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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끓이다 / 장현숙

 

 

책은 책마다 맛이 다르다

 

초록 표지의 책에선 식물의 맛이 나고 지구에 관한 책에선 보글보글 빗방울 소리가 나고 어류에 관한 책에선 몇천 년 이어온 강물 소리가 난다

 

곤충에 관한 책에선 더듬이 맛이 나, 이내 물리지만

 

남쪽 책장은 마치 텃밭 같아서 수시로 펼쳐볼 때마다 넝쿨이 새어 나온다 오래된 책일수록 온갖 눈빛의 물때와 검정이 반들반들 묻어있다 두꺼운 책을 엄지로 훑으면 압력밥솥 추가 팔랑팔랑 돌아간다

 

침실 옆 책꽂이 세 번째 칸에는 읽고 또 읽어도 설레는 연애가 꽂혀 있다 쉼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누군가와 겹쳐진다 그러면 따옴표가 보이는 감정을 챙겨 비스듬히 행간을 열어놓는다

 

새벽까지 읽던 책은 바짝 졸아서 타는 냄새가 났다

 

책 속에 접힌 페이지가 있다는 건 그 자리에서 눈의 불을 켜야 한다는 것, 무엇보다도 일기장이 제일 뜨겁다 그 안에는 태양이 졸아들고 별이 달그락거리면서 끓기 때문이다

 

책을 끓여 식힌 감상을 하룻밤 담가 놓았다가

여운이 우러나면 고운 체로 걸러내야 한다

그 한술 떠 삼키면

마음의 시장기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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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소감] "힘들 때 찾아온 아버지의 선물"

 

치과 진료 중이었습니다. 손에 꼭 쥔 전화기 진동이 울려 잠깐만요 전화 좀 받아볼게요 하고 접한 당선 소식이었습니다. 윙윙거리는 기계음에 온몸에 전율이 일었습니다. 살면서 이렇게 귀한 순간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요.

 

열흘 전 곁을 떠나신 아버지 얼굴이 어른거렸습니다. 병간호 잘해줘서 고맙다고 등을 토닥여주시며 무슨 일이든 잘 될 거라던 아버지가 선물을 주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장과 그 흐름은 그 사람의 성격과 같다고 하는데, 나는 종종 한 박자 느리고 생기가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꼭 맞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마다 책들의 제목을 읽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세상에 제목들만큼 알맞은 문장이 있을까요. 또 책들은 그 맛이 제각각입니다. 짠맛 신맛은 물론 마음에 꼭 맞는 맛들도 있습니다. 새벽까지 읽던 책이 뜨겁게 졸아서 내 가슴속 지워지지 않는 맛으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부족한 제 시를 뽑아주신 한라일보와 심사위원 김병택, 양영길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문장의 흐름과 이미지를 선연하게 가르쳐주신 윤성택 시인님 감사합니다. 시클, 김산, 이종섶, 이수정 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교수님들과 어려운 길을 함께 걸어가는 동료들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경애하는 엄마, 동생 현남, 옥희 그리고 늘 곁에서 응원해 주는 남편 김병기, 민서, 민규, 주오에게 사랑한다는 말 전합니다.

 

 

 

 

[심사평] 현실 속 사물과 상상력의 절묘한 조화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은 총 71편이다. '시적 산문'을 산문시로, '공상'을 '상상력'으로 오해하고 있는 소수의 작품을 빼면, 대부분의 작품은 보통 이상의 높은 수준을 보여 주고 있다고 판단된다.

 

우리는 미리 마련한 심사 기준에 유의하면서 모든 작품을 정독한 뒤, 토론 대상으로 삼을 4편의 작품을 선정했는데, '여름의 부피들', '발자국 상점', '구석구석의 힘', '책을 끓이다' 등이 그 작품들이다.

 

여름의 풍경 속에서 살고 있는 '엄마'를 시적 이야기로 다루고 있는 '여름의 부피들'에 대해서는 여러 곳에 널려 있는 상투적 비유가 작품을 진부하고 느슨하게 만들고 있는 점이 지적되었다.

