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서 사슴까지 / 김중일
어느 날 내 가슴이 불타면 어쩌나.
내 사슴은 어쩌나.
깡마른 사슴. 비 맞는 사슴. 눈물 맺힌 사슴. 다리 부러진 사슴. 멍 투성이 사슴. 땅에 파묻힌 사슴. 아빠 없는 사슴. 엄마 없는 사슴.
폐에 바닷물이 찬 사슴. 바다가 된 사슴. 자식 잃은 사슴.
집으로 돌아오는 늦은 밤, 어김없이 마중 나온 사슴. 폴짝 내 가슴 속으로 뛰어드는 사슴. 잠 못 드는 사슴, 때문에 점점 커지는 가슴. 점점 자라는 사슴이 사는 사람의 가슴.
온몸에 멍이 든 알몸의 네 살배기 아이가 제 손을 과자처럼 선뜻 내민다. 사슴은 잘도 받아먹는다. 꽃잎보다도 작은 나뭇잎 한 장 남김없이, 내 가슴팍에 앉아 사슴은 다 먹어치운다. 그렇다고 이 계절이 오는 걸 막을 수는 없다. 가는 걸 붙잡아 놓을 수도 없다.
이 계절에 일어난 참혹한 사건으로 사슴은 태어났다. 누군가는 죽고, 사슴은 태어났다. 나는 죽은 이의 가슴을 사슴이라고 부른다.
사슴은 태어나자마자 눈 뜨고, 일어섰으며, 매일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려 한다. 나는 그 여정을 가슴에서 사슴까지, 라고 한다.
무너진 내 가슴에서 태어난 사슴 한 마리가, 자란다. 내 가슴은 사슴 따라 점점 커진다. 계속 커진다.
어느 날 가슴이 터지고 불타면 내 사슴을 어쩌나.
한순간 구름처럼 하얀 재가 된 내 사슴을 어쩌나.
사슴 한 마리 사슴 두 마리 사슴 세 마리…… 아무리 백까지 백번을 헤아려도 잠이 오지 않는다.
가슴에서 사슴까지
nefing.com
광주대학교(총장 김혁종) 문예창작과 김중일 교수가 시집 ‘가슴에서 사슴까지’로 제19회 지훈문학상을 수상했다.
지훈문학상은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고결한 정신을 기리고자 제정된 상이다.
김중일 교수의 수상작 ‘가슴에서 사슴까지’는 부조리한 삶의 면면을 섬세한 이미지와 담담한 언어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 교수는 200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신동엽문학상과 김구용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한편 재19회 지훈문학상 시상식은 오는 27일 나남출판사 창립 40주년 기념식과 함께 경기도 포천시 나남수목원 책박물관에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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