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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잘하는 요즘 애들 / 전예지

 

 

프린터기가 또 말썽이다

 

이 애물단지를 버리든가 고치든가 이게 대기업의 수준인가요?

 

하루에 기본 다섯 번을 1층에서 2층으로

걸어야 하는 에스컬레이터 아니면 계단으로

왼쪽 끝 후문 쪽에서 오른쪽 끝 정문 쪽으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프린터기를 하나 놔주면 이런 고생은 안 해도 될 텐데

겨우 몇 십 만원이 아까워서 사람을 갈아 버린다

두 여자는 욕이란 욕을 다 입에 담지만

차마 입을 벌리진 못한다 멋쩍게 서로 한숨만 쉴 뿐

 

낡고 늙은 마트에 새로 생긴 텅 빈 매장의 취급은 이 정도

 

[자리 비움]

 

자기는 왜 자꾸 마음대로 자리를 비워?

일하기 싫어?

 

하필 매니저가 없는 날

혼자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본부장이 찾아온다

억울한 아르바이트생은 그나마 매니저보다 깡다구가 있다

 

프린터기가 2층에 있어서 왔다 갔다 하려면 어쩔 수,

 

말대꾸도 하고 참 요즘 애들 무섭다

 

눈이 순간 흰자로 뒤덮여진 아르바이트생을 보고

 

머리 빠진 본부장은 혀를 찬다

 

죄송합니다

 

속으로 본부장이 매장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입으론 여전히

 

 

 

 

[당선소감] "어둡고 좁은 공간에서창백한 하루를 밤새 쓴다"

 

저는 외출이 잦지 않습니다. 저만의 공간은 어둡고 좁습니다. 그 좁은 폐허 속에 저만의 규칙과 행복이 편안합니다. 고독은 바람으로 불어오고, 저는 점점 더 속으로 파고듭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어간다는 게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저의 공간은 햇빛이 부족합니다. 햇빛이 싫어 숨은 대가는 사색(思索)과 현기(玄機)입니다. 겨울은 어느새 찾아오고, 저는 대신 비타민을 챙겨 먹습니다. 일어나자마자 먹는 비타민은 가장 흡수율이 좋습니다. 그렇게 채운 시리고 창백한 하루를 밤새 쓰고 시를 적습니다.

 

이런 저의 시가 마음에 드셨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저에겐 빈 곳이 많고 그 부분들이 드러나는 게 부끄럽습니다. 저는 곧잘 틈을 흠으로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금방이라도 당선이 전부 꿈이라는 소식이 전해질까 봐 그 생각에만 사로잡혀 상처받지 않으려 상처받았습니다. 그러나 저의 불안은 헛된 꿈인 듯 하루하루가 선명하게 행복합니다. 이제 저는 부족함을 알고, 더 열심히 살며 나의 틈을 채우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에게 틈이 존재해도 흠이 아니라고 깨닫게 해주신 경인일보와 심사위원분들에게 감사합니다.

 

이번 겨울은 한동안 깨어나지 못할 것처럼 우울했습니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내 곁에 남아 있던 건 가족과 친구들이었습니다. 항상 곁에 있으면서도 가장 숨고 숨기는 딸을 믿고 응원해준 가족들 사랑합니다. 그리고 항상 자극제가 되는 글 잘 쓰는 나의 한신대 문창과 17학번 친구들. 글썽글썽 고마워! 마지막으로 2021년의 겨울에게. 나는 정말 노력하고 있어요. 믿어주세요. 사랑해요.

 

틈을 주고 채워지는 것에 불편해하지 않는

 

흠이 아닌 틈을 자랑하는

 

그런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런 사랑을 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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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화려한 수사 없었지만일상의 소중함 일깨우는 어법"

 

2022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의 관심은 뜨거운 편이었다. 비록 응모편수는 지난해보다 약간 줄었지만 응모작품의 수준은 상당히 높았다는 게 중론이다.

 

우선 응모자들의 연령대가 20대부터 60대에 이르기까지 고루 분포되었지만 50~60대의 응모자가 많았다는 것도 특기할 만한 현상일 수 있다. 그만큼 사물을 응시하는 시각이 깊고 인식의 수준이 높았다고 보여진다.

 

시가 죽었다고 말하는 시인들이 있기는 하지만 시는 여전히 살아 있는 문학의 영역인 것을 응모 편수를 통해 알 수 있다.

 

응모작품의 가장 두드러진 경향으로는 거대담론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생명 문제라든가 환경 문제라든가 통일 문제라든가 코로나 팬데믹 문제라든가 하는 거대담론을 다룬 시편들이 눈에 띄지 않았다. 반면 개인의 일상생활에서 모티프를 얻거나 사소한 경험에서 소재를 찾는 경향이 도드라지고 있었다.

 

실험적인 응모작을 만날 수 없었다는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이는 안정된 작품으로 위험부담 없이 순항하고 싶다는 의지의 발현일 것이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예시영의 '카이트 서퍼', 김현주의 '그림자를 수집하는 방법', 전예지의 '일 잘하는 요즘 애들'이었다. 심사위원 두 사람은 쉽게 합의에 이르지 못해 장시간 토론과 논의를 거쳤다.

 

'카이트 서퍼'는 활달한 상상력과 긴 호흡이 미덕이면서 '그리고 바람이 불면/이 연서(戀書)가 당신에게 도달할지 모른다'와 같은 당돌한 문장이 시선을 끌었지만 응모작 모두 숨 가쁘게 긴 호흡이 문제였다. 압축미를 보여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컸다.

 

김현주의 '그림자를 수집하는 방법'은 어법이 새롭지 않다는 데 심사위원의 의견이 일치했다. 산문시의 군데군데 상투성의 혐의가 보이는 것도 문제일 수 있었다. 그러나 '푸른 별빛이 숨죽인 그들의 입속에서 검게 변해 자라졌다'와 같은 문장은 돋보였다.

 

전예지의 '일 잘하는 요즘 애들'은 사무실의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이다. 프린터기가 말썽이어서 1층에서 2층으로 오르내려야하는 고충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화려한 수사를 구사하지도 않았으며 다양한 은유를 보여주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역병의 시대에 이와 같은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닫게 하는 신선한 어법이 이 작품의 힘이다.

 

일상의 수없이 많은 흐름 속에서 한 장면을 포착해서 성화해낸 전예지의 시적 감각이 예사롭지 않다는 데 두 심사위원은 공감하고 당선작으로 합의했다.

 

당선을 축하하고 훌륭한 시인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김윤배 시인·김명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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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고 / 황정현

 

 

극지의 순록은 우아한 뿔을 가졌다

거친 발굽으로 수만 년을 걸어왔다

 

죽은 자식을 동토에 던지며 발길을 돌려야 했고

비틀걸음으로 얼음산을 넘어야 했고

 

살점을 떼어 어린 자식의 배를 불려야 했고

뿔을 세워 침입자에 맞서야 했고

 

온몸을 쏟아 무리를 지켰다

죽어서도 흙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치열한 싸움에서

늘 이기고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당신은 무덤을 등에 지고 돌아왔다

무덤은 살고 당신은 죽었다

 

무덤 속에서 얼음이 자라고 있다

얼음은 흙을 밀어 올려 산이 될 것이다

 

얼음의 계절이 오면 순록은

바늘잎나무숲으로 순례를 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당신의 길이 보인다.

