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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모자를 선물할게요 / 신영배



그 끝에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혼자
그 옆에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밟힌,
여린 껍질을 가지고 있던 것
그 위에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수풀 속에 숨은 소녀
소녀의 눈동자 앞에
끌려가다 벗겨진 신발이
다른 세상에 놓이고
한쪽은 신발을 찾을 수 없는 꿈속
그 속에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슬픈 맨발 위에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그녀들은 달려와 나의 시들을 헤치죠
가져갈 것 하나 없다고 투덜거리죠
나는 시-옷을 입고 있어요
걸칠 것, 그거라도 가져가야겠다고
그녀들은 내 옷을 다 벗겨 가죠
물모자
그 옷에 딱 어울리는
이 물모자요
나는 그녀들에게 달려가요

시-옷은 걸쳐도 알몸이에요
그녀들은 울어요
우는 알몸 위에 물모자
선물할게요
나도 울어요
수로에 알몸으로 처박혔던 그녀와
폭우 야산에서 알몸으로 흘러내렸던 그녀와
화면에 뜨고 돌아다니는 알몸과
버려지고 어두워지는 알몸과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당신이 도는 길목에서
파도가 칠 거예요
노래처럼요
문 뒤엔 꽃과 바다를 놓을게요
물모자를 쓰고 문을 여세요
바람은 물모자 속에서 잠잠 해요
뒤집히지 않는 단어를 하나 가지세요
연주를 해야 하는데 손가락들이 사라진 밤이 있어요
달빛 위에 살짝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건반 위에서 흰 달을 쳐요

시-옷을 입은 내가
시-옷에게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혼자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암이 재발할지 몰라요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달밤엔 달을 따라 움직여요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당신은 한창 시도 씹어 먹을 나이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나를 따라온 길고양이 내가 따라간 길고양이
길을 물로 바꾸고 나는 물고양이
강가에서 탁 꼬리를 세워요

예쁘장한 단어도 하나 가져요
지금은 물모자를 쓰는 계절인걸요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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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공모전에 당선된 작가께서 출간한 시집을 소개합니다.

 

 

 

[수상소감] "焦土 위에서 쓰는 시를 생각하겠습니다"

 

수상 소식을 듣고 작은 시집을 안아주었습니다. '물모자를 선물할게요'는 소시집으로 기획된 정말 작은 시집입니다. 그 작은 시집에 큰 상이 주어지다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시집을 어디에 놓아두었는지 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찾았고 안아주었습니다.

작은 시집을 쓰며 작은 발을 생각했습니다. 시집에 작은 발이 달려서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어딘가에 닿을 수 있다면, 아마도 아픈 누군가일 것이며 따듯함이 필요한 어디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발은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시집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요.

시집을 쓸쓸한 곳에 놓아두었습니다. 누군가 나앉은 길가나 부서진 계단 위, 누군가 실종된 지하도나 야산, 혼자 쓰러진 바닷가나 그 의자 위…… 시를 쓰는 제 방의 지도였습니다. 그 지도를 펼치고 시집을 옮겨달라고 주문을 외우기도 했습니다. 그런 시들이 몇 개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 또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시집을 어디에 놓아두었는지 잊고 있었습니다. 시집을 옮겨야 하는데, 시를 써야만 할 수 있는 그 일인데, 저는 어둠 속에 막막하게 서 있었습니다. 이 상의 소식은 누군가 그 작은 시집을 살짝 옮겨주었다는 소식 같았습니다. 시를 향한 마음들이 모아준 격려를 잊지 않겠습니다.

이 상을 받고 제 시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구상 시인은 표현 기교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기어(綺語)라고 하여 경계하였습니다. 이 상이 저에게 짚어주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물을 들여다보듯 그 지점을 들여다보겠습니다.

막막한 시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초토, 불에 타서 검게 그을린 땅입니다. 구상 시인의 '초토(焦土)의 시'는 1950년대 전쟁으로 인한 암울한 세상을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마주한 세상도 그 초토와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상의 무게와 함께 이 초토 위에서 쓰는 시를 생각하겠습니다.