 

상상력은 현실에 토대를 둘 때에만 나름대로의 가치를 발휘한다. '발자국 상점'에서는 여과 장치 없이 생경한 모습으로 드러난 상상력이 독자의 공감을 크게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시상의 전개가 치밀한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구석구석의 힘'에서의 '구석구석'이라는 핵심어는 추상성에 의존하는 단계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있어서 아쉬웠다.

 

'책을 끓이다'는 현실 속의 사물인 '책'과 그에 수반하는 작자의 상상력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작품이다. 시어 운용의 능숙한 솜씨가 사물을 자유롭게 바라보는 능력을 배가하고 있는 점이 크게 돋보였다. 시적 화자의 스탠스가 분명하여 독자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다는 점도 이 작품의 장점에 속한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정하는 데에 합의했다.

 

당선자에게는 축하의 박수와 함께 더 정진하기를 바라고, 다른 응모자들에게는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 심사위원: 김병택(시인, 문학평론가), 양영길(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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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달과 물고기 / 김미경

 

 

물고기는 내 오빠다

 

오빠가 물고기인줄 알면서도 내 엄마 달은 물살에 휩쓸려 떠밀려가는 물고기를 잡지 못한다

 

그러나 엄마는 달이다

 

눈물이 없는 달

 

우리가 잠든 밤마다 환하게 나타났다 사라졌다하면서 놀라고 걱정스럽게 만드는 달 말이다

 

이런 달의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생각만 많다

 

물거품이 이는 곳에 가면 은빛 곡선을 가진 오빠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아기가 발을 핥고 있어서 젖 물릴 때가 됐다고 한다

 

물고기의 얼굴은 내 얼굴

 

우리는 형제다

 

물속에 잠긴 달이 운구릉을 헤적거리다 곱은다리에서 암흑 속으로 내려간다

 

이번에는 검은 그림자에 싸여 비틀거리는 아빠도 함께다

 

그러나 엄마는 달이다

 

힘이 세다.

 

 

 

 

 

[당선소감] 버티다 보면 다른 것들이 훨씬 더 견딜 만해질지 모른다

 

녀석은 주로 빛이 어스름할 때 또는 밤중에 그리고 가끔은 흐린 날에 물었다.

 

나는 가슴 위에 놓인 녀석의 무게를 견뎌내야 했다. 녀석을 위해 책상에 먹이를 놓아두었다. 녀석이 뭘 먹고 사는지, 뭘 좋아하는지를 알아내야 했으니까.

 

식성은 의외로 까다로웠다. 살아있는 내 피 외엔 건드리지 않았다. 배 밑에서 올라오는 묵직한 나의 공포감을 눈치 채고 그것이 녀석을 신나게 한 게 분명했다. 붕 뜬 채 내가 나를 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고 있었다.

 

녀석은 인류 친척들과 오래 살아 그들을 좋아한다고 했다. 배가 불러 만족하면 손가락에 침을 묻히더니 불멸의 삶을 지속하기 위해 스스로를 가둔다며 책더미 속으로 기어들었다. 녀석은 음지에 숨어 지내야 했다. 가끔 마주치는 것조차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으니까.

 

아니 녀석에게 자극받으면 늘 반응하는 우리랑 놀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끈적이는 몸을 비벼대며 혼자 있는 것을 필사적으로 반겼다. 아무런 저항 없이 부드럽게 우리를 뚫어 내부를 천천히 비워내는 것이 녀석의 목표일지 모른다. 마지막까지 녀석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찾아두고 먹어두고 그래야 녀석에게 영원히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나도 녀석처럼 꼼짝 않고 책장 이음새에 기대서 잠을 자 두는 게 좋겠다. 끈질기게 버티다 보면 다른 것들이 훨씬 더 견딜 만해질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다.

 

잠깐 내린 눈송이가 아이들처럼 골목길을 뛰어다닌다.