 

 

 

 

 

[당선소감] 작은방 낡은 의자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이 자리에 제가 앉아도 괜찮은가요?"

 

미안해요 여기

당신이 앉았던 자리인가요

 

접혀 있는 페이지는

당신이 읽던 페이지였고

 

아무렴 어떤 가요 슬픈 페이지를 넘기면

또 다른 슬픔이 펼쳐지는 걸요

 

유리창은 햇빛을 쏟아내더니

이내 비구름을 몰고 오네요

 

책 귀퉁이가 닳도록

당신이 읽던 페이지를 읽고 또 읽습니다

 

바라보는 일 밖에 할 줄 몰라서

다가가는 일도 제겐 큰 용기가 필요했지요

 

당신은 잠시 자리를 비운 걸요

이 자리엔 누구나 앉아도 괜찮습니다

 

 

작은방 낡은 의자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습니다. 삐걱삐걱 의자가 소리를 내면 제 뼈들도 뚜둑뚜둑 화답을 합니다. 그렇게 저도, 의자도 함께 낡아가겠지요. 세상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지만 외면하지 않겠습니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멈출 때까지 의자에 앉아 있겠습니다.

 

생애 처음으로 당선 소식을 전해주신 경인일보와 심사위원이신 김윤배, 김명인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함께 해준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뜁니다.

 

제게 피와 살을 주신 황의열·강신해님, 정숙광·선정선, 늘 저와 함께하는 김영형·김수민, 문전성시 최지온·서미숙·금희숙·김혜숙·염형기·박양미님, 문장강화 김산 선생님, 조재일님, 중앙대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이승하 교수님과 문우님들, 파피루스 김혜정·김율관·이해민님, 시와 찻잔 김희광 선생님과 문우님들, 용산도서관 이승희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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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마지막 행간까지 존재적 사유 확장된 미학 눈길

 

이번 응모작들은 일상성에 노출된 실업, 가족, 반려, 생태 등을 소재로 한 사회적 문제에서부터 코로나19를 반영하듯 감염과 질병 등에 주목하며 삶의 보편적 중력에서 벗어나지 않는 시편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가운데 우리는 발상의 전환을 도모하는 다채로운 경향의 시편뿐만 아니라 인간 본연의 층위를 건드리는 시편들을 통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의 자리를 살펴보았다.

 

여기서 모던한 시적 상상력으로 고유한 사물을 새롭게 견인하면서 긴장감 있게 구현하고 있는, 10편의 작품이 예심을 통과했다. 또한 예심을 거친 작품들은 은유의 한계를 유연하고 감각적인 발상으로 작동시키면서 시어만이 가질 수 있는 언어의 특질을 살리고 있다는 점에서 평균화된 시작에의 열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심 작품들 중에서 구체화되지 못한 묘사들과 관념어들이 오히려 번뜩이는 상상력에 균열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황정현씨의 '핑고'와 강현주씨의 '고양이' 등 두 편의 작품을 본심에 올려놓았다.

 

이 두 작품 모두 탁월한 상상력을 통해 존재의 모순을 해체하여 시적 언어로 편입시키는데 성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의가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행간까지 존재적 사유와 확장된 미학을 끝까지 선보인 '핑고'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정연하지 않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핑고'는 담담한 어조로 '빙산'의 푸른 내부를 응시하면서 '무덤 속 얼음''흙을 밀어 올리는' 생명의 신생과 사멸에의 '언어적 밀행'을 보여주고 있었기에 신예로서의 가능성에 초점을 맞췄다.

 

끝까지 입을 모았던 후보작 역시 공교롭게도 '빙하''너울거리는' 생명에의 내부조직을 '강렬한 축문'으로 읽어내는 냉담한 시선과 사물을 여과하는 치열한 시적 안목을 높이 평가했지만 아쉽게도 최종심에서 거쳤다.

 

- 심사위원 : 문태준, 권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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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깨다 / 하채연

 

 

등을 받치고 잠들었던 나무기둥에서

새벽이슬 냄새가 훅 끼쳐온다

사방에 울울창창하게 뻗은 녹음들

현시를 잊은 채 창공에 닿아 빛나고

꿈결처럼 말을 거는 선선한 바람에

나는 나무들이 지어놓은 미몽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새소리로 엮어놓은 문패를 열고 들어가자

억겁의 땅으로부터 솟은 나이테의 내력이

기둥을 키우며 나의 발목에 작고 푸른 원주를 새기고

육신과 나무, 나무와 육신 사이를 비집고 난 샛길 사이로

와본 적 있는 것만 같은 울렁이는 향수가 지천에 빛난다

목피들이 전생을 벗겨내는 소리가 알싸한 그 길목에선

곤줄박이 한 마리가 잎새 한 장을 전해준다

해독할 수 없는 이끼들의 필체로 쓰인 문장들

지워지지 않을 나의 태곳적 이름을 발설하고 있다

무한한 혈맥으로 엮인 나무 그늘 속

편안히 누워 흙이 된 이름들을 짚어본다

끝없이 이어져 불거진 이 뿌리들은 나를 이어주는 끈이었을까

억겁의 계절을 지나도 숨 쉬는 숲은

태양과 달을 이고 은빛 땀을 대지로 흘려보내고

나는 한 장의 연서를 쥐고 숲에서 깬다

뒤돌아보면 푸른 절경이 등허리에 축축하다

 

 

 

 

 

[당선소감] 시 쓰기... 종착역 없는 기차 타고 가는 기분

 

돌아가신 할머니가 잘 영근 알밤 무리를 쌓아올리고 있는 꿈을 꾼 날, 고향에 가는 길에 당선소식을 전해 받았습니다.

 

할머니의 뒷모습으로부터 이어진 긴 강, 시 쓰기. 종착역 없는 기차를 타고 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길고 긴 언어의 숲에서 제 나무 하나 찾는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누군가 놓고간 전언을 받아든 기분이었습니다.

 

너무 소중해 조심히 받아들고 한참을 곱씹었습니다. 시 한 편이 너무 무거워 쩔쩔매던 밤들, 설익은 마음 탓에 쓰기를 주저했던 순간들이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듯했습니다. 쭈뼛쭈뼛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이는 우리들일지라도 질기고 질긴 젖줄로 연결되어있다는 사실도 잊지않으리라 다짐했습니다.

 

가끔 세상이 믿기지 않아 눈을 비비고 다시 볼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반짝하는 건 무엇인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의 착각이나 망설임 같은건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늘 고민하고 그려 시 한 편으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다 나라고, 너라고도 부를 수 있는 개, 고양이, 동물, , 나무, 풀잎 늘 사랑합니다.

 

늘 친구처럼 손잡고 시 이야기하는 엄마, 가족들 항상 고맙고 감사해요. 제겐 고마운 스승들이 많이 계십니다.

 

고등학교 시절 가르쳐주신 선생님들, 아흔 아홉 개의 빛으로 빛나는 선생님, 동국대학교 선생님들, 박형준 선생님 부끄럽고 부족한 제 시 봐주시고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먼 곳에서 응원해주시는 지인들께도 두손 모아 감사를 전합니다. 아무것도 될 수 없어도 시 쓰는 우리라서 너무 행복해.