 

 

 

물안경 달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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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견고한 현실 탐색 풍부한 암시와 의미 몽환적 은유로 빛나"

 

영남일보 구상문학상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열 분의 시집 중 김현의 '호시절'(창비, 2020), 신영배의 '물모자를 선물할게요'(현대문학, 2020), 유병록의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창비, 2020), 유계영의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문학동네, 2019) 등을 최종 후보작으로 지명했다. 이 시집들이 높은 시적 성취와 더불어 저마다의 개성이 잘 드러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긴 논의 끝에 신영배 시인의 '물모자를 선물할게요'를 제4회 영남일보 구상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다만 유병록 시인이 보여준 고통의 핍진성이나 김현 시인의 거침없고 발랄한 상상력도 문학상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져 아쉬움을 남겼다. 두 시인의 수상을 다음으로 미룬 것은 수상자와 견줘서 상대적으로 젊고 미래에 더 큰 상을 받을 기회가 있을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신영배 시인의 시는 고립과 고독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독자적인 계보를 빚는데, 그 누구와도 닮지 않은 높고 깊은 상상력이 빚어낸 몽환적인 은유로 빛난다. 시의 화자(話者)는 물모자를 쓰고 거울을 보고, 커피를 내리고, 물구나무를 선다. 누군가 달빛으로 의자를 만들면 강물이 의자 속으로 들어간다. 원피스를 입고 왈츠를 추던 소녀들은 나무속으로 들어가거나 장미에 빠진다. 그 마술적 리얼리즘의 원천은 멀고 아득해서 짐작조차 어렵다. 시인이 펼치는 '물모자의 세계'는 물모자를 쓰고(혹은 썼다고) 상상하는 세계일 뿐만 아니라 결국 '찾을 수 없는 시집' '빗물과 흐르는 시집' '노을보다 멀리 가는 시집'을 찾아가는 고독한 여로에 귀속되는 것이다. 물모자의 세계는 현상 세계의 바깥에서 안쪽으로 들어오는 문턱에 걸쳐져 있다.

'사이'의 공간은 이쪽도 저쪽도 아니다. 심판과 결정이 유예되는 곳, 내일도 아니고 어제도 아닌 곳이다. 시인은 그 '사이'에서 물모자를 쓰고 물구두를 신고 이동하는 뮤즈들을 관찰한다. 세계의 바깥 그 어딘가 있는 세계 혹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세계. 그곳에선 부재하는 현실에 한 줌의 환상을 뒤섞어 빚는 몽상과 은유가 부풀고, 천진하고 사악한 동화가 펼쳐진다. 그곳도 암이 재발하고 약한 자가 짓밟힌다는 점에서 현실의 고통과 그늘을 반영하는 듯하다. 신영배 시인의 수수께끼 같은 상상력이 빚는 물모자를 쓰고 움직이는 뮤즈들에 탐색과 관찰이 현실에 대한 풍부한 암시와 의미를 머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의 무게를 견딜 만큼 충분히 깊고 견고하다고 판단해 제4회 영남일보 구상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심사위원 안도현, 장석주, 엄원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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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에 관한 연구 / 하재연


초가 완전히 녹아버린 후 촛불의 빛은 어떻게 되는지
일요일의 흰빛이 월요일 쪽으로 사라져갈 때

빛이 사라진 지구가 혼자 돌고 있는 밤을 생각한다.
지구는 그때부터 처음의 방식으로 고독해지겠지.
굿바이,
하고 인간들에게 인사를 하고
정말로 우주적인 회전을 하게 될 것이다.

빛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묻지 않고
빛이 어떻게 사라지는지 연구하는 사람을
사랑한 적이 있다.
그도 빛과 함께 사라져서,
우주적인 안녕을 해야만 했고

나는 다시
먼지처럼
이곳저곳에 묻어 있다가,
쓱 닦이곤 했다.

흘러넘쳤던 빛의 입자들은
공중으로 높이 올라가다 생각난 듯 한 번 반짝였다.

그러고 나서는
영원히 보이지 않는 음이 되어
세계의 투명한 공기를 짙게 한다.