 

33년째 묵묵히 신춘문예를 운영하고 있는 한라일보사에 감사드린다. 내 시가 부족한 만큼 심사위원들에 대한 고마움이 크다. 음악적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진용진 선생님과 시의 집을 짓는 김기호 대목 그리고 '시와몽상' 시우들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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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활달한 시적 상상력과 사물을 꿰뚫어 보는 개성적 시선 돋보여

 

2022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는 전국 각지에서 199명이 총 1142편의 작품을 응모하여 성황리에 마감되었다. 코로나로 힘든 시국 속에서도 문청들의 시에 대한 열정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시 부문 199명의 응모자의 작품 중 예심을 거쳐, 본심에서는 최종 10편의 작품이 거론되었다.

 

올해 신춘문예 응모작들의 특징은 시의 길이가 길어지고 산문시 형태가 많았다는 점이다. 내용면에서도 현대인들의 소외와 불안, 서정성이 짙은 작품 등 다양하고 참신한 시적 경향을 선보였다.

 

본심에 오른 응모작 중에서 눈길을 끈 작품은 '엄마 달과 물고기', '거품공장 공장장 탁씨', '뜨겁고 흰 유언' 3편이었다. '거품공장 공장장 탁씨'의 경우, 아웃사이더들의 삶을 조명하고 있으며, '구름(담배 연기)''죽음'이라는 이질적인 결합이 시의 비극성을 환기하는 미덕을 보이고 있다. 다만 시 세계가 확장되지 못한 채 관습적으로 마감되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겼다. '뜨겁고 흰 유언''어미 개'의 죽음을 통해 어미 개가 지닌 모성의 세계와 인간 혹은 공권력이 지닌 폭력성을 포착한 작품이다. 안정적인 시적 구조와 상징을 통해 시의 진정성을 잘 보여주는 반면 상상력의 변용과 확장에서 아쉬움이 있었다.

 

논의 끝에 '엄마 달과 물고기'를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엄마 달과 물고기' 외에 ', 어슴푸레한', '오래된 서랍' 등 응모작들도 편차 없이 고른 수준을 선보이고 있다. 특히, 활달한 시적 상상력과 사물을 꿰뚫어 보는 시각이 개성적이며, 시 창작에 몰입한 고투의 시간이 육화되어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탁월하다는 점이 돋보였다.

 

당선작인 '엄마 달과 물고기'는 모성의 부재로 인한 비극미와 더불어 ''이라는 매개를 통해 역사인식은 물론 은유와 상징성까지 획득하고 있다. 이때의 ''은 타자와의 조화로운 삶을 염원하고, 공동체의 의지를 추동하는 매개로 작동하고 있어 '엄마 달과 물고기'를 수상작으로 선정하는 점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수상자에게는 거듭 축하를, 응모자분들께는 깊은 감사와 응원을 전한다.

 

심사위원 김수열 시인, 서안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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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 신윤주 

 

 

커다란 눈이 하늘을 올려다봐요. 수백의 실핏줄들이 네모난 바스켓을 움켜쥐어요. 하늘로 날아올라요. 바다의 표지는 잔잔해지고, 파도가 물러간 페이지마다 떠밀려온 해인초들이 엉겨 붙어요. 해인초가 손끝에서 잘게 부서져요. 낮과 밤을 알 수 없는 시간이 이어져요. 키잡이는 가시 박힌 손으로 안개를 더듬으며 항로를 찾고 있어요. 날씨만 도와준다면 오늘 안으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만 같아요. 그곳에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거든요. 시커먼 해초들이 대서양을 밀고 들어와 바다의 귓속에 이야기를 풀어 넣어요. 귀를 막아도 노랫소리가 들려요. 저기 범고래 떼가 몰려와요. 표류하는 낱말 조각들을 등에 실어 해안선으로 날라요. 실핏줄이 터지고, 열기구가 휘청거려요. 행운이 문단 밖으로 달아나려 해요. 숨이 차요. 하강하고 있어요. 저 멀리 익숙한 초록색 대문이 보여요. 마당에는 안개꽃이 흐르고요. 열린 창문으로 파도가 들이쳐요. 파란 잉크가 옷에 튀어요. 발목이 잠겨 첨벙거려요. 이만 돌아가야 해요.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손끝으로 모래의 지문들을 털어내요. 숨을 크게 들이쉬어요. 한없이 부풀어 올라요.

