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레옷을 입은 구름 / 이은봉
걸레옷을 입은 구름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자꾸 달과 나 사이의 교신을 끊는다 교신이 끊기면 달에 살고 있는 잠의 여신을 불러올 수 없다
옛날 구름은 그냥 수증기, 수증기로는 나와 달 사이의 교신을 끊지 못한다 지금 구름은 고름 덩어리, 걸레옷을 입은 구름은 제 뱃속 가득 납과 카드뮴 감추고 있다
이제 내 숨결은 달에게로 가지 못한다 달의 숨결도 더는 내게로 오지 못한다
달과 숨결을 주고받을 때라야 잠의 여신은 숨결을 타고 내려와 내 몸을 껴안을 수 있다 잠의 여신이 내게로 내려오지 못하는 것은 걸레옷을 입은 구름이 제 뱃속에 납과 카드뮴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걸레옷을 입은 구름이 중화학공장 출신이라도 되는가
도대체 바람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아직도 비닐장갑을 낀 채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저 한심한 바람이라니! 잔뜩 인상을 찡그린 채 도시의 뒷골목 어슬렁대고 있는 저 조폭 똘마니 같은 바람이라니!
걸레옷을 입은 구름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자꾸 나와 달 사이의 교신을 끊는다 교신이 끊기면 달에 살고 있는 잠의 여신을 불러오지 못한다
바람이 걸레옷을 입은 구름을 밀어내지 못하면 아무도 잠들지 못한다 하느님도 눈 부릅뜬 채 몇 날 몇 밤을 깨어 있어야 한다.
[수상소감] ‘질마재신화’ 혹은 ‘질마재문학상’에 대한 몇 가지 상념
졸시집 『걸레옷을 입은 구름』으로 ‘질마재문학상’을 받게 되었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아직도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질마재문학상은 우선 미당의 시집 『질마재신화』(일지사, 1975)를 떠올리게 한다. 『질마재신화』는 이내 미당의 고향마을로 달려가게 한다. 미당의 생가와 문학관을 방문했던 적이 모두 몇 번인가. 10여 차례가 넘으리라. 학생들과 함께 찾았던 적만 해도 여러 차례이다.
‘질마재문학상’은 미당의 시업을 기리는 데 의미가 있다. 우리 세대의 시인 중 미당의 시를 읽지 않고 시를 공부한 사람은 없다. 나도 역시 미당의 시를 읽으며 시를 공부해왔다. 미당 전집을 읽다가 쓴 논문만도 2편이나 된다.
한국현대시사에서 미당만큼 좋은 시를 쓴 시인은 많지 않다. 미당의 시집 가운데에서는 『질마재신화』보다 『떠돌이의 시』(민음사, 1976)나 『80소년 떠돌이의 시』(시와시학사, 1997)를 좀 더 좋아한다. 물론 미당의 시집 중에는 ??늙은 떠돌이의 詩??(민음사, 1993)도 ‘떠돌이’라는 말을 쓰고 있기는 하다. 내가 미당의 시집 가운데 『떠돌이의 시』나 『80소년 떠돌이의 시』를 좀 더 좋아하는 까닭은 단순하다. 이들 시집에는 미당 나름으로 받아들인 당대의 삶과 생활과 현실이 좀 더 잘 육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당의 시집 『떠돌이의 시』나 『80소년 떠돌이의 시』를 좀 더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질마재신화』를 무시할 수는 없다. 이 시집 『질마재신화』 역시 미당이 받아들인 당대의 삶과 생활과 현실이 잘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이런 이유만으로도 나는 미당의 이 시집 『질마재신화』를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다.
미당의 이 시집 『질마재신화』는 첫째 백석의 시집 『사슴』에 대한 대타적 자의식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이 시집에는 새마을운동, 산업화, 개발과 건설 등 이른바 근대화에 대한 미당의 대타적 자의식이 작동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집과 함께 하는 미당의 대타적 자의식 중에는 1960년대 이래 우리 시단을 풍미해오던 모더니즘시에 대한 반감도 들어 있다고 이해된다.