*"초가 완전히 녹아버린 후에 촛불이 어떻게 되는지"―루이스 캐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우주적인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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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간곡한 이들이 함께 한다고 소리내 불러줘 고맙습니다"

 

눈의 여왕에게 매혹되어 얼음 궁전에 갇힌 소년 카이는, 얼음 조각들을 맞추어 하나의 단어를 완성하면 풀려날 것을 약속 받습니다. 단어가 완성됨과 동시에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도 함께였습니다. 그러나 카이는 한 마디 단어를 맞추어 내는 데 계속해서 실패합니다. 소년이 절대로 완성할 수 없었던 하나의 낱말은, '영원'이었습니다.

북극으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습니다. 그곳은, 정말이지, 추웠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더 아름다웠습니다. 살아 있음의 불가능성이 얼음송곳처럼 파고 들어와, 간곡하게 삶을 떠올리려고 노력해야만 하는 곳이었습니다. 눈 폭풍으로 인해 시야와 방향의 감각을 잃어버리고 백맹(白盲)이 되어 버리는 북극에서는, 새들도 하늘과 땅을 구분하지 못해 지상으로 곤두박질친다고 합니다.

시를 쓰는 어떤 밤들이, 눈의 여왕에게 붙잡혀 결코 완성할 수 없는 낱말을 맞추기 위해 애쓰고 있는 시간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내가 쓰고 있는 시들은 곤두박질친 새의 날갯짓처럼, 방향을 잃어버리기 일쑤입니다.

수상 소식에 잠시 눈 폭풍이 잦습니다. 건너편에서 따뜻한 불빛이 비추고 사람의 다정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혼자 애쓰고 있는 게 아니라, 간곡한 이들이 함께하고 있는 거라고, 소리 내어 이름을 불러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 시가 홀로 곤두박질치지 않게 같이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세차게 앞을 가로막는 눈 병정들을 헤치고 나아간 소녀의 씩씩한 발걸음이 잊히지 않습니다. 다시 사방이 막막해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때,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에서부터 영원을 살라고 한 구상 시인의 시를 떠올리겠습니다.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진 어느 산골짝 옹달샘 물 한 방울에 닿은 시인의 눈길과,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연대를 기억하겠습니다.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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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사라짐·어긋남에 대한 우주적 감각, 성찰의 시선 열어줘"

 

예심을 거쳐 올라온 등단 10~20년차 시인들의 시집 10권은 다채롭고 풍요로운 상상력,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의 시선을 보여주는 좋은 시집들이었다. 독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시를 읽는 설렘과 기쁨에 흠뻑 빠져들었음을 새삼 고백해야겠다.

좋은 시집이 많았던 만큼 심사 과정은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본심에서 집중적인 논의의 대상이 된 시집은 네 권이었다.

각자 개성이 다르고 이미 탁월한 경지에 오른 시집들 중에서 단 한 권의 시집을 수상작으로 고르는 일은 즐겁다기보다는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신동옥의 '밤이 계속될 거야'는 짧은 시가 보여주는 밀도와 긴 시가 보여주는 유려한 문체와 진중한 사유가 균형을 이룬 시집이다. 삶의 체험이 녹아 있는 자리가 특히 매력적이었고 사회적 상상력으로 확장되는 시선에서 깊이가 느껴졌다.

임경섭의 '우리는 살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는 이야기와 스타일이 매력적인 시집이다. 시에서 서사를 활용하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큰 줄기의 서사에서 묘하게 다른 감각으로 포착한 소소하고 아무 것도 아닌 이야기가 매력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정다운의 '파헤치기 쉬운 삶'은 강렬한 정동을 내뿜고 있다. 일상에 만연한 허위와 폭력과 위선을 거침없이 폭로하고 파헤침으로써 당혹스러움이 매혹으로 바뀌는 순간을 경험하게 해 준다.

하재연의 '우주적인 안녕'은 사라짐과 어긋나는 시간에 대한 감각을 예민하게 열어가며 우주적으로 확장해, 인간을 성찰하는 개성적인 시선을 보여준다. 이 땅에서의 수많은 죽음을 경험하고 나아간 자리라고 할 수 있는 우주적 상상력과 우주적 시선이 인간 존재에 대한 새로운 감각과 성찰의 시선을 열어주고 있었다.

