에는 말하는 것, 듣는 것, 쓰는 것, 읽는 것 모두가 작용하고 있다. 시에도 말하는 것, 듣는 것, 쓰는 것, 읽는 것의 요소들이 서로 삼투압처럼 작용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말하면 시는 시인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해서 창조하고, 시를 통해 자기의 생각을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그러나 시인이 가진 언어를 통해 존재의 집을 열기에는 이질적인 것들이 참으로 많다. 시인이 의도한대로 작품세계가 온전히 재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언어와 존재의 집을 일치시키기 어렵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대상접근의 방법에 대한 원근법, 사물과 사유에 대한 분리와 결합, 체험을 바탕으로 한 상상력의 응축과 확장 등 여러 가지 이질적인 요인들을 퍼즐처럼 잘 맞추어야 하는 견고한 내공이 필요하다. 그래서 시는 이질적인 것으로부터 동질적인 것을 회복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이번 작품상에 선정된 김지명의 <어쩌다 미어캣>이 이러한 본보기를 잘 보여준 작품이라 하겠다.

 

어쩌다 미어캣 같은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병정놀이라는 알레고리를 통해 여러 가지 이질적인 이미지를 지적해냄으로써 조심 불안 사이에 내재하는 당신 말씀으로 동질성을 회복하고 있다. ‘당신 신발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간절한 눈빛으로 벽이 없는 사육장에서 아빠 자세로 꼿꼿이’ ‘먹구름 위를 걸으며 아교칠처럼 끈적한 믿음과 물성을 직접적으로 연상시켜 주는 이질적인 이미지들은 조심 불안한 날의 연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미어캣이라는 동질성으로 결합하여 잘 드러냈다. 이러한 점에서 다수의 회원들 표를 얻지 않았나 싶다.

 

김지명 시인에게 애지문학 작품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더 나아가 애지문학의 위상을 높이고 문학발전에 많은 기여를 해주는 시인이 되길 바란다.

 

심사위원 일동(애지문학회 회장 권혁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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