 

동국대학교 시 분과 영원하길! 나를 사랑하는 만큼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끝으로 아직도, 혹은 영원히 모를 시에게. 뜨고 다시 떠도 뜰 눈이 너무 많네요. 용기를 갖고 더 정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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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사물 바라보는 시선 깊고 메시지 견고

 

나이가 무색할 만큼 젊은 작가가 보여준 농익은 작품에 놀랍고 신선함을 느꼈다."

 

2019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심사를 맡은 심사위원들은 올해의 당선작을 '숲에서 깨다'로 정하는데 이견이 없었다.

 

심사위원들은 당선작에 대해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깊고, 전하는 메시지가 견고하다고 호평하며 성장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심사위원들은 올해 시 부문 응모작 총 1423편 가운데 본심에 오른 30편의 시 중 6편을 다시 추려 평가하며 고심을 거듭했다.

 

최종 심사에는 '곱슬의 방향', '가위 ', '호출신호, 창백하고 푸른 플라스틱', '걸리버여행기' , '구석의 깊이-비의 팔랭프세스트' 등 다양한 작품이 올라왔다. 올해 출품된 작품들은 주제에 있어 차별성이 있었다는 평을 받았다.

 

시리아 난민 등 애도가 짙고 다소 어두운 주제가 많았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감을 비롯해 실업, 경기침체 등 사회·경제적 문제, 정치적인 이슈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뤘다. 20~30대 젊은 응모자들이 그 어느 때보다 많아 신선하고, 재미있는 작품들이 많았다.

 

아쉬운 점도 지적됐다. 젊은 문학도들의 출품작들이 최근 유행하는 시의 경향을 따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심사위원들은 주로 생경하고 낯선 이미지들이 서로 결합하거나 시를 비학적으로 전치시키는 모습을 보여줘 시 읽기가 곤혹스러웠다고 말했다. 그에 비해 하채연 당선자의 '숲에서 깨다'는 시의 짜임새를 갖추면서도 시인만의 깊은 세계관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차별점을 선사했다.

 

새벽의 숲을 열어 재치는 해맑은 생각들이 긍정적으로 명랑하게 펼쳐있고, 숲에 존재하는 한 작은 개인이 우주와 교감하는 듯한 느낌을 안겨줬다며 이미지 자체가 매우 신선했다고 평가했다. 더불어 당선작을 포함해 응모된 작품 상당수가 어느 하나 크게 뒤처지는 것 없이 모두 고르게 작품성을 지녔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 심사위원 김명인 김윤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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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 해변 / 이명선

 

 

검은 얼굴의 아이가 있어

조류를 타고 해변까지 밀려온 대륙의 아이가 있어

뿔뿔이 흘러가는 하늘에 흰 수리는 원을 그리며 비행하고 있어

 

거듭 얼굴이 풀어져 

뭍으로 오르려는 눈꺼풀이 흩어져 

 

반복의 역사는 번복되는 아이들로 가득해

창창한 것은 꿈의 세계야 검은 눈물로 적셔지는 땅도 있어 

 

우리에게 바다는 수평선 너머에도 있지만 

아이에겐 수평선 너머의 바다엔 해변이 없어

 

불시에 버리고 온 대륙처럼

감은 눈 속에서 모래 언덕이 푹푹 꺼지고 있어

 

반신반의 하는 얼굴이 있어

간절함은 체험이 아니야 찢기는 세계에 발을 담그면 붉은빛의 인내가 필요해

 

국경을 물고 가는 새야

하늘을 균일하게 나누면 새들로부터 망명한 낙원이 있을까

 

한참을 뛰어가도 숨이 차지 않는 해변이 있어

검은 얼굴의 아이가 부르던 난민의 노래가 밀려나가는 

 

 

 

 

[당선소감] 홀로서기를 마무리하며

 

며칠째 계속되던 한파주의보가 해제되었습니다. 당분간 한랭전선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전선이 사라진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안도합니다. 사라지지 않았는데 보이지 않을 때 저는 안도합니다. 베란다 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올겨울 들어 처음 올려다봅니다. 시립니다.

 

시린데 온몸으로 퍼지지 않습니다. 지금 제가 뜨겁기 때문입니다. 눈이라도 펑펑 내린다면 더 시린 하늘을 찾아서 밖으로 나가려는 충동이 일 것입니다. 듣고 있던 노래의 볼륨을 더 줄입니다. 아예 들리지 않는다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제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혼자 생활하는 것이 편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걷다 보면 물 위거나 구름 위였습니다. 빠지거나 떨어질 수 있는 불편에 대한 직감으로 자주 붉거나 창백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낀다는 것이 평범이라는 걸 알지만 타고나길 그렇게 타고났나 봅니다.

 

그래서 늘 혼자 지냈습니다. 외출할 때마다 자주 모자를 썼습니다. 모자를 푹 눌러쓰면 타인의 시선뿐만 아니라 제가 보고자 하는 것들에서 가려질 것 같았습니다. 어떤 욕망도 제 것이 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사라지지 않았는데 보이지 않을 때 저는 안도합니다.

 

저의 하루는 단순했습니다. 온종일 음악을 들으며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 유일한 일이었습니다. 중얼거리다 보면 모든 중얼거림은 저에게로 다시 되돌아오곤 하였습니다. 되돌아오는 중얼거림을 언제부턴가 받아 적었습니다. 혼자 지내는 일치곤 매력적인 일이었습니다.

 

당선 소식을 받았습니다. 순간 혼자 중얼거릴 수가 없었습니다. 무작정 누군가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여전히 없었습니다. 이제 사람과 사람 사이를 걸어가야겠습니다. 그 길을 내주신 경인일보사와 저의 중얼거림을 받아주신 심사위원님께 큰절 올립니다.

 

저에게 최초로 시를 보여주고 시의 길을 내준 이돈형 시인과 시의 날개를 펼치게 한 김지명 시인께 거듭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쓰겠습니다. 이 말이면 될 것 같습니다.

 

늘 애틋하게 지켜봐 주는 이종영, 이영선, 이영예, 김병찬 그리고 끝끝내 사랑인 재인이에게도 깊은 마음 전합니다. 하늘에서 지켜보고 계실 엄마, 아버지 곧 사진 가지고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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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절제·인내로 묘사한 인류의 비극

 

이명선 당선자의 '한순간 해변'은 지난 20159월 시리아 난민 아이의 죽음을 소재로 인류의 비극을 그린 작품이다.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이 인류가 저지르고 있는 비극을 그리면서도 인내와 절제가 미덕인 시 세계를 펼쳤다고 평가했다.

 

1158편이 접수된 '2018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서 본심 심사위원들은 18편의 시를 골라 평가했다. 이 가운데 4편이 당선작 후보에 오르며, 심사위원의 매서운 심사대에 올랐다.

 

'한순간 해변''익투스' '수수께끼 나라의 첫 인사법' '미역국을 삼킨다는 것', 등이 당선 경쟁을 벌였다. 우선 '미역국을 삼킨다는 것'은 의미가 함축되도록 말을 활용하는 솜씨가 두드러진 작품이라는 평을 받으며 심사위원을 사로잡았다.

 

시상을 단단하게 다뤄본 느낌을 준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심사위원들은 섬세하게 형상화하는 작업이 아쉬웠다고 평했다.

