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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조령진산도를 읽다 / 김영욱 

 

 

사라진 호랑이가 배꼽을 떨어뜨린 곳은 이쯤일 거야

성곽 옆구리에 엎드려 숨소리에 귀기울여봐

고깔 운무 쓰고 돌아앉은 어미 산

새재를 품에 안은 그림자도 우뚝한데

골짝 물길이 실핏줄로 감아 도는 등고선 한가운데

어느 멸망한 종족의 태실이 있지

예로부터 태를 묻은 곳엔 복이 들었지

장돌뱅이들이 등목을 하던 삼복더위에도

털옷을 걸치고서 평생을 떠돌았을 호랑이가

죽어서도 숲의 으쓱한 쇄골에 덮어둔 가죽은

하룻밤 묵어가는 길손들의 지름길 되고

봄비도 티 나지 않게 몸 낮추는 곳이 있다면

바로 여기 성황당 어디쯤일 거야

처녀치마로 둘러쳐진 아름드리 귀목을

노령의 소나무가 호위무사처럼 지키고 서있는 무림에서

아침햇살도 동티가 나지 않게 만다라를 그리는데

흙꽃 위에 두툼한 그늘막을 덮어주는 단풍 손은

어느 내생의 천수보살일까

길이 나기 전부터 탯줄을 품고 있던 이 숲은 보름달의 태반

오래전 궁예가 반달 같은 활을 내려놓고

신의 태엽을 발굴한 물의 나이테가 생사윤회의 바퀴라면

지아비의 발등 위로 불거진 핏줄은 사방으로 뻗은 산맥

못 박힌 발바닥에서 팔자로 갈라진 샛길은

괴나리봇짐 지고 호랑나비로 날아가는 활주로

이 울창한 안개들이 숨겨놓은 수구막이숲

길섶에 묻혀 있는 호랑이의 발품은 미래의 족보라지

예로부터 혈을 지른 자리에서 영웅이 났지

대대로 기를 받는 명당이 있다면

백두대간 등줄기를 제 피로 서늘하게 적시며

진달래꽃밭서덜로 새끼들을 밀어낸 어미의 자궁처럼

옴폭해서 아늑한 여기 이쯤일 거야

 

 

 

 

[우수상] 문경새재를 읽다 / 김겨리

 

 

한 걸음 한 걸음이 문장인 길이 있다

능선으로 제본된 목차마다 행간이 경건한 순례,

일목요연하게 펼쳐지는 둘레길이 고금으로 웅숭깊다

 

철릭을 입은 나무들의 호위를 받으며

첫 장을 넘기자 새재의 서곡인 주흘관에 당도하니

관문교 물소리가 풍경風磬이 울리듯 애잔한 건

쥘부채 펴듯 펼쳐진 서사를 다 서술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일출과 일몰로 빚은 윤슬로 밝히는 너덜길 따라

조곡관에 이르러 다리쉼하듯 산세를 굽어본다

발자국과 손길, 와 철로 한 칸 한 칸 쌓은 성곽은

쉼표 없는 문장, 행갈이도 없이 편집된 질곡의 역사다

그랭이 공법으로 축조된 문장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차곡차곡 집필되고 있으므로

 

등고선에 밑줄 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능선을 넘는다

주흘관에서 조곡관을 지나 조령관에 이르고 나서도

뉘엿뉘엿 지는 해가 부봉에 걸려 있는 것은

아직 다 읽지 못한 새재의 내력을 체득하려 하기 때문인가

 

능선을 넘고 계곡을 지나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 관문

문경새재, 오체투지체로 휘갈겨 쓴 절필의 장르여!

 

바위 하나 나무 한 그루까지 문맥이 섬세하다

곳곳마다 탈자와 마모된 비문으로 편집되는 역사이지만

반으로 접어 놓고 두고두고 읽어야 할 지침서이기에

서표로 꽂아 놓은 달빛도 문장 부호가 되는 문경새재는

사계절의 의태어로 빚은 경전을 아직도 집필 중이다

 

 

 

나무가 무게를 버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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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새재엔 관문이 네 개 있다 / 김완수

 

 