미당의 고향 질마재는 아직 그런 대로 잘 보존이 되어 있다. 하지만 내 고향 ‘막은골’은 흔적도 사라져버려 자꾸 가슴을 아프게 한다. 세종시가 건설되면서 완전히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나는 내 고향의 모습을 시로라도 남기고 싶어 「막은골 이야기」 연작시에 매달리고 있다. 백석의 시집 『사슴』이나 미당의 시집 『질마재신화』가 없었다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질마재문학상’을 받은 만큼 더욱 분발해 졸시집 『막은골 이야기』를 잘 완성해볼 생각이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세 분의 심사위원, 김남조, 문효치, 김승희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특별한 연고가 없는 데도 받는 상, 고맙고, 송구할 따름이다.
[심사평] 인생을 배운 후에 시가 나올 때의 무르익음의 언어
제5회 <질마재 문학상> 심사에 올라온 시집들을 살펴보면서 느낀 것은 지난 한 해의 시집 출간이 양적으로 질적으로 매우 풍성했다는 것과 다양한 개성의 스펙트럼을 지닌 시인들이 기량을 빛내며 만만찮은 성좌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었다. 심사위원들은 예심을 거쳐 올라온 열권 남짓한 시집들을 논의했으며 우리 시단의 풍성함과 다채로움에 오롯한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또한 어떤 시집들은 전문적으로 기교를 배운다는 요즘 가수들을 생각나게 한다는 점에서 기량은 우수하지만 무언가 허전하고도 화려한 공허함을 주기도 했다. 결국 좋은 문학이란 포스트모던 감각으로 명멸하는 이 어지러운 세계에서 그 표피를 스치며 지나가는 얇은 언어들의 무도회라기보다는 깊은 삶에서 시간과 경험의 가혹함을 견디면서 오랜 숙성의 항아리를 거쳐 우러나온 무르익음의 언어가 아닐까, 라는 의견이 오갔다. 결국 시적 언어의 문제는 ‘교감과 감동’인 것이다.
결국 심사위원 전원의 일치로 이은봉 시인의 시집 『걸레옷을 입은 구름』이 제5회 <질마재 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만만찮은 인생의 무게와 시간의 숙성을 거쳐 깊은 상상력과 따뜻한 언어로 묵직한 삶의 정경을 보여주는 이은봉 시인의 시세계는 자연의 넓은 생명력과 인간애를 바탕으로 산업화 시대에 버려진 우리 이웃의 그늘을 잘 보여준다. 그의 시에는 늘 비속한 세계에서 망가진 개인들의 이력이 들어있고 아픈 기억의 시간이 축적되어 있다. 넓은 가슴의 긍정이 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폐타이어’에서 ‘지장보살’을 보며 “지장보살이 아프다/ 땅도 아프다 검게/ 저무는 것은 다 아프다// 아픈 몸으로 그는 다시/ 거름을 만들고 있다 샐비어 몇 송이/ 빨갛게 꽃피울 꿈을 꾸고 있다”처럼 망가진 자연의 순환 속에서도 자연과 이물질인 문명과의 불가능한 순환을 꿈꾸기도 한다. 그의 시 속에는 만물이 그물코처럼 얽혀있는 존재의 꿈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하나의 이물질(문명)로 인해 그 만물의 순환이 깨어진 끔찍한 현장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시인이란 바로 그 불가능한 것의 순환의 둥근 원환圓環을 포기하지 않고 꿈꾸는 자가 아니겠는가.
시집 <걸레옷을 입은 구름>은 “삶의 어두운 이면을 그리면서도 황폐하지 않고 따뜻한 시선으로 주변의 생을 관찰하는 안정된 상상력”(김남조)과 “「민들레꽃」이 보여주는 따뜻한 감수성과 자연과의 교감 뒤에 숨어 있는 개인의 슬픔을 포착하는 날카로운 시선”(문효치)을 통해 아름다운 대자연 속에서도 무언가 망가진 부조화를 느끼는(만드는) 근대 인간의 소외와 슬픔을 웃음기 묻은 시선으로 원숙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제5회 질마재 문학상의 수상 시집으로 선정되었다. 축하를 드리며 더욱 대성을 기원한다.
심사위원 김남조, 문효치, 김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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