 

종교적인 느낌이 강한 '익투스'는 시를 조여내는 실력, 한 편의 작품을 완성시키려는 의지가 읽히는 작품으로 잘 조정된 시적 발화를 보여줬다는 평을 이끌어냈다. '수수께끼 나라의 첫 인사법'은 시문이 유려하고 상상력이 돋보인 작품으로 마지막까지 당선작과 자웅을 겨뤘다.

 

본심 심사위원들은 '한순간 해변'의 이명선 당선자가 당선작 외에도 응모한 시가 고루 상당한 실력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줬다. 좋은 시인을 발굴했다고 입을 모았다.

 

반면 심사위원들은 응모자들이 실험적인 작품쓰기에 주저한 것에 대해선 아쉬움을 표했다.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시에서 사유의 날카로움이 드러나지만, 대체로 서정적인 작품이 많았다고 지적했다.

 

심사위원들은 가족과 개인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 좁아진 것이 각박한 현실 속을 살아가는 이들의 생존법을 반영한 것 아닌가 하는 우려를 표했다.

 

마지막으로 시인을 꿈꾸는 응모자들에게 시를 통해 가보지 않은 낯선 곳에 가려는 노력을 당부했다.

 

- 심사위원 : 김명인, 김윤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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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역귀 / 성영희

 

 

미역은 귀로 산다

바위를 파고 듣는 미역줄기들

견내량 세찬 물길에 소용돌이로 붙어살다가

12첩 반상에 진수(珍羞)로 올려 졌다고 했던가

깜깜한 청력으로도 파도처럼 일어서는 돌의 꽃

귀로 자생하는 유연한 물살은

해초들의 텃밭 아닐까

 

미역을 따고나면 바위는 한동안 난청을 앓는다

돌의 포자인가,

물의 갈기인가, 움켜쥔 귀를 놓으면

어지러운 소리들은 수면 위로 올라와

물결이 된다

파도가 지날 때마다

온몸으로 흘려 쓰는 해초들의 수중악보

흘려 쓴 음표라고 함부로 고쳐 부르지 마라

얇고 가느다란 음파로도 춤을 추는

물의 하체다

 

저 깊은 곳으로부터 헤엄쳐 온 물의 후음이

긴 파도를 펼치는 시간

잠에서 깬 귀들이 쫑긋쫑긋 햇살을 읽는다

 

물결을 말리면 저런 모양이 될까

햇살을 만나면 야멸치게 물의 뼈를 버리는

바짝 마른 파도 한

 

 

 

 

[당선소감] 마르기 전 마지막 숨결을 풀어 놓을 것

 

당선 통보를 받는 순간 일생을 통틀어 가장 즐거운 귀를 경험했습니다. 수화기 반대쪽 귀를 다른 한 손으로 감싸며 이 순간이 제발 꿈으로 빠져나가지 않길 간절히 바랐습니다. 깜깜하게 닫혀 있던 귀를 열고 그 안쪽에 싱싱한 해조류 한 포기 착생하는 듯 짭조름한 눈물이 고였습니다. 돌에서도 꽃이 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미역귀, 바짝 마른 미역귀를 물에 담그면 양푼 가득 푸른 바다는 수돗물에서도 탱탱하게 부풀곤 했습니다. 그건 마지막 숨결들을 풀어 놓는 일, 마르기 전의 물살을 기억해내는 일이었습니다.

 

제 몸을 원래대로 부풀리는 일, 잊지 않겠습니다. 시란 세찬 물길 속에서 소용돌이로 붙어사는 미역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흔들릴수록 어지럽고 어지러울수록 세찬 파도가 더욱 그리운 돌미역 같은 것. 귀를 잃고 난청을 앓는 돌과 바짝 마르면서 웅크린 미역귀처럼 다시 파도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몇 차례의 최종심에서 탈락하면서 깜깜하게 닫혀가던 내 귀에 천 번은 더 흔들려야 비로소 한 줄기 물살로 피어나는 미역귀처럼, 귀를 열고 다시 겸허해지라는 파도의 전언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 주일은 뒤늦은 세례를 받은 날이었습니다. 길고 험한 파도를 지나 기도하는 삶을 선택한 저에게 찾아온 응답이 순은으로 아름답군요. 부족한 시를 끝까지 놓지 않고 격려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경인일보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또한 시 쓰는 딸을 누구보다 자랑스럽게 여기시며 마지막 손을 꼭 쥐어 주셨던 아버지와 홀로 남으신 어머니께 가장 먼저 이 영광을 드립니다. 시 쓴다고 아내로 엄마로 부족하기만 했던 저에게 묵묵히 응원의 힘을 실어준 남편과 딸 다영이와 아들 연욱에게 고맙고 감사한 마음 전하며 늘 든든한 방파제가 되어주신 문우님들과 이 기쁨을 함께 합니다.

 

 

 

귀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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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인생론적 깊이 구체화한 은유

 

2017년도 경인일보 신춘문예에는 참으로 많은 분들이 응모해주셨다. 그 매체적 위상이 하루하루 높아져가는 경인일보에 수준 높은 작품들이 이렇게 많이 투고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소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심사위원들은 본심에 부쳐진 작품들을 여러 차례 읽어가면서, 많은 작품이 만만찮은 안목과 역량을 보여주었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시단에서 주류를 형성한 시풍을 답습하거나 판박이에 가까운 관습적 언어를 보여주는 대신, 스스로의 경험적 구체성에 심의를 쏟은 것도 썩 긍정적으로 생각되었다. 이 모든 것이 한국 시의 좌표를 새롭게 개척해가려는 생성적 면모일 것이다. 심사위원들이 주목해서 읽은 분들을 가나다순으로 밝히면 강성애, 고은진주, 김기란, 김문숙, 나혜진, 성영희, 오세정, 이동우, 임상갑, 하예주 씨 등이었다. 오랜 토론과 숙의 끝에 심사위원들은 성영희 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당선작으로 결정된 성영희 씨의 '미역귀', 바위에 달라붙은 미역줄기의 외관과 생태와 속성을 활용하여 인생론적 깊이를 드러낸 수작이다. ''로 살아가는 미역은 비록 깜깜한 청력을 가졌을지라도 언제나 파도처럼 일어서는 '돌의 꽃'이다. 그런데 미역을 따고나면 바위는 난청을 앓게 되고, 그렇게 바위와 미역이 구성하는 바다 풍경이 잠에서 깬 귀를 열어 다시 햇살을 읽어내는 풍경은, 그 자체로 '쫑긋쫑긋' 삶의 이치를 듣게 되는 우리의 모습을 고스란히 은유해준다. 다른 출품작들도 균질적인 성취를 보여 크게 믿음이 갔다. 더욱 성숙한 시편들로 경인일보의 위상을 높여주기 바란다.

 

당선작에 들지는 못했지만, 구체성과 심미성을 갖춘 언어를 통해 자신만의 미학적 성채를 구축한 사례를 많이 발견하였다는 점을 덧붙인다. 대상을 좀 더 일상 쪽으로 구체화하여 우리 주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타자들을 애정 깊게 응시한 결실들도 많았다. 다음 기회에 더 풍성하고 빛나는 성과가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이번 응모자 여러분의 힘찬 정진을 마음깊이 당부 드린다.