 

 

 

[당선소감] 여전히 물음표지만 이 길 계속 가겠다

 

올해는 무척 힘든 한 해였습니다. 일 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우리 곁에 계신 것만으로도 안도했고, 시를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에 감사했습니다. 시가 왜 저를 찾아왔는지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시를 쓸 때 가장 행복합니다. 용기 내어 검색창에 시 창작 모임을 검색했던 그 날과 부랴부랴 자작시를 들고 찾았던 다음날의 합평 자리처럼 시는 여전히 미지의 세계이고 물음표입니다.

시는 제 삶으로부터 가장 멀리 가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누군가는 이것을 도피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도피라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저는 천천히 돌아오는 사람이었습니다. 되돌아오는 길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돌아보고 나를 둘러싼 세계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수수께끼 같던 세계 속에서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역설적으로 그것이 나에게 가장 가깝게 다가서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습니다.

힘내서 그 길을 계속 갈 수 있게 격려해주신 허영선, 문태준 두 심사위원분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확신을 가지고 끝까지 쓰는 사람으로 남겠습니다. 저에게 시를 가르쳐주신 최금진 선생님 감사합니다. 제 안에 시라는 씨앗을 심어주신 제주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김옥수 교수님 감사합니다. 제가 읽은 시의 모든 시인님, 그리고 저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던 모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가족들, 친구들 사랑합니다. 그리고 같이 시를 쓰는 문우들에게도 고맙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시와몽상' 식구들, 민주쌤, 민혜쌤 고맙습니다. '시옷서점'의 두 시인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여러분과 함께 시를 읽고 쓰는 우정을 나눌 수 있어 행복합니다. 그리고 부족한 저를 항상 지지해주는 우리 김작가 사랑합니다. 마지막으로 할머니 이름을 불러드리고 싶습니다. 이금옥 님, 당신이 계셨기에 제가 이 자리에 있습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사랑합니다.

 

 

 

 

맛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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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상상력의 탄탄한 근력과 섬세한 서정

 

한라일보 신춘문예 본심에 오른 시 작품들을 차근차근 읽었다. 서정적인 작품들이 다수 있었고, 고유한 제주 체험에 기초해 창작한 작품들도 여러 편 있었다.

한 편의, 새로운 시의 탄생은 하나의, 초유의 관점의 탄생일 것이므로, 한 편 한 편에 과연 시적인, 유의미한, 최초의 발견이 있는지를 중요하게 평가의 기준으로 삼았다. 생각의 단순한 열거에서 벗어나 그 생각들이 유기적으로 상관하고 있는지도 꼼꼼하게 살폈다.

 

마지막까지 논의한 작품은 '살구나무', '감자꽃', '그리고 '도서관'이었다. '살구나무'는 무위(無爲)를 노래한 작품이었다. 살구나무의 순연한 생명 운동을 번거로운 잡사(雜事)에 시달리는 사람의 형편에 대조해서 바라본 작품이었다. 함께 보내온 작품들이 이 작품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감자꽃'은 제주 4·3 사건을 떠올리게 했다. 감자가 자라는 땅속 어둠의 공간을 피신한 공간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이 공간이 "검은 봉지"의 공간으로 갑자기 전환되는 대목은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고심 끝에 시 '도서관'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이 시는 해역(海域)을 책 혹은 도서관의 공간에 견준 작품이었다. 바다의 파도와 해초, 해안선 등을 한 권의 책의 표지와 책 속에 담긴 서사로 치환했다. 상승과 하강, 평면적인 것과 입체적인 것의 경계를 내내 활발하게 허무는 점이 신선했다. 첫머리에서 끝자락에 이르도록 산문시 시행을 끌고 가는 상상력의 탄탄한 근력뿐만 아니라 풍경을 드러내는 섬세하고 서정적인 화자의 목소리가 돋보였다. 그리고 함께 응모한 작품들 전편에서 유니크한 시적 화자를 만날 수 있었던 점도 새로운 신인의 출현을 한껏 기대하게 했다. 앞으로 서두르지 않고, 심지 굳게 자신만의 시세계를 열어 나가길 바란다.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허영선·문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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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환선 / 이도훈