문경 새재 세 관문을 바람처럼 지나간다

볕 드는 곳마다 나는 물박달나무 냄새

당신과의 기억에 쓸릴 때마다

울음이 회갈색으로 조각조각 벗겨져도

단단한 냄새가 발자국을 찍으며 앞서가면

나는 새가 허공에 흘린 소리 같은 바람이 된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봉우리들은

누군가에겐 통곡의 벽이었을 것이고

누군가에겐 사모(紗帽)의 신기루였을 것이다

땅에 발을 묻은 풀만 봐도 울컥하는 이라면

넘어서려는 마음은 흘려보내고

새처럼 길을 돌아내릴 줄 알아야 한다

산그늘이 젖무덤같이 봉긋봉긋해질 때

발부리에 차이던 생각들도 집을 찾는다

 

나는 아픔과 자기 연민의 사생아

나락에 떨어져 본 사람만이

가없는 길을 오르는 일의 덧없음을 안다

골바람을 배웅하고 문경으로 돌아설 즈음

퇴적된 표정에서 오래전의 얼굴이 돋아난다

나는 내 안에 또 하나의 관문을 만들며

어제가 남긴 길을 훌쩍 지나간다

이미 길을 잃고 찾은 길엔 이정표가 없어

돌아올 때는 세상에 없는 바람이 된다

 

내가 굽이굽이 지나온 시간은

이 고개에서 허물을 벗고 숨 돌리는데

마냥 오르려 하던 당신은 지금 안녕하신지

 

 

 

꿈꾸는 드러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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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불안을 밟고도 시의 꽃은 핀다

 

2020년 우리 모두는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낯설고 예측불가인 상황에 부딪쳤다. 코로나 19라는 신종 바이러스는 모두의 마음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소통과 교류는 멈췄고 세상은 봄의 문턱에서 차가운 겨울로 되돌아가는 듯 했다. 하지만 순리대로 봄은 왔고 꽃은 피고 다시 초록의 물결이 세상을 물들이고 있다. 어려운 시기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지만 우리는 다시 희망의 등불을 켜들어야 한다. 문학의 불씨만은 가슴 속에 간직하여 서로에게 물리적 거리를 두어야만 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위로해 주어야 한다. 문학이 가진 힘이 이런 때 빛이 나리라 생각한다. 불안정한 시기임에 응모작이 적지 않을까 염려했으나 많은 이들이 좋은 작품을 응모해 주셔서 무척 기뻤다. 응모된 281편 작품의 1차 심사를 끝내고 본선 심사를 앞둔 시점에 문경 인근 지역에서 코로나 19 확진자가 다수 발생하여 부득이 하게 심사가 미루어진 점에 응모자 여러분께 양해의 말씀을 드리는 바이다.

 

작년에 비해 응모작의 수준이 훨씬 향상되었음을 느끼며 기쁜 마음으로 심사에 임했다. 다만 다시 지적할 수밖에 없는 부분을 잠시 언급하기로 한다. 응모를 할 때는 주최 측의 공모 의도를 좀 더 심사숙고 했으면 한다. ‘문경새재문학상은 문경과 문경새재에 대해 알리고 문경에 대한 애정을 북돋우기 위해 시행하는 문학상이다. 작품 자체로는 너무나 훌륭하고 시적인 완성도를 갖추고 있어도 너무 난해하거나 현학적인 시는 곤란하다. 다수의 작품을 보면서 이런 안타까움을 느꼈다. 이해 반해 너무 성의 없이 인터넷 검색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시들도 있었고 표현은 요란한데 도대체 알맹이가 없는 시들도 실망감을 주었다. 문경과 문경새재라는 정해진 소재가 있는 시인만큼 그 소재를 얼마나 새로운 시각으로 형상화 시켜서 보여주는지에 심사에 초점을 맞추었음을 알린다.

 

김완수 새재엔 관문이 네 개 있다, 김겨리 문경새재를 읽다, 오영록 구름 공방, 김향숙 문경새재 아리랑, 김영욱 조령진산도를 읽다, 김국현 태양의 꽃 오미자, 이은정 순례의 영토 문경새재에 들다, 정영숙 물박달나무의 해원최종 여덟 작품을 선정하여 거듭 돌려 읽고 심사숙고 하여 대상으로는 김영욱의 조령진산도를 읽다, 우수상에는 김겨리의 문경새재를 읽다,와 김완수의 새재엔 관문이 네 개 있다로 확정했다.