세 명의 심사위원이 두 시간 가까이 심사숙고한 끝에, 첫 시집부터 지속적으로 우리 시의 새로운 감각을 예민하게 확장하며 개성적인 시세계를 구축해 온 하재연의 세 번째 시집 '우주적인 안녕'을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두 개의 영혼 사이에서 부서지는 인간의 마음'을 겪은 시의 주체가 '희미한 빛'(화성의 공전)을 찾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하재연 시인에게 축하의 말을 건넨다.

 

심사위원 최정례,조재룡,이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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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聖) 토요일 밤의 세마포 / 정한아

 

여기 구겨진 울음이 찍혀 있으니
자기 멱살을 잡고 자기를 물 밖으로 끌어내는 사람처럼
끝내 그는 자기 밖으로 새어나갈 수 있을까

아직도 그는 고백이 부끄럽고
고백이 부끄럽다는 이 고백이 누가 될까봐
빨간 얼굴 속에 눈 코 입을 묻어놓고
그는 또 묻는다
물음을 벗어나는 일의 가능성과 의미에 관하여
그의 질문과 상관없이 그의 무덤 안에 떠도는 저 먼지 하나하나까지도
남김없이 등록되는 오늘의 치밀함에 관하여

지금은 작성되고 싶지 않아
실현된 계시의 일부가 되고 싶지 않아
답을 바라서가 아니라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이 빨간 망설임 때문에

비로소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차 소란한
귀먹을 듯한 적요 속에서

끝내 그는 그를 자기 질문에 답으로 내어놓을 수 있을까
그의 얼굴이 그의 입에 먹히기 전에
고백하자면
고백이 그를 그 아닌 것으로 붙박아 놓을까봐
통성(通聲)으로 증언으로 누가 될까봐

먼지는 사람이 되고 사람은 다시 흙이 되지만
아무도 그 전 과정을 지켜볼 수 없으니
그래서 불러보는
과학자, 시인, 하느님
존경해마지않는
나이가 무지하게 많으신 분들이여

될 수 있으면 그의
수치와 졸렬은 무시하시고
그의 빨간 얼굴에서
그의 골격과 날마다 쇄신하는 죄악의 대략과
그의 영혼의 방사성 동위원소와 탁도(濁度)와
찌그러진 눈 코 입의 윤곽을 어서 발본해내소서

거기 누가 구긴 울음이 음화(陰畵)로 찍혀 있다
자기를 용의선상에서 제외하지 않으려고
그는 밤새 자기 지문을 외고 있으나

아무래도 낯선 소용돌이여!
이 정황의 출구는 어디에 있는가
자기도 모르게 신비는 어떻게 유출되는가
이제 곧 성사(聖事)가 시작된다

 

 

 

 

 

울프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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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구상 선생 詩에 담긴 ‘비극 아는 자의 명랑’ 기억할 것”

 

크리스마스이브에 수상 소식을 들었습니다. 크리스마스라고 특별할 건 없었습니다. 학생들의 성적을 처리하고 있었는데, 사실은 수상 소감을 쓰는 이 시각에도 그것이 끝나지를 않았지요. 성적 처리 마감 전날인 오늘, 성탄절 아침에 “오늘 안에 보고서를 내지 못하면 한 학기 수업이 도루묵이 된다”는 협박 문자를 적지 않은 학생들에게 보내야만 했습니다.

저도 그런 연락을 받은 일이 있었거든요. 쓴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압도되어서 시작도 못 하고 긴장성 두통으로 목이 뻣뻣해진 상태로 불가피하게 포기하게 되기를 기다리다가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전화를 받은 적이 말입니다. 마음은 동물인데 몸이 식물적으로다가 움직임을 최소화하는 저는, 실은 그런 일이 아주 많았습니다.

어제 받은 수상 소식이 어째서 가장 두려운 그런 마감 독촉과 비슷하게 여겨진 것일까요. 저는 상을 받게 되었는데 말입니다. 돌아보면 그런 독촉 전화들은 결국 아주 다행스럽고 고마웠지요. 당근을 받았는데 채찍을 맞은 듯 구는 것은 겸허하지 못한 일입니다.

심사위원 여러분과 제 부끄러운 시를 읽어주신 모든 독자 여러분, 쓰러진 당나귀를 때려준 모든 채찍들에 감사합니다. 시 따위와 담 쌓고 살지만 마음에 시의 씨앗을 품고 있는 훨씬 많은 분들께도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구상 선생님의 영원에 대한 희구와, 지상에 대한 연민과, 무엇보다 그분이 시에 구구절절 남겨놓으신, 비극을 아는 자의 명랑을 잊지 않겠습니다.