 

- 심사위원 : 신달자,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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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봉 / 김이솝

 


파르티잔들이
노모의 흐린 눈에 가을을 찔러 넣는다.
턱밑에 은빛 강물을 가두고 은어 떼를 몰고 간다.

쿵! 폭발하는 나무들.

온통 달거리 중인 대봉 밭에
감잎 진다.

며느리가 먹여주고 있는 대봉을
다 핥지 못하고
뚝뚝, 생혈(生血)을 떨구는 어머니.

남편과 아들이 묻힌 지리산 골짜기
유골을 찾을 때까진 살아 있어야 한다고
삽을 놓고 우는 섬진강변.

귀를 묻고 돌아오는 저녁.

 

 

 

 

[당선소감] 겨울비처럼 세상에 붐비는 시를 써갈 것

 

빗방울이 차갑게 공중에 붐비고 있습니다. 8층에서 내려다보는 세계는 어제와 다르지 않습니다. 어제까지의 김이솝이 아닌 것에 대하여 스스로 놀라고 있습니다.

 

신춘문예 당선 소식을 접하기 전과 후의 모습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 것인지! 정말 이래도 되는 건지. 어느 날 갑자기 시가 찾아와 평생 열병을 앓게 하고 시 중독자로 만들어 버리더니 이젠 아예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시 내림의 형벌을 가하고 맙니다.

 

그러나 나 자신이 자초한 일입니다. 그 운명을 받아들입니다. 세상의 모든 상처와 역사와 시간의 긴 타래 속에서 더 고뇌하고 좌절하고 극복하라는 명령을 내가 내립니다.

 

시가 나를 구원해 준 것처럼 내 시가 아파하는 모든 사람, 사물,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들을 치유하고 구원해 주기를 바랍니다.

 

소통되는 시를 쓰겠습니다. 지금 내리는 겨울비처럼 세상에 붐비는 시를 쓰겠습니다.

 

장석주 선생님 감사합니다. 신미균 시인님, 이진명 시인님, 임동윤 시인님, 문정영 시인님 감사합니다. 시사랑 회원님들, 서교동 시의 도반, 문우님들 감사합니다.

 

미천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경인일보 담당자님들 정말 고맙습니다.

 

앞으로 좋은 시 쓰겠습니다!

 

 

 

 

 

이유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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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역사의 질곡이 준 상처를 보듬기 위하여

 

예상을 넘어서는 좋은 수준의 작품이, 그것도 예년보다 훨씬 많이 답지한 것은, 중앙과 지방의 간격이 그만큼 좁혀졌다는 뜻일 터이다. 수원과 인천은 물론 서울에서도 많은 예비시인들의 작품이 날아와 쌓였다.

 

당선작은 신춘문예 역사상 유례가 없었을 거라 생각되는데, 지리산 일대에서 준동하다 죽어간 두 파르티잔(빨치산)과 죽음을 지켜본 어떤 여성의 생을 다룬 시다. 현대사와 가족사와 개인사가 중첩되어 있는데 시는 짧다. 한국전쟁 전에, 전쟁 과정에, 그리고 휴전 후에 몇 명이 지리산 일대에서 죽어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남편과 아들이 묻힌 지리산 골짜기/ 유골을 찾을 때까진 살아 있어야 한다고 삽을 놓고 울던, 고인의 어머니와 아내는 이제 연로해 몸도 마음도 성치 못하다. “며느리가 먹여주고 있는 대봉을/ 다 핥지 못하고/ 뚝뚝, 생혈(生血)을 떨구는 어머니의 그 생혈은 눈물일까 홍시일까. 눈도 귀도 어두운 노파는 눈이 잘 안보이는 이유가, 귀가 잘 안 들리는 이유가 노환에만 있지 않다. 그 시절에 젊은 아낙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고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었다. 노화로 인한 것이 아니라 60년 세월이 흘러도 아물지 않은 상처 때문임을 알고 있는 시인의 역사의식을 두 심사위원은 높이 사기로 했다. 생략과 비약이 좀 심한 것이 약점이지만 독특한 은유법과 의미심장한 상징화는 칭찬해줄 만한 장점이다.

 

작품 자체의 완성도는 소 발굽에서 꽃피고(박윤우)’가 단연 높았다. 문제는 이 작품을 받쳐주는 작품이 없다는 것이었다. 시 한 편만 놓고 본다면 신춘문예 당선작 중에서도 화제가 될 시인데 아쉽고 안타깝다.

 

도배사(홍정선)’의 튼튼한 주제의식, ‘늦은 마트(권수옥)’의 따뜻한 시선, ‘절름발이(이경동)’의 세심한 관찰력, ‘스타킹페티시(이인영)’의 신세대적 감각도 놓치기 아까웠지만 내년을 기약하며 더욱 열심히 습작하기 바란다. 한두 해 늦게 등단해서라도 오래오래 시를 쓰는 것이 중요한 일이므로. 당선자에게는 축하의 박수를 보내고, 낙선자들에게는 격려의 악수를 청한다.

 

- 심사위원 : 최동호, 이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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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이크 / 이인서

 

 

쨍하는 소리와 함께 앞집 유리창이 깨졌다 얼음판을 돌로 친 것처럼 어느 일성이 내놓은 모자이크, 여전히 붙어 있는 파편들은 찡그린 얼굴 같다

 

작은 구멍이 난 곳을 정점으로 사방으로 퍼져나간 사나운 선들, 그 앞을 누군가 서성거리고 창밖의 나무 한 그루가 모자이크 처리된 채 서 있다

 

살얼음이 낀 12월의 안쪽은 왠지 범죄 냄새가 난다 조각 난 얼굴 위로 가끔 변검을 한 목소리가 튀어나오고 모자이크 속 남자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깨어진 균열의 힘으로 버티고 서 있는 집, 깊숙한 구석까지는 채 다다르지 못한 금

 

깨진 햇빛 조각 하나가 섞여 있는 창문

 

문을 꽝, 닫으며 뛰쳐나가는 여자 뒤로 은행나무 마른 가지들이 뿌연 하늘을 모자이크 처리하고 있다

 

 

 

 

[당선소감] 겨울의 잔인한 풍경이 행운 가져다줘

 

얼마 전 스페인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바르셀로나, 피카소 작품이 전시된 미술관에서 피카소의 비둘기 한 마리를 사왔습니다. 가끔 들여다보며 주문을 외우곤 했지요.

 

그러던 중 잠깐 낮잠을 자고 일어나다가 꿈인 듯 생시인 듯 당선소식을 들었습니다. , 주문대로 이루어지다니 눈앞에서 희디흰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오르는 게 보였습니다.

 

늦게 시작한 공부로 인해 그동안 외로우셨을 우리 엄마, 사랑하는 가족들, 죄송해요. 그러나 사랑해요. 믿고 응원해준 준상 씨 고맙습니다.

 

그 겨울의 잔인한 풍경이 제게 이렇게 큰 행운을 가져다줄 줄은 몰랐습니다.

 

늘 생생한 상상력을 자극해주고 격려해주신 김영남 선생님과 정동진 회원님들 감사합니다. 그동안 길잡이가 되어준 수많은 시인들과 문장들에게도 고맙다고 인사합니다.

 

부족한 제 글을 뽑아주신 문정희 선생님, 유성호 선생님께도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더욱 열심히 좋은 시를 쓰라는 채찍으로 알고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쓰겠습니다.

