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수상] 실업일기13 / 김병섭
봄바람에 미친 듯 나풀대는 고추비닐 움켜쥐고 일흔넷 구부정한 밭고랑을 오작오작 오르던 어머니, 긴긴 해 새참 내온 식빵도 우유도 마다한 채 후- 숭늉 한 양재기 벌컥벌컥 들이키고 애비두 인젠 무슨 일이든 해야 할 텐데 넘새 부끄러 워칙 헌다니
뭉그러진 두둑 흙 한 줌 소복이 떠올리며 손주 자식 잠재우듯 토닥거리다 씀벅슴벅 돌아보는 뒷산
한수처럼 야위어가는 진달래 진달래 꽃
[우수상] 주조장 곽씨 아저씨 / 조경선
새벽 이슬 누구보다 가장 먼저 차에 싣고
눈 감도도 달릴 수 있다는 시골마을 구석구석
막걸리 나르는 주조장 곽씨아저씨
얼굴 반쯤 가리는 갈색 선글라스에
아침 인사가 서글서글 합니다
어느 마을 누구네 집에 무슨 일 있는지
한 바퀴 돌다보면 죄다 꾀고 있어
울다 웃다 보면
내가 남인지 남이 나인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누구네 노인양반 돌아가신 마을 돌아 나오면
잠깐 막걸리 주문이야 늘지만
노인들 다 가고 나면
누가 마걸리 시킬까
저 마을은 텅 비게 되는 건 아닐까
한시름이랍니다
막걸리 훔쳐 먹는 푸른 머리 학생놈도 귀엽고
이장 됐다고 막걸리 돌리는 어른도 정겹고
새참에 막걸리 한 병 잊지 않는 새댁도 이쁘다는데
막걸리를 배달한 건지
알싸한 마음을 배달한 건지 모를 일입니다.
[우수상] 아내 / 배재운
용돈 좀 벌어 써야겠다고
서너 달만 일해보겠다고
공장에 나가는 아내
지하실이라 공기도 나쁘고
팔이 아파 못 하겠다며
그만둔다고 하더니
자고 나면
또 출근을 한다
내가 벌어
내가 한 번 써보겠다더니
아이들 학원비나 벌어야겠다고
조금만 더 다닌다더니
아직도 일 나간다
뻔한 살림살이 아이들은 커가고
남편 직장에 고용불안 생기니
이젠 안 나갈 수도 없는 형편
팔 아프다
다리 아프다
끙끙대는 게 안쓰러워
그만두라고 큰소리 한 번 쳐보지만
아내는
이젠 내가 벌지 않으면 안 된다며
오늘도 공장에 나간다.
밥풀꽃 / 배재운
지붕 위에
햐얗게 핀 밥풀꽃
어디서 왔나
어쩌다 한 뼘의 땅
한 줌 흙 속에 뿌려내려
꽃을 피웠나
슬라브 지붕 한켠
켜켜이 쌓인 먼지 속에서
얄굿은 바람
억수 같은 비 맞고
모질게도
홀로 견디더니
끝내
꽃을 피웠구나
온몸으로 불꽃과 싸우는
용해공을 닮아
땀 절은 작업복 소금꽃 같은
꽃을 피웠구나.
[심사평] 시를 뽑고 나서
구조조정이다 실직이다 해서 요즘 노동자들이 받는 시련은 아이엠에프 때보다 더 심각하다는 현실을 반영하듯 시의 소재도 거의 실직이나 고용 불안 혹은 국민의 정부 아래서도 노동자가 당하는 착취, 박해 등이다. 국민의 정부가 서면 조금은 나아지려니 했던 기대가 무너진 데 대한 절망감, 분도 같은 것도 많은 사람들의 시에 나타나 있다.