 

김영욱의 조령진산도를 읽다는 다른 이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고지도 조령진산도읽어내기를 시로 이끌어온 시도가 훌륭했다. 사라진 호랑이의 존재를 통해 새재라는 공간을 단박에 신화 속의 영험한 공간으로 이동 확장시켜 놓았다. 공간의 이동을 통해 신령한 기운을 품은 호랑이의 발자국이 곧 우리의 발자국임을 상기시키고 그가 남긴 가죽은 길손들의 지름길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신화 속의 세계는 모든 것이 신성하다. 성황당의 오랜 귀목도 손을 펼친 단풍나무도 모두가 존재만으로 수호신이 된다. 이로써 새재는 보름달을 탄생시키고 장대한 산맥들을 길러내는 명당이 되었다. 아무나 찾을 수 없는 새재의 신성한 영역을 보아내고 시로 엮어낸 솜씨가 놀랍다.

 

김겨리의 문경새재를 읽다는 문경새재를 한 권의 서책으로 보고 한 걸음 한 걸음 읽어나가며 시를 완성했다. 막힘없이 읽히는 문장의 수려함이 돋보였다. 매끄럽고 적절한 표현으로 누가 읽어도 문경새재가 눈에 보이듯 아름답게 읽힌다. 자연이 발행하고 문경이 소장한 새재라는 책을 탐독하는 시인을 따라 읽는 이 누구나 함께 마음이 즐거워질 것이다. 특히 낭송을 통해 새재를 전달하기에도 아주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김완수의 새재엔 관문이 네 개 있다는 오로지 오르려고만 하는 욕심을 평생 내려놓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새재의 세 개의 관문을 통해 말하고 있다. 더 높은 곳에 오르려고 애쓸수록 내려올 때는 허무감이 큰 것이 생이지만 그래도 놓지 못하고 자꾸 오르고 싶은 것이 인간사임을 보여주고 있다. 세 개의 관문을 통과하며 그 욕심을 내려놓고 한 꺼풀 허물의 벗을 수 있음을 안도한다. 새재가 내 안에 스스로 만들어둔 또 하나의 관문마저 훌쩍 지나가게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언제든 다시 찾고 싶은 곳이 될 것이다.

 

문경과 문경새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응모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소통이 힘든 시기이지만 시를 통해 마음의 거리는 더 가까워지기를 기원해 본다.

 

심사위원 : 황봉학, 엄정옥, 박윤일, 도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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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잠 / 김겨리

 

 

고수레로 남겨 둔 홍시의 밀린 잠이 붉은 저녁이다

마당을 쓸던 노인이 허리를 굽히자 짧은 옷단 아래로 살짝 드러나는 등골,

그 깊은 계곡까지 노을이 들었다

무너지는 한쪽 벽에 봉창 달빛을 빚어 얽는 거미가

바람이 들지 않도록 거미줄을 암팡지게 엮는다

명아주 이파리 스적거림으로 창문을 단 집

구절초 꽃대로 세운 배흘림기둥에선 풍경(風磬) 소리가 향긋하다

노인이 굽혔던 허리를 펴면 가을볕이 어리광처럼 달려든다

도돌이표만 있는 가을볕은 노인의 십팔번이다

음정은 새털구름이고 박자는 떨어지는 은행잎,

아무나 풍월로 읊어도 진양조 장단

지붕엔 말표고무신 한 짝이 노을로 배꼽만 덮고 누워 있다

갈기털 다 빠진 목덜미에 솟대 그림자를 괴고 잠든 말굽은

아직도 따스한 발걸음을 기억하며

지붕에 올라가 누구를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긴 한숨을 쉬는 노인의 호흡이 가늘게 떨린다

허공에 써 놓은 점자로 되짚어 가는 길에도

과속방지턱이 있는지 바람도 잠시 주춤하는 법인데

어느새 성성해진 백발과 그믐달만 뜨는 눈썹

슬하에 노을 닮은 은행나무 한 그루만 달랑 둔 노인의 가계(家系)

입술에 허옇게 일어나는 각질을 옷소매로 쓱 훔치니

노을이 찍 묻어난다

노인의 등뒤로 달이 뜬다 어쩌면, 오늘밤

은행잎 한꺼번에 다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뜻

노을의 끄나풀이 길다

 

* 진양조 장단: 판소리에서 가장 느린 박자

 

 

 

 

분홍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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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참 아렸던 시간들정갈한 보폭으로 걸어갈 것

 

업무회의 중에 당선 통보를 받았다. 잠시 숨이 고르지 않을 때 창밖엔 혹한에 끌려가는 바람의 이마가 보였다.