 

 

 

 

말이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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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안정성·진정성·밀도 잘 어우러진 결실

 

경인일보 신춘문예에 참으로 많은 분들이 응모해주셨다. 그 매체적 위상이 하루하루 달라져가는 경인일보에 읽을 만한 작품들이 이렇게 많이 투고되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심사위원들은 본심에 부쳐진 작품들을 여러 차례 읽어가면서, 일부 작품들이 만만찮은 안목과 역량을 보여주었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시단의 주류 형식을 추수하거나 판박이에 가까운 관습적 상상을 보여주지 않고, 스스로의 경험적 구체성에 정성을 쏟은 것도 퍽 긍정적으로 느껴졌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시의 미래적 좌표를 개척해가는 생산적 면모라고 생각되었다. 심사위원들이 주목한 분들을 가나다순으로 밝히면 김건화, 김덕현, 김재희, 김효숙, 소선아, 오늘샘, 이인서, 이준성, 한용규 씨 등이었다. 오랜 토론 끝에 심사위원들은 이인서 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당선작으로 결정된 이인서 씨의 '모자이크'는 몇 개의 감각적 장면들을 모자이크한 일종의 감각 시편이다.

 

충격과 반응으로서의 '''파편' 사이에서, '구멍''사나운 선' 사이에서, '목소리''얼굴' 사이에서 각각의 모자이크들은 스스로의 독자성과 서로를 얽는 연관성을 동시에 완성하고 있다. 결국 "깨어진 균열의 힘으로 버티고 서 있는 집"이라든지 "깊숙한 구석까지는 채 다다르지 못한 금" 등의 표현이 시인이 ''를 통해 가 닿고자 하는 세계에 대한 불가피성과 불가능성을 동시에 알려준다. 그래서 "깨진 햇빛 조각 하나가 섞여 있는 창문"은 시인이 가 닿아야 할 ''의 궁극적 좌표가 되는 셈인데, 결국 이 시편은 자신이 어떤 시를 써야 할지를 모자이크로 그려낸 일종의 메타시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정성과 진정성 그리고 밀도가 잘 어우러진 결실이라고 생각된다.

 

당선작이 되지는 못했지만, 구체성 있는 언어를 통해 자신만의 언어적 성채를 구축한 경우를 많이 발견하였다는 점을 덧붙인다. 시적 대상을 좀 더 일상 쪽으로 구체화하여 우리 주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타자들을 애정 깊게 응시한 결실들도 많았다. 다음 기회에 더욱 풍성하고도 빛나는 성과가 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이번 응모자 여러분의 힘찬 정진을 당부 드린다.

 

- 심사위원 : 문정희,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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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의 난독증 / 조유희

 

 

의자 위에 두 개의 오렌지가 놓여있어요 나는 저 오렌지를 노란 앵무새라 불러요 한 마리는 어제로부터 날아왔고, 또 한 마리는 내일로부터 날아왔어요 어제의 혀가 내일의 혀를 그리워할 때, 당신은 내게 상큼한 거짓말로 다가왔어요

 

나는 당신을 앵무새라 불렀지요 당신과 나 사이의 간격은 너무 아슬해서 도저히 잡을 수 없어요 한 자리에 오래 머물지 못한 앵무새는 사·····해를 원했어요 그럴 때마다 하나씩 뽑아낸 깃털 때문인지 앵무새는 몇 초마다 각을 세워요 나는 우울한 오렌지를 갖고 싶었지요

 

구차한 변명 따윈 상관하지 않을래요 잊지 말자는 그 매혹적인 말, 그 말을 따라가면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요? 어제의 의자에 내가 머물지 못한 것은 오늘의 당신이 혼자이기 때문이지요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서 오렌지는 앵무새가 되고, 오늘의 의자가 어제의 오렌지를 기억하듯 나도 내일의 앵무새를 기억할래요 오렌지가 오렌지를 사랑하는 오늘밤에 과연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 경인일보 2014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앵무새의 난독증'이 타 신문 신춘문예에 중복 신청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미리 고지한 본사 신춘문예 응모 규정을 어겼기에 당선을 취소합니다.

 

 

 

[당선소감] 혼자 아닌 세상 가르침 새길 것

 

아코디언같은 계단을 오를 때마다 행진곡처럼 돌진하였고, 연가처럼 슬퍼서 주저앉았고, 그러다가 심장 박동같은 운명임을 실감하는 순간 그렇게 백일몽에서 깨어났다. 아무것도 아닌 나를 발견한다.

 

오후 다섯 시, 휴대전화가 울린다. 나는 얼떨결에 신춘문예 당선 소식을 듣는다. 담당 기자분이 "기쁘지 않느냐"며 되묻는다. "나는 잠결에 받아서요"라고 대답한다.

 

시는 나를 들여다보는 거울이자 절대자다. 원고지 같은 당선에 잠시 주춤한다. 혼자 걸어가는 길이기에 나는 두렵다.

 

하지만 혼자가 아닌 세상과 함께 내게 들려주던 선생님들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여정에 동참한다.

 

나를 아껴준 문우와 원우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무엇보다 좌절할 때마다 나를 격려해 준 가족과 형제들에게 감사한다.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 인사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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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연애시 빌려 불통의 시대 횡단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11인의 총 39편이다. 모처럼 따듯한 성탄 전날, 수원본사에서 회동한 심사위원들은 단도직입적으로 당선작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엘뤼시온''앵무새의 난독증'이 단연 돋보인다는 점에 쉽게 합의했다. 우선 두 후보자 모두 응모작들의 전체적 수준이 비교적 고르다는 점이 고려되었다. 작품들 사이의 비대칭성이 눈에 띄게 두드러지면 미래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의 시는 아류로부터 자유롭다.

 

만만치 않은 시력(詩歷)이 감지됨에도 불구하고 읽고 나면 어떤 기시감(旣視感)에 약간의 실망을 금치 못하던 작품들에 대한 안타까움 탓에 두 작품이 보여준 자신만의 활달한 어법은 종요롭다.

 

'엘뤼시온'은 무엇보다 관념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사유능력이 주목된다. "타인의 웅변에 깃들어 살아왔다"로 시작되는 그 서두도 범상치 않지만 남의 시선에 지핀 즉자(卽自)가 그 장막을 찢고 스스로 대자(對自)로 진화하는 정신의 율동을 싱싱하게 보여주는 바가 아름답기조차 한 터다. 그런데 시 후반부로 갈수록 주의적(主意的)인 경구(警句)들이 돌출하여 관념성을 노출하는 게 흠이다. 교훈시 비슷한 경향성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과제다.

 

'앵무새의 난독증''당신'의 유혹에 응답하는 일종의 연애시다. 그렇다고 그냥 익숙한 낭만적 서정시냐 하면 아니다. 지적 조작이 만만치 않다. 리듬과 리듬, 이미지와 이미지, 그리고 논리와 논리 사이의 연락이 마치 재봉 자국이 보이지 않을 만큼 조밀한 터다. 그렇다고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나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 시를 지배하는 어조는 기본적으로 해학이다. "어제의 혀가 내일의 혀를 그리워할 때, 당신은 내게 상큼한 거짓말로 다가왔어요"라든가, "잊지 말자는 그 매혹적인 말, 그 말을 따라가면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요?"처럼 말과 말 사이가 성글다. 그 틈 사이로 사랑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실험하는 물음이 솟아오른다. "오렌지가 오렌지를 사랑하는 오늘밤에 과연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연애시를 빌려 이 불통의 시대를 횡단하는 용기를 불사하는 시인의 뜻이 이만큼 절실하다.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삼는 데 최종 합의하였다.