가장 감동적으로 읽은 것은 ‘실업일기 13’, ‘실업일기 14’, ‘안됐더먼’등 이지수의 시들이다. 일단 작중화자와 작자를 일치시킨다면 작자는 구조조정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실직을 한 것 같다. ‘어머니’라는 부제가 붙은 ‘실업일기 13’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긴긴 해 새참 내온 식빵도 우유도 마다한 채 후- 숭늉 한 양재기 벌컥벌컥 들이켜고 애비두 이젠 무슨 일이든 헤야 헐 텐데 넘새부끄러 워칙헌다니…” 시는 작은 말을 가지고 큰 얘기를 하는 것이란 말이 있지만, 이 몇 마디로 실직으로 걱정이 태산 같은 어머니의 모습을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여주고 있다. 또 ‘광복 55주년’이라는 부제가 붙은 ‘안됐더먼’은 화자의 감정이나 생각은 일절 배제한 채 노부부의 저녁 한때의 스케치를 가지고 지도자 또는 지배층에 대한 불신과 실망감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시력이 꽤 된 기성시인들로서도 쉽지 않은 일로, 작자의 솜씨가 상당한 수준임을 말해주는 작품이다.
배재운의 시도 재미있게 읽힌다. “지붕위에/ 하얗게 핀 밥풀꽃”에서 “온몸으로 불꽃과 싸우는/ 용해공”의 이미지를 보는 ‘밥풀꽃’도 재미있지만, 생일날 친구들을 초대해서 피자나 햄버거를 사줄 수는 없을 테니까 짜장면 한 그릇만 사달라는 아이의 작아지는 꿈을 노래한 ‘생일 선물’이 더 실감난다. “아이의 꿈은 자꾸 작아지고/ 아비 타는 속은 새까만 짜장이고” 같은 구절은 아무나 쓸 것 같으면서도 그렇게 쉽사리 얻어지는 표현은 아닐 터이다. “용돈 좀 벌어 써야겠다고” 직장에 나가다가 이제는 남편의 고용이 불안하니까 아픈 팔 다리 끌고 기를 쓰고 직장에 다니는 ‘아내’도 오늘이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는 시다. 배재운의 시들을 읽으면서 시는 본질적으로 현실의 요구에 대한 대답이라는 마야꼬쁘시끼의 주장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조경선의 시들은 조금 다르다. 말하자면 농촌시 또는 농민시라고 하겠는데 그가 보낸 시들은 직접 농사를 지으며 쓴 것들로서, 농사꾼 냄새가 풀풀 나는 시들이다. ‘좋겠네, 도시 처녀 농촌으로 시집가서’는 그가 농촌으로 시집오기가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노래하고 있는 자화상으로, 시가 각박하지 않고 넉넉하다. ‘동그런 밭’은 아름답다. “마침내 나도 그럴까/ 이 푸른 들판을 사랑하여/ 노동하고 뒹굴며 싸우다가/ 그대로 둥그런 밭이 될까” 같은 표현은 작자가 넉넉하고 아름다운 마음과 함께 그 마음을 말로 형상화 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가지고 있음을 알게 한다. 하지만 가장 뛰어난 시는 역시 “새벽 이슬 누구보다 가장 먼저 차에 싣고/...막걸리 나르는 주조장 곽씨 아저씨”를 노래한 ‘주조장 곽씨 아저씨’다 어느 고장에도 한두 사람있게 마련인, 그래서 그 사람이 곡 시골의 풍경이 되고 있는 곽씨 아저씨가 바로 지금 술 배달을 하고 있는 것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하는 시다. 조경선은 사람을 몇 마디의 말로 그리는 데 특별히 재간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이 점은 잘 살리면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표성배의 시도 일정한 수준에 이르러 있는 시였다. 특히 구조조정시대의 공포와 걱절감을 노동자의 아내의 독백의 형식으로 형상화한 ‘퇴출시대’는 실감도 나고 틀도 탄탄하여 울림을 준다. 그밖에 ‘겨울 둥지’를 보낸 사람의 시도 충분히 선에 들만큼 훌륭했지만 다른 여러 군데서 당선을 한 사람이어서 일부러 뺐다.
- 심사위원 신경림, 이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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