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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역 / 김재근

 

어디까지 갈지 모른다는 거
하루 벌어 하루 산다는 거
마른 겨울빛 받으며 벌 서고 있는 나무같이 견디는 거, 아닌가

구포역, 휘파람 불며 기차는 몰려오고
사람들은 낙엽처럼 또 부서져 내린다
찬바람 부는 광장구석 어깨 구겨져 서성이면
비릿한 무엇이 목 어디 가시처럼 걸리고
야산 겨울숲 너머로 하루해가 풀썩 지고 있다

늦은 역광장은 묘지처럼 이제 적막하다
빈 소주병은 시린 기억들을 꽉, 채우고 뒹굴고 있다
꺼져가는 모닥불 옆 용도폐기된 라면박스와 신문지에 쌓여
사내는 잠이 들고

작은 불빛들이 다가와 사내의 이마를 만진다
깜박이는 노숙의 굽은 등대, 상처여
이 후미진 외곽이 그대의 둥지였구나
물새의 알, 깨어진 알이여

바람과 겨울바다를 건너 그대가 흘린 모래알
나의 무릎에서 어지러이 날아오른다
첫 차가 오고 있다
어디까지 갈지 모르는 그대와 나의 겨울을 태우고
목쉰 기적 소리 오래 울리며 떠나고 있다

 

 

 

 

무중력 화요일

 

nefing.com

 

 

[당선소감] "붉고 깊은 거친 바다속으로"

해지는 바다에 서 있었습니다. 물기 빠져나간 갯벌과 몰려오는 파도 소리, 작은 고동들과 함께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일몰 속에서 목선들이 남해 쪽빛 바다에 떠 있었고 작은 물새들이 섬들 사이로 떠올랐습니다. 평화로웠습니다. 그 때 당선을 알리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일순 남해 바다에 저는 섬인 듯 바람소리와 갯내음 안에서 한참을 그저 바다만 보고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 김수영 시집을 들고 해운대 바다에서 모래알을 뒤적이며 밤을 새던 일, 무작정 비오는 밤이면 빗물을 따라 걷던 일, 시가 무얼까? 나의 글이 시가 될까? 어떻게 살아야하나, 이런 생각으로 많이도 방황하던 일들이 갯내음처럼 묻어나옵니다.

대학은 국문과를 못가고 토목과를 갔습니다. 그러나 천형과도 같은 나의 역마와 그리움은 현실 속에서 늘 허우적거렸고 나는 늘 주변인이었습니다. 가슴 한 쪽에 부는 바람은 늘 차가왔고 가난하였으며 우기의 빗소리처럼 질기고 흐렸습니다.

내 안에 끓고 있는 그 미지의 아픔들을 조금씩 꺼내어 글로 적어보았습니다. 처음엔 나오지 않으려 안간힘쓰던 잡히지 않던 시어들이 하나 둘씩 눈물에 찍혀 나오곤 했습니다. 아파서 시를 썼지만 시를 쓸수록 더 아파서 시를 포기한 적도 있었지만 시는 저의 위안이었으며 저의 전부였습니다. 모든걸 다 잃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무작정 구포역에서 케티엑스를 타고 서울역까지 갔었습니다. 비오는 서울역 벤치에 앉아 비 맞으며 젖은 담배를 한 대 태우고 다시 내려온 적이 있습니다. 가장 짧고 먼 여행이었습니다. 이제 오래 머물러 있고 싶습니다.

부족한 글에 눈을 맞춰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고개숙여 감사드리며, 누가 되지 않게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진정한 시는 온몸으로 울어야하고 미쳐야 하는데 아직 서툴고 낯섭니다. 시(詩)라는 붉고 깊고 거칠고 멋있는 바다에 한 발을 담궜습니다. 그리운 성산포의 제주, 시백(詩伯) 이생진님의 '고독'이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제주 푸른 바다에서 저는 이제 취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심사평] 눈물 도는 주지적 서정 풍요로워

너무 많은 응모 편수에 '놀랐다'고 하면 화두가 될까? 시가 무슨 소용이 되느냐고 따따부따 말들 하다가 이제는 아무런 말조차 없어져 가는 이 불모의 시대에 응모작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한라일보의 신춘문예가 18번째를 맞으면서 전국적인 신인 등용문으로 자리 잡았음을 확인시켜주는 한편 아직 우리 시가 일궈야 할 황무지가 많음을 은밀하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고, 상말로 '아직 우리 시는 죽지 않았어!'하고 뻐길 수조차 있을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인간의 혼이 언어라면 언어의 혼은 시이기 때문이다.

6백 편도 넘는 시들 가운데 10여 예비시인(?)들이 쓴 50여 편의 시가 골고루 뛰어났다. 선자는 선자로서가 아니라 독자로서 시를 읽는 행복을 오랜만에 맛보았다. 초등학교 5학년 어린이의 동시에서부터 육순의 노인네가 쓴 전국 곳곳에서 응모해 온 시편들. 물론 아직 너무 설익은 시들도 있었다. 그러나 많은 응모자들의 시들이 읽을 만 했다.

우선 10편을 뽑았다. 김서윤의 <2월>, 한여운의 <장마>, 유행두의 <헛제삿밥>, 강미화의 <대장장이>, 김은실의 <두엄>, 고경숙의 <자하문 밖 열쇠수리공>, 문정희의 <수목원 은행나무>, 이혜경의 <졸음운전>, 위명희의 <거울 앞에서>, 김재근의 <구포역>- 이 시들이 보여주는 시의 세계는 각각 다르지만 '눈물 도는 주지적 서정의 풍요'로 선자에겐 읽혔다. 모두 당선작으로 뽑았으면 좋을 만 하다.

최종심에 오른 김서윤의 <2월>과, 김재근의 <구포역>을 두고 몹시 고심했음을 밝혀야겠다. 김서윤의 시들은 기성시인 못지않게 이미 뛰어난 경지에 올라 있다. 마침내 김재근의 <구포역>을 뽑는다. 이 작품 말고 <달팽이집>을 뽑을까도 했지만 <구포역>풍경이 어쩌면 오늘날 우리의 모습으로 어른거려 그 감동을 지울 수 없다. 평범해 보이지만 뛰어난 은유적인 언어 구사력, 견고한 시의 구조, 따뜻한 현실의식도 높이 샀다. 이 시에 대해 무슨 군더더기 말을 더 보태겠는가. 더욱 정진하시라!

심사위원 문충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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