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잠 / 김은실
황사를 빠져나오자 나의 행방은 나무들의 습성을 닮아간다
뒤를 돌아보면 오롯이 되살아나는 잎새들의 발자국
기린처럼 도시를 넘겨보거나 하루의 마지막 햇살들을
꿈인듯 곱씹어간다
사막이 될 사랑과 목마름 하나로 건너야 할 기억의 행방을
찾아내는 것
나무들의 소문이 심상치 않다
뿌리째 뒤적여도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해묵은 반란들,
나이테들의 구석에 처박혀 잠이 들거나 이루어지지 않을
불면의 등성이들을 오르내린다
숨이 가빠지고 발목이 푸르러진다
누군가 적어놓은 유서들의 단서를 찾는 동안
문맹의 슬픔이 불어온다
심장의 한 켠에 푸른 병조각이 들어차고
이 도시에선 어떤 나무이든 술의 날들을 깨뜨리지 않으면
조금씩의 간격도 좁혀지지 않는 것이다
황사를 빠져나오자 나의 의문들은 나무들의 틈바구니에 묶인다
어제의 위치와 잎들의 수런거림이 나를 가둔 채
숲 저쪽으로 사라진다
오후의 통화와 몇개의 망각이 푸른 위궤양을 앓는다
기린처럼 목을 늘려도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오월의 잠들,
계단을 타고 오르는 몇개의 잎새들을 상상하면서
나는 누군가 녹이다 만 박하사탕같은 사랑을 되짚어간다
[당선소감] '섬 안 이야기들 새로이 풀어낼 것'
실로 오랫만의 시인이다.
구름을 쫓거나 들꽃들의 길목을 지키는 동안에도 목마름은 그치지 않았고 섬, 꿈으로부터 망명하듯 달려온 것이 또다른 문제였다.
섬의 곳곳은 잃어버린 시의 시간들이 되어갔고 때로 파도들의 끝에 이르러서는 시에 대한 멀미는 더욱 가까운 맥박소리처럼 깨어났다.
서울은 점점 아득해졌고 기억의 시침들은 몇 계절의 힘으로도 힘없이 휘어졌으리라.
굴절된 시간의 페이지를 넘기는 사이 섬 안의 새벽과 노을이 조금씩 밀물과 썰물로 뒤바뀌는 질서를 배우게 되었고 겨울산과 낯선 말들의 골짜기를 헤매는 사이 가슴 한 켠에 묻어나는 푸른 반점의 비표, 그게 시였으리라. 서울을 떠나며 영영 헤어질거라 단정했던 시가 나보다 더 깊은 섬을 헤매고 있었음을….
이제 꿈을 꾼다는 건 또다른 종류의 부채감이다. 자유롭던 공상, 무수한 밤들이 부려준 섬 안의 이야기들도 새로운 등잔 새로운 불면 속에서 밝혀내야 하리라.
인연이란 참 오래된 전생같다. 까풀까풀 희미해지던 가슴 속 오두막 하나 그리움의 더듬이로 찾게 해준 차령문학의 박경원 선생님. 이젠 좀 더 제 몫의 방식으로 깨있는 법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늘 이면의 표정 속에서 낯선 행장과 밀행하던 나를 알아 보신 강화문학회와 최 회장님, 차소담 박은혜선배 문지수 황인호후배 그리고 그동안 함께 했던 몇몇 분들…. 내 안의 분신인 훈, 혁과 함께 기쁨을 나누며 뽑아주신 선생님들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심사평] '한줄기 사랑 놓지않으려는 당당함'
시(詩)가 말(言)의 사원(寺)이라고 할 때, 그것은 사유와 언어의 적절한 긴장을 담보하는 의미일 것이다. 시가 다른 글쓰기보다 얼마간 힘들고 신중하게 여겨지는 것도 바로 그 긴장의 밀도가 유다른 데서 연유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좋은 시란 그 숨 막히는 긴장을 잘 견뎌낸 결과물에 다름 아니다.
2008 한라신춘문예 시부문은 1백50명이 넘는 많은 분들이 응모하여 풍성한 말의 성찬을 이루었고, 나름대로 각각의 솜씨들을 뽐내고 있었으나 아쉽게도 언어와 사유의 긴장을 잘 견뎌내고 있는 작품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어느 정도 가능성이 보이는 작품들은 김경애, 김은실, 김일호, 명순이, 송정애, 이언지, 정두섭 제씨의 것들이었다. 이분들은 시적 구성이나 언어를 다루는 기술에서 일정한 성취를 보여주고 있었지만, 반면에 사유를 끌어가는 힘과 긴장의 밀도 면에서 각기 일정한 한계를 갖고 있었다.
그 중 사유의 깊이와 언어의 긴장에서 김은실씨의 '오월의 잠'이 조금 더 돋보였다. '오월의 잠'은 권태와 절망의 팍팍한 삶 속에서도 한 줄기 사랑을 놓지 않으려는 자아의 의지를 담담하게 그린 작품으로써 구성의 탄탄함과 신선한 비유가 뛰어났지만 부분적으로 모호한 진술과 맥락의 불분명함 때문에, 그리고 다른 작품들의 완성도가 부족한 점도 고려하여 아쉽지만 가작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심사자가 인색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후일을 위한 격려 차원임을 이해하여 정진을 바란다.
심사위원 김승립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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