 

 

 

 

어른스런 입맞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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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자본주의의 문제 제기…현실과 진실의 極點 향해 폭주”

 

올해 2회를 맞이하는 영남일보 구상문학상 본심은 2016년 12월부터 2018년 11월 사이에 출간된 7권의 시집을 대상으로 하였다. 등단 10년에서 20년 차에 이르는 중진 시인들의 시집은 현재 한국 시단의 흐름을 압축해 놓은 듯 다채로운 진풍경을 연출하고 있어 시 읽기의 즐거움을 흠뻑 느낄 수 있게 했다.

이 즐거움은 심의 과정에서는 곤혹스러움으로 바뀌었다. 수상작으로 부족함이 없는 탁월한 시집들이 많아 선택의 괴로움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한아의 두 번째 시집 ‘울프 노트’를 구상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기에는 미시적이고 개인적인 것에 대한 탐구 혹은 탐닉, 감각과 감정에 대한 과도한 집중, 내적 필연성이 부족한 시적 기획 등 최근 시단의 우려스러운 현상에 대한 반발이 일부 작용하기도 했다.

정한아의 ‘울프 노트’는 사회학적 통찰을 바탕으로 자본주의의 묵직한 문제들을 진지하게 제기하면서도 새로운 시적 장치와 발화 형식을 가동하고 있다. 텍스트들의 풍부한 상호성이 새로운 목소리와 스타일을 만들어 내고 있고, 놀이와 사유가 어우러져 있으며, 그 저변에는 한국사회의 추악한 ‘죄’들을 해부하는 예리한 메스가 감추어져 있다.

특히 ‘울프씨’ 연작은 독특한 캐릭터와 극적 양식을 채택해 단순한 실험성을 넘어 시적이며 정치적인, 더불어 시적이어서 정치적인 시의 탁월한 예를 성취하고 있다.

이 시집은 폭발하는 에너지를 감당할 수 없다는 듯 현실과 진실의 극점(極點)들을 향해 폭주하면서도 아주 서정적인 일도 동시에 하고 있다. 김수영의 요소가 섞여들어 있는가 하면, 누구의 독자도 제자도 공조자도 아닌 ‘시인 정한아’의 단독 시적 투쟁이 철저히 관철되면서 독보적인 시세계가 구축되고 있다.

부서지고 썩은 현실의 지옥에서 정한아가 빚어내는 시들이 “녹슬지 않고 구부러지지 않는 강철”(‘대장장이의 아내’)의 시로 계속 연단되기를 빌며, 정한아 시인에게 축하를 보낸다.

 

심사위원 장석남, 나희덕, 김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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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이라는 약 / 오은

 

 

오늘 아침에 일찍 일어났더라면

지하철을 놓치지 않았더라면

바지에 커피를 쏟지 않았더라면

승강기 문을 급하게 닫지 않았더라면

 

내가

시인이 되지 않았다면

채우기보다 비우기를 좋아했다면

대화보다 침묵을 좋아했다면

국어사전보다 그림책을 좋아했다면

새벽보다 아침을 좋아했다면

 

무작정 외출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그날 그 시각 거기에 있지 않았다면

너를 마주치지 않았다면

그 말을 끝끝내 꺼내지 않았더라면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 닦아주는 데 익숙했다면

뒤를 돌아보는 것보다 앞을 내다보는 데 능숙했다면

만약으로 시작되는 문장으로

하루하루를 열고 닫지 않았다면

 

내가 더 나은 사람이었다면

 

일어나니 아침이었다

햇빛이 들고

바람이 불고

읽다 만 책이 내 옆에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만약 내가

어젯밤에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유에서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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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공모전에 당선된 작가께서 출간한 시집을 소개합니다.

 

 

 

[심사평] 평범한 일상 시인의 감각으로 재구성해 실증적 담론 구현

 

올해 처음으로 구상 시인의 문학세계를 기리기 위해 제정한 구상詩문학상의 본심에 오른 다섯 분 시인의 시집을 다시 촘촘하게 읽어보는 시간은 지금 우리 시단의 허리쯤 되는 현재를 살펴보는 일이기도 했다. 등단 10년에서 20년 사이에 있는 비교적 젊은 시인들의 시를 본상 후보로 추천하고 선정한다는 의미 있는 기준에 걸맞은 시인들이 본심에 올랐다.

