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모자를 선물할게요 / 신영배
끝
그 끝에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혼자
그 옆에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밟힌,
여린 껍질을 가지고 있던 것
그 위에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수풀 속에 숨은 소녀
소녀의 눈동자 앞에
끌려가다 벗겨진 신발이
다른 세상에 놓이고
한쪽은 신발을 찾을 수 없는 꿈속
그 속에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슬픈 맨발 위에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그녀들은 달려와 나의 시들을 헤치죠
가져갈 것 하나 없다고 투덜거리죠
나는 시-옷을 입고 있어요
걸칠 것, 그거라도 가져가야겠다고
그녀들은 내 옷을 다 벗겨 가죠
물모자
그 옷에 딱 어울리는
이 물모자요
나는 그녀들에게 달려가요
시-옷은 걸쳐도 알몸이에요
그녀들은 울어요
우는 알몸 위에 물모자
선물할게요
나도 울어요
수로에 알몸으로 처박혔던 그녀와
폭우 야산에서 알몸으로 흘러내렸던 그녀와
화면에 뜨고 돌아다니는 알몸과
버려지고 어두워지는 알몸과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당신이 도는 길목에서
파도가 칠 거예요
노래처럼요
문 뒤엔 꽃과 바다를 놓을게요
물모자를 쓰고 문을 여세요
바람은 물모자 속에서 잠잠 해요
뒤집히지 않는 단어를 하나 가지세요
연주를 해야 하는데 손가락들이 사라진 밤이 있어요
달빛 위에 살짝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건반 위에서 흰 달을 쳐요
시-옷을 입은 내가
시-옷에게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혼자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암이 재발할지 몰라요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달밤엔 달을 따라 움직여요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당신은 한창 시도 씹어 먹을 나이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나를 따라온 길고양이 내가 따라간 길고양이
길을 물로 바꾸고 나는 물고양이
강가에서 탁 꼬리를 세워요
예쁘장한 단어도 하나 가져요
지금은 물모자를 쓰는 계절인걸요
본 공모전에 당선된 작가께서 출간한 시집을 소개합니다.
[수상소감] "焦土 위에서 쓰는 시를 생각하겠습니다"
수상 소식을 듣고 작은 시집을 안아주었습니다. '물모자를 선물할게요'는 소시집으로 기획된 정말 작은 시집입니다. 그 작은 시집에 큰 상이 주어지다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시집을 어디에 놓아두었는지 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찾았고 안아주었습니다.
작은 시집을 쓰며 작은 발을 생각했습니다. 시집에 작은 발이 달려서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어딘가에 닿을 수 있다면, 아마도 아픈 누군가일 것이며 따듯함이 필요한 어디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발은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시집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요.
시집을 쓸쓸한 곳에 놓아두었습니다. 누군가 나앉은 길가나 부서진 계단 위, 누군가 실종된 지하도나 야산, 혼자 쓰러진 바닷가나 그 의자 위…… 시를 쓰는 제 방의 지도였습니다. 그 지도를 펼치고 시집을 옮겨달라고 주문을 외우기도 했습니다. 그런 시들이 몇 개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 또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시집을 어디에 놓아두었는지 잊고 있었습니다. 시집을 옮겨야 하는데, 시를 써야만 할 수 있는 그 일인데, 저는 어둠 속에 막막하게 서 있었습니다. 이 상의 소식은 누군가 그 작은 시집을 살짝 옮겨주었다는 소식 같았습니다. 시를 향한 마음들이 모아준 격려를 잊지 않겠습니다.
이 상을 받고 제 시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구상 시인은 표현 기교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기어(綺語)라고 하여 경계하였습니다. 이 상이 저에게 짚어주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물을 들여다보듯 그 지점을 들여다보겠습니다.
막막한 시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초토, 불에 타서 검게 그을린 땅입니다. 구상 시인의 '초토(焦土)의 시'는 1950년대 전쟁으로 인한 암울한 세상을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마주한 세상도 그 초토와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상의 무게와 함께 이 초토 위에서 쓰는 시를 생각하겠습니다.
[심사평] "견고한 현실 탐색 풍부한 암시와 의미 몽환적 은유로 빛나"
영남일보 구상문학상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열 분의 시집 중 김현의 '호시절'(창비, 2020), 신영배의 '물모자를 선물할게요'(현대문학, 2020), 유병록의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창비, 2020), 유계영의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문학동네, 2019) 등을 최종 후보작으로 지명했다. 이 시집들이 높은 시적 성취와 더불어 저마다의 개성이 잘 드러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긴 논의 끝에 신영배 시인의 '물모자를 선물할게요'를 제4회 영남일보 구상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다만 유병록 시인이 보여준 고통의 핍진성이나 김현 시인의 거침없고 발랄한 상상력도 문학상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져 아쉬움을 남겼다. 두 시인의 수상을 다음으로 미룬 것은 수상자와 견줘서 상대적으로 젊고 미래에 더 큰 상을 받을 기회가 있을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신영배 시인의 시는 고립과 고독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독자적인 계보를 빚는데, 그 누구와도 닮지 않은 높고 깊은 상상력이 빚어낸 몽환적인 은유로 빛난다. 시의 화자(話者)는 물모자를 쓰고 거울을 보고, 커피를 내리고, 물구나무를 선다. 누군가 달빛으로 의자를 만들면 강물이 의자 속으로 들어간다. 원피스를 입고 왈츠를 추던 소녀들은 나무속으로 들어가거나 장미에 빠진다. 그 마술적 리얼리즘의 원천은 멀고 아득해서 짐작조차 어렵다. 시인이 펼치는 '물모자의 세계'는 물모자를 쓰고(혹은 썼다고) 상상하는 세계일 뿐만 아니라 결국 '찾을 수 없는 시집' '빗물과 흐르는 시집' '노을보다 멀리 가는 시집'을 찾아가는 고독한 여로에 귀속되는 것이다. 물모자의 세계는 현상 세계의 바깥에서 안쪽으로 들어오는 문턱에 걸쳐져 있다.
'사이'의 공간은 이쪽도 저쪽도 아니다. 심판과 결정이 유예되는 곳, 내일도 아니고 어제도 아닌 곳이다. 시인은 그 '사이'에서 물모자를 쓰고 물구두를 신고 이동하는 뮤즈들을 관찰한다. 세계의 바깥 그 어딘가 있는 세계 혹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세계. 그곳에선 부재하는 현실에 한 줌의 환상을 뒤섞어 빚는 몽상과 은유가 부풀고, 천진하고 사악한 동화가 펼쳐진다. 그곳도 암이 재발하고 약한 자가 짓밟힌다는 점에서 현실의 고통과 그늘을 반영하는 듯하다. 신영배 시인의 수수께끼 같은 상상력이 빚는 물모자를 쓰고 움직이는 뮤즈들에 탐색과 관찰이 현실에 대한 풍부한 암시와 의미를 머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의 무게를 견딜 만큼 충분히 깊고 견고하다고 판단해 제4회 영남일보 구상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심사위원 안도현, 장석주, 엄원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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