축하한다. 정진을 바란다.

 

- 심사위원 : 고은, 최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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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지붕 / 장유정

 

 

바람으로 벽을 세운다.

해와 달을 훈제하는 뾰족한 꼭대기에는 바람의 뚜껑이 있다.

날씨 사이에 계절이 끼여 있는 벌판에

조립식 숨구멍을 튼다.

이것을 바람의 집이라 부르고 싶었다.

 

예각이 없는 벽,

구겨진 바람을 펴 문을 만든다.

환기창으로 들어 온 햇살은 시침만 있는 시간이 되고

불의 씨앗을 들여놓으면 집이 된다.

집에서 흔들리는 것은 연기뿐이라는 듯

발굽이 있는 흰 연기들이 꾸물꾸물 날아오른다.

 

한 그루 귀한 자작나무, 벌판의 한 가운데 서서 시계로 운영되고 있다 푸른 지붕은 바람의 소관이다. 반짝거리는 나무의 초침이 다 날아가도 재깍재깍 부속품들만 돈다. 흐린 날에는 시간도 쉰다.

 

빈집을 알리는 표시가 열려 있다

정착하는 곳마다 그 곳의 시간은 따로 있다

자작나무에 붙은 시간이 다 떨어지면 지붕을 걷고

게르! 하고 부를 때마다 게으른 잠이 눈에 든다.

바삭거리는 시간들이 날아간다.

집은 버리고 벽만 둘둘 말아 트럭에 싣는다.

떠도는 것은 지붕뿐이다.

 

 

 

 

그늘이 말을 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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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시의 공간에 가구 하나씩 들여놓을 것

 

아무 것도 없이 가구 하나 없는 방들에서만 느낄 수 있는 낭랑한 울림, 허허벌판은 텅 비어있음과 벌거벗음, 집의 출발점입니다. 그 나머지는 시간이 다 알아서 만들어줍니다.

 

2009년 여름, 문예창작학회에서 몽골을 방문했습니다. 상식 없이 따라나선 길, 주먹 크기만한 별들이 쏟아진다는 초원의 지도를 따라가는 버스는 열 몇 시간을 덜컹이며 달려갔습니다.

 

지친 방문객들에게 별은 깜빡 졸다 놓쳐버린 공연이었습니다. 갔던 길을 되돌아오는 길엔 드문드문 말과 양떼의 무리와 게르! 간혹 건너편으로 오색 무지개가 떴고, 비가 왔고 그리고 맑게 갠 하늘의 노을이 붉었습니다. 끝이 뾰족한 지붕 밑에 누워 아궁이 같은 난로에 불 지펴 잠이 들었습니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집을 구성하는 유별난 상상구조를 한 가지 차원이 결여되어 있는 공간으로 보았습니다. 걸어 올라가고 그에 맞먹도록 걸어 내려오는 행위로 이루어진 수직적 차원이 빠져 있는 계단, 단층뿐인 집.

 

여행에서 돌아와 숨차게 써내려갔던 시.

 

정확히 시가 무엇인지 갈팡질팡하는 저에게 '조금만 더'라고 격려의 눈빛으로 일러주시는 김수복 지도교수님, 문학 지도를 펼치며 명작의 길을 안내하시는 박덕규 교수님, 늦은 나이에 '문학 공부를 하는 것으로도 그래도 복이다' 하셨던 강상대 교수님, 수업 시간에 '이번 생은 실패했다'고 철학적 눈빛으로 항상 물으셨던 이시영 교수님, 순수한 열정과 문학적으로 예리한 김용희 교수님, 엉뚱함이 좋은 시를 쓰는 데 장점이 될 거라고 말하셨던 박샘, 시의 가지와 살을 냉정함으로 평해주는 혜숙샘, 처음 문학의 씨를 싹트게 해주셨던 경사대 교수님들과 동기들, 빛나는 시인과 작가를 꿈꾸는 대학원 선배님과 동기들, 군포여성문학회 회원들, 사는 것에 항상 촌스러워도 따뜻한 마음을 아끼지 않는 초등학교 오랜 벗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아내의 자리를 불평 없이 보듬어 주는 남편과 철없이 문학을 하겠다고 나섰던 엄마를 도리어 인정해주는 자랑스러운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해봅니다. 며칠 전, 두세 개의 보따리를 안고 있는 엄마를 꿈속에서 보았습니다. 지붕을 둘둘 말아 하늘로 가신 지 꼭 일 년 기일. 당선통보를 받고 먹먹했습니다.

 

미성숙한 제 시 평가에 날개를 달아 주신 최동호 교수님과 김기택 시인님께 감사 드립니다. 감았다가 풀었다가 감고 감기는 실패처럼 둘둘 말았다가 펴는 시의 공간에 가구며 의자를 하나하나씩 들여놓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심사평] 보이지 않는 것 읽어내는 힘 돋보여

 

본심에 오른 열 명의 작품은 안정적인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데다 저마다 밤을 새운 듯한 치열한 절차탁마의 노력도 보였다.

 

떨어뜨리는 것이 잔인하다고 느껴질 만큼 그 정성과 노고는 커 보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작품들의 완성도가 자유로운 시 쓰기를 즐기기보다는 경쟁에서 이겨야겠다는 집념으로 자신을 학대하여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하였다.

 

당선작의 모델을 미리 머릿속에 그려놓고 시의 형태와 창작방법과 사유를 그 틀에 억지로 맞추려는 듯한 태도가 여러 작품에서 보였기 때문이며, 어떤 작품들은 같은 사람이 쓴 것처럼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를 깨뜨리고 시 쓰기를 즐기면서 자유로워져야 남들과는 다른 개성도 나오고 새로움도 나올 수 있다. 창작은 이래야 한다는 경직된 태도는 시 쓰기를 괴롭게 만들고 나아가 호기심과 상상력까지 고사시킬 수 있다.

 

장유정의 '떠도는 지붕'은 이런 우려를 어느 정도 덜어준 수작이어서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쉽게 의견이 일치하였다. 유목민의 천막집인 게르를 소재로 한 이 작품은 보이는 것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읽어내는 관찰력이 돋보인다.

 

게르의 잠재적인 구성 요소인 바람과 시간과 불의 운동을 역동적으로 묘사한 솜씨도 볼 만하다. 하늘과 바람으로 숨 쉬고 자연의 움직임을 읽으며 떠도는 유목민의 자유와 야생의 정신을 집이라는 시공간의 형식으로 구현한 시적 인식도 탄탄하고 믿음직하다. 당선을 축하한다.

 

박복영의 '골동품 가게를 둘러보다'는 평범한 대상에서 서정적 미적 체험을 이끌어내는 관찰력과 자연스럽고 차분한 어조가 돋보였지만, 상투적인 직유와 동어반복이 많아 긴장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했다. 남시우의 '리어카 화단'은 대상에 대한 따뜻하고 긍정적인 시선과 꽃의 이미지를 거리의 풍경으로 변주하는 상상력이 흥미로웠지만 과거를 회상하면서 전개하는 시적 인식과 형식이 상투적이었다.