 

 

한 사람이 죽었고 법의학자들은

그의 사인(死因)을 알아내기 위해
부검을 했다.
먼저 바쁘게 오르내린 계단이 줄줄이 달려 나왔다.
몇 바퀴인지 기억도 안 나지만
지구를 돌고도 남는다는 혈관엔 무수한
정차 역들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더 울리지 않을 휴대폰에서는
남은 문자들이 재잘거렸고
생전에 찍은 사진들은 모두 뒷모습이었다.
몇 개의 청약통장과
돌려막기에 사용된 듯한 카드와
청첩장과 부의 봉투가 구깃구깃 들어있었다.
그 중 몇 건의 여행계획서가 나왔고
퇴근길에 쭈그려 앉아 쓰다듬는
고양이 한 마리와 찰칵찰칵
열고 닫았을 열쇠 소리도 들어있었다.
읽다만 책들의 뒷부분은
다 백지상태였다.

 

사람들 몰래 지구는 자주 기우뚱거렸고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계획을 쏟거나
계획에서 쏟아졌다.
오늘은 순환선에서 내려
애벌레의 마음으로 길고 긴 한숨을
느릿느릿 기어가 보고 싶은 것이다.

 

 

 

 

맑은 날을 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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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기우뚱해도 웃으며 말할 여유 생겼다"

올해는 나에게 다사다난했던 해였다. 시를 쓰기 위해 차를 없애고 대중교통을 타고 다녔다. 손이 많이 가던 보습학원도 작년 이맘때쯤 정리를 했다. 그러면서도 일에 치이며 하루하루 정신없이 산 해였다. 내가 만들고 싶었던 시잡지 '시마(詩魔)'를 창간한 해이기도 하다.

 

'순환선'은 제목에서 연상되듯이 지하철 2호선을 타고 가다가 환승역을 한참 지난 후 되돌아오면서 쓴 시이다. 늦어진 약속시간엔 좋은 핑계가 생겼고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하는 수 없지' 하는 식으로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했다. 그러면서 '나는 정말 바쁜 것'인지,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하면서 이 시를 썼다.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바빠 보였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이런 생활에 이미 단련되어 있어서 나와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순환이란 말을 우리 삶에 비춰보기로 했다. 하루가, 일 년이, 한 생애가 우리에게 순환이라고 생각한다. 그 바쁜 일과 중에서 잠시 느릿느릿 가보고도 싶었다.

 

지구가 아무도 모르게 기우뚱거릴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나는 집에 뭔가를 놓고 나왔거나 환승역을 지나친 것이라고 웃으며 말할 여유가 생겼다.

 

한라일보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리고 정대구 교수님과 함께 시 공부를 한 온새미로 동인들, 네이버 문학카페 시산문, 시마 회원들께 감사하다. 특히 한국시인협회 윤석산 회장님과 여러 선생님들께 정말 감사를 드린다. 앞으로 더 노력하는 시인이 되겠습니다.

 

 

 

[심사평] 열차 순환선에 숨 멎은 도시인의 삶 


본선에 올라온 작품들은 합당한 길이에 반해 너무 긴 것들이 많았다. 표현하려는 내용에 걸맞은 길이가 아니라 신춘문예를 의식해서인지 길게 잡아 늘려 집중력과 긴장감이 떨어지곤 했다. 이는 오래 하는 지루한 얘기나 수다처럼 읽는 이를 힘들게 한다. 시는 꼭 짧거나 길어야 하는 게 아니라, 몸에 맞는 옷처럼 생각과 말이 하나의 틀 속에 잘 어우러져야 한다.