본심에 오른 다섯 분 시인의 시집은 김미령의 ‘파도의 새로운 양상’, 김이듬의 ‘표류하는 흑발’, 박성우의 ‘웃는 연습’, 오은의 ‘유에서 유’, 이근화의 ‘내가 무엇을 쓴다 해도’이다. 모두 다양한 상상력과 함께 자기만의 확고한 시세계와 시적 화법을 가지고 있는 시인들로 한두 시인으로 쉽게 압축되지 않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오랜 논의 끝에 오은의 시집 ‘유에서 유’를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이근화의 시를 이제는 더 이상 낯선 화법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담백하고 절제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뜨거운 감정들이 내재되어 있다. 일상적이되 일상을 넘어서는 시적 세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언어 감각이 한층 심화되었다. 김이듬의 시는 여전히 거침없고 도발적이고 약간은 위악적이지만 다정하고 따뜻한 출렁임이 생겨났다. 어떤 시적인 제스처도 없으며 단호하지만 보다 유연해졌고 이 세계를 보다 깊이 이해하고자 한다. “사람의 꿈은 한층 더 사람으로 살다 죽는 것”이어서 자신과의 싸움을, 언어와의 싸움을 멈추지 않고 더 치열하게 밀고 나가리라 기대된다.

오은은 무엇보다 언어에 대한 자의식이 확고한 시인이다. 역동적 상상력과 재기발랄한 말놀이라고도 볼 수 있는 언어감각은 평범한 일상을 시적 사건으로 미끈하게 재구성해 내며 언어에 대한 실증적인 담론을 시로서 구현해내는 부단한 작업을 실행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지적인 언어의 사유를 넘어서는 자기점검이 필요한 시기가 오지 않았나 싶다.

대중적 언어가 아님에도 독자들의 호응이 적지 않고 독특한 시법으로 주목 받고 있는 패기 있는 시인 오은을 첫 회 수상자로 선정한 이유 중 하나는 앞으로 구상詩문학상의 개성과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수상을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송찬호, 조용미, 홍정선

 

 

 

 

호텔 타셀의 돼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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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구상詩문학상 시상식과 2018년 영남일보 문학상 시상식이 12일 오후 5시 영남일보 대강당에서 열렸다.

이날 시상식에는 이하석 구상詩문학상 운영위원장을 비롯해 류형우 대구예총 회장과 박방희 대구문인협회 회장, 김용락 한국작가회의 대구경북지회장, 고(故) 구상 선생님의 딸인 구자명 소설가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시상식은 축사·경과보고·심사평·수상작 시낭송과 수상자 소감·시상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손인락 영남일보 사장은 인사말에서 “구상詩문학상 본상 수상자와 두 분 신인 작가가 앞으로 한국 문단에서 어떤 길을 걸어가게 될지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다”며 “오늘을 시작으로 더욱 묵묵히 문학의 길로 정진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하석 구상詩문학상 운영위원장은 “구상 시인과 관계가 깊은 대구에서 이런 시상식을 열게 된 점은 매우 뜻깊다”며 “앞으로 해가 거듭될수록 구상詩문학상이 한국 문학계에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제1회 구상詩문학상 본상은 오은 시인이 수상했다. 오은 시인은 “시는 혼자 쓰는 것이지만, 함께라는 감각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다”며 “1회 수상자라는 무게가 제 문학의 다음을 열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영남일보 문학상은 이서연씨(시)·임채묵씨(소설)가 각각 수상했다. 시 부문 수상자인 이씨는 “뜻밖의 수상 소식에 함께 기뻐해 주고 오랜 시간 함께 소리 내어 책을 읽어 준 친구들과 늘 곁에서 사랑과 격려를 건네는 가족들께 감사하다”고 했다. 소설 부문 수상자인 임씨는 “첫걸음을 뗄 수 있게 도와준 모든 분께 감사하고, 조금씩이라도 나아지는 글을 보여드리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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