 

장서영의 '시소의 빨간 경사는 때때로 무료하다'는 당선작과 겨룰 만한 완성도를 지니고 있고 상상력도 신선하여 호감이 갔지만, 신춘문예용으로 만든 듯한 느낌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은 수준이 떨어져서 신뢰하기 어려웠다.

 

- 심사위원 : 최동호·김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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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이 있던 자리 / 이승혁

 

 

잠 못 이루는 잔별들이 풍덩 깊은 우물 속으로 빠져드는 밤

할미의 쇠잔한 잔기침을 받아내는 밤안개가

처마 끝에서 너울지며 유영하고 있었지

빨랫줄에 걸린 물때의 온기가 자정을 적실 때면

어린 나의 입속으로 곶감같은 어미의 숨결이 아득하게 쏟아졌었지

위태로운 유년을 닮은 초승달이

내 여린 이마를 가만히 보듬고 가곤 했지

바다의 능선을 타고 돌아오던 메아리가

어린 치어들을 깨워놓고 산 그림자 속으로 흘러가던 날

두레박을 혼자 끌어 올리자 변성기의 새벽들이 사춘기처럼 찾아왔지

할머니, 내 울대의 잔별들이 사라졌는지

우물에선 맑은 목소리가 올라오지 않아요

누군가 머릿속에 방생한 악몽들만 짜디짠 입가를 헤엄치고 있어요

줄이 끊어진 두레박은 우물 속 깊이 가라앉았고

전설들 두레박을 기울여야 또 다른 힘을 얻던 유년의 꿈들도

더는 담겨지지 않아요

얘야, 네 어미의 바다는 새벽시장 마른 비늘의 궤짝들 틈이란다

횟속 깊이 박힌 몇 개의 미늘과 목젖을 열 때마다

아아.. 말이 되지 못하는 실어증의 힘으로만 너를 낳았단다

그렇게 할머니의 유언이 몇 줌 두레박 속의 전설로 담겨지는 사이

어머니의 바다 더 깊은 궤짝들 틈으로 실종되었고

지금은 어떠한 우물거림으로도 씹히지 않는 먼먼 날들의 그 바다

저물녘

늦가을의 핸들을 구부리며 깃드는 *신문리 451번지의 안마당 고요가

방금 전 그 파도에게라도 들켰는지

아주 오랜 옛날의 漁信처럼 기억의 지느러미 하나로 획 사라지고

있었다

 

* 강화읍의 마을주소

 

 

 

 

 

[당선소감] 3친구들에게 제일 먼저 감사 이젠 진짜 내 이야기 시작할 때

 

지난 가을 내 지인으로부터 건네받은 시제가 우물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날 저녁 습작의 분량으로 쓰여지게 된 시, 그게 당선작이라니.

 

우물, 아직은 내 기쁨의 표정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되비춰지지 않는다. 미정인 채로 남아있는 대학 진로와 거리의 크리스마스 캐럴, 그 겨울을 비집고 내가 어머니의 분노에 다급해질 때마다 숨어들던 어린 시절의 식탁 밑이 떠오른 건 또 왜일까. 지금은 어떠한 수사도 어떠한 문장도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바닷가 파도소리 만큼이나 멀게 느껴진다. 이제부터는 내 본래의 이야기를 조금씩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먼 소년기때 조립하다가 중단된 서랍속의 장난감들과 저녁이면 하늘의 별 대신 아버지의 퇴근길 호프집 풍경에 고정시켰던 내 망원경, 형을 데리고 나서던 초등학교 뒷길, 문구사 아저씨의 색소폰 연주, 모두 내 시의 전리품이었음을 이제서야 실토한다.

 

내 기쁨의 이면들을 가장 먼저 친구들에게 옮겨본다. 입시에 눈이 빨개진 강화고등학교 3학년 1반 친구들, 자율학습을 몰래 빠져나와 어느 길이든 걸었던 방황의 맨 마지막 코스였던 반지하에서 노래로 허기를 때우던 일행들, 입시의 기로에서 낭패에 빠질 때마다 투신 제의를 해오던 도시의 친구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너희들이 있어 지난 한 해의 비극도 희극으로 뒤바뀔 수 있었다. 이튿날이면 교과서 대신 또다른 종류의 천재를 부여해주시던 김영언 선생님, 묵묵히 걸음마 떼기를 기다려 준 가족들, 반항의 시간들을 지켜봐 주신 담임 선생님,  10대의 처음이자 마지막 멘토가 되어주신 김종연 선생님께 감사를 올립니다

 

무엇보다 저를 뽑아주신 민용태 교수님, 김영철 교수님, 먼 길 가는 수사의 여정에 누가 되지 않도록 정진하는 시인이 되겠습니다. 다시 한번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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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유년기 시적 감수성 한데 묶어현실·꿈 오가는 상상력 돋보여

 

본선에 올라온 35편의 작품들은 시적 완성도에서 일정 수준에 이른 것은 분명하지만, 전반적으로 관념의 덩어리를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 결함을 지니고 있다. 파편적 이미지 다발의 연쇄로 서술의 골격이 약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추상성과 관념성이 구체적 시적 진술로 체화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다. 엘리어트의 말대로 시는 이해되기 전에 전달돼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소통과 통섭이 이 시대의 가치론적 코드인 만큼 수용미학적 차원에서 시적 소통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할 일이다.

 

심사위원들은 이러한 흐름에서 벗어난 세 편의 작품에 주목했다. 먼저 최영랑의 '고동의 길'은 고동의 길에서 인생의 굴곡을 반추하여 삶의 본질을 천착하는 형이상학적 주제를 실현한 작품이다. 관념적 주제를 구체적 형상과 비유를 통하여 설득력있게 풀어가고 있다. 하지만 형상화의 초점이 다소 산만하게 흐트러져 시적 텐션이 조밀하게 형성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다. 허영술의 '치즈의 눈물'은 원룸촌의 고달픈 삶과 슬픔의 내부를 의식의 소도구들을 동원하여 정치하게 포착하고 있다. 하지만 다소 정제되지 않은 이미지의 충돌로 진술의 정체성이 모호해지는 결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승혁의 '우물이 있던 자리'는 시적 감수성의 통합에 성공한 작품이다. 유년기의 잡다한 체험과 소재, 의식들을 하나의 감수성으로 통합하여 내적 질서를 창조해 내는 힘을 보여주고 있다. 시적 구조의 근간을 이루는 유년기와 성년기의 상상체계에 '잔별, 초승달, 두레박, 바다' 등의 은유기제를 덧입힘으로써 감수성의 통합에 성공하고 있다. 유년기의 기억을 인상의 연쇄로 묶어내어 튼튼한 회상구조의 내적 통로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내적 통로는 시적 화자의 내밀한 언술로 착색되어 설화적 상상력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 다양한 의식과 체험들을 개성적 감성으로 흡인하여, 현상과 환몽의 의식세계를 넘나드는 환유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아울러 이미지 다발의 유기적 짜임으로 의미생성을 이루는 생산적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시적 성취를 고려하여 '우물이 있던 자리'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 심사위원 : 민용태·김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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