 

지금은 오히려 내가 그 무엇인가에 의해 여기까지 이끌려 온 것 같은데, 무엇이었을까. 12월의 침엽(針葉)은 날카로웠지만 뭉툭한 그 무엇을 찌를 수는 없었다. 나를 들춰내는 일이란 참으로 아린 일이었다.

 

침잠해지는 시간이면 습관처럼 끼적이던 습작들을 꺼내놓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저 여린 살갗으로 무엇을 치대고 누구를 감싸안을 수 있을까. 종내 허기진 등골처럼 움푹 파인 상념으로 자판에 올려놓은 손가락들이 가늘게 떨리곤 했다.

 

가끔씩 머리맡에 쌓이는 잠들을 흔들어 깨우다 내가 잠들곤 했다. 검은 비닐봉지로 나무젓가락으로 구겨진 종이컵으로 가위눌리던 시간들. 빈 들에 서 있는 허수아비가 떠올랐다. 바람을 견디고 이슬을 견디고 어둠을 견디는 것보다 더 힘겨운 건 내가 빈 들의 일부도 되지 못한다는 거.

 

내 시의 여백이 되어주신 홍··심 시인과 당진 시인들께도 감사드리며, 아내와 군복무 중인 두 아들, 어머니, 항상 뭉클한 감동입니다. 모든 지인들께 소박한 덕담이고 싶은 겨울, 얕은 시심을 헤아려 주신 농민신문사와 손해일· 황인숙 심사위원님께도 감사드리며, 이제부터 내딛는 한발 한발 정갈한 보폭으로 걸어가겠습니다.

 

 

 

 

나무가 무게를 버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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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각·청각·촉각 생생풍부한 언어구사 인상적

 

총 열여덟명의 작품이 본심에 올라왔다. 전반적으로 농촌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많았는데, 자연 풍광을 그리기보다 사소한 자연 하나하나를 씨앗으로 사람살이를 싹틔워 형상화하려는 자세가 마음에 와 닿았다. 다들 알다시피 농촌의 삶이란 평화롭기만 한 게 아니라 고된 것이고, 그 고된 만큼의 보상은 없어 소외감과 박탈감을 느끼기 쉬운 것이다. 그로 인한 서글픔이나 분노와 절망감을 세월호 등으로 외연을 확대한 작품, 그리고 현란하나 발랄한 어법으로 자신의 내면에 집중한 작품도 눈에 띄었다.

 

최종심에 오른 이는 김학중·조미희·장서영·이복희 등 네명이다. 모두 시 쓰기가 몸에 익은 솜씨로 저마다의 삶의 결을 보여주는 바여서 당선작 하나를 고르기는 지난한 일이었다. 재치있는 어법으로 말을 꼬고 비트는 조미희의 언어에 대한 감수성, 감칠맛 나게 시어를 운용하는 장서영의 우아하고 발랄한 정신, 오브제(사물)마다 생의 질척거림을 겹쳐 보여주는 이복희의 웅숭깊음, 제쳐두기 아쉬운 이들의 재능은 언제라도 빛을 볼 것이라 믿는다.

 

당선작은 김학중의 <분홍잠>이다. 가을 정취 물씬한 농촌 풍경을 배경으로 홀몸어르신의 하루 일상을 담았다. 내용이나 시어를 군더더기 없이 길게 끌고 나가는 힘이 있다. 줄글인데도 운율이 만져질 듯하다. 즉 언어구사가 풍부하고 내재율이 있는 시다. 농촌 홀몸어르신의 외로움과 그리움이 시각 청각 촉각에 생생히 스치는 듯하다. 배경은 농촌이지만 홀몸어르신 문제가 어찌 농촌만의 문제일까.

 

시적 대상에 제 감정을 흘리지 않고 객관적 거리를 두어야 독자를 보편적 감정으로 이끈다는 걸 익히 아는 시인이다.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손해일 시인,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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