최종심에 오른 '섶섬이 보이는 풍경'(김영욱)은 상당 부분 사물을 의인화함으로써 대상을 생생하게 살아나게 하고는 있으나, 길게 이어지는 묘사가 어떤 울림으로 연결되지 못해 아쉬웠다. 또 이런 묘사 방법은 이즈음 많이 차용되는 것이어서 새로움이 덜했다.

 

'로제트 식물'(노수옥)은 무리 없는 상상력의 전개와 시를 이끌어나가는 여유로움이 믿음을 주게 하나, 대상과 화자의 균형이 깨어져 이질감을 보였다. 같은 이의 '시침, 뚝'은 절제된 시각으로 매력 있는 언어 구사를 하고 있는 반면 시인의 의도가 잘 다가오지 않았다.

 

'나는 노래를 잘 해요'(김미경)는 4·3의 아픈 가족사를 긴 서사의 담화체로 생기 있게 노래하고 있지만 노래가 너무 길다. 그 노래를 다 들으려면 힘이 빠질 것 같다. 1~6번까지 붙인 것을 2개 정도로 줄이고 좀 더 다듬었다면 당선작과 겨뤘을 것이다. 노안이 시작되는 나이의 슬픔을 여러 상상의 빛깔로 수놓은 '돌, 어슴프레한'도 일정한 수준에 근접해 있다.

이도훈의 시들은 말하고자 하는 것들이 외피 안에 잘 녹아 있음을 보여준다. 옷 입은 이와 그의 옷이 썩 어울리는 것이다. 선자들이 당선작으로 합의한 '순환선'에서는 숨 멎은 한 도시인의 삶이 열차의 순환선에 비유되고, 그것은 마침내 읽는 이로 하여금 일상의 반복적 삶을 각성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적절한 언어를 배치하는 역량이 그의 다른 시들에 고루 나타나 있는 점도 그를 당선자로 정한 이유들 중의 하나였다.

 

힘들지만 행복한 시의 길에 들어서려는 분들에게 축하와 위로의 악수를 건넨다. 머지않아 시의 순환선에서 함께 만날 수 있기를!

 

심사원원 : 김병택(시인·평론가), 나기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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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沼) / 김윤진

 

 

고양이소에서 정말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당신은 물웅덩이를 지켰다. 짙은 녹색의 고양이소처럼 당신의 집은 고양이의 눈처럼 깊고 고요하다.

가만히 있다가도 다이빙하거나 발을 헛디뎌서 누가 그 깊이를 만지면, 털을 바짝 세우고 물보라를 일으키며 가릉, 하고 울어댔다. 몸을 으스스 떨며 건져 올린 신발의 개수를 일지에 적어넣는 것이 여름 당번의 일. 개학 후 신발의 개수만큼 책상이 비고, 당신이 지키지 못한 동생들은 집을 떠나고

당신은 항상 깊이를 알 수 없어 두근대는 소(沼)에서 산다. 꿈속에 당신의 아비는 칼을 들고 당신을 쫓아오고. 또 하나 당신의 아비는 발목이 부러진 당신을 부축하고. 한 손에는 칼을 들고 한 손은 당신 어깨를 감싸고, 파도가 되었다가 호수가 되었다가 그저 무지개 장화를 신은 아이들의 퐁당거리는 빗물이 되었다가, 당신마저 발을 담그면 세숫대야 물은 심층을 알 수 없었다.

 

 

 

[당선소감] 공기와 불, 물과 대지처럼 가볍고 무겁게

 

몸과 맘이 아픈 한 해였다. 하지만 제일 즐겁게 몸과 맘으로 외친 한 해가 저물어간다.

생각이 바뀌고 전환점을 마련한다는 것은 무조건 유쾌하다. 올해 초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고향과 유년이라는 코드에 집중하고, 모든 걸 극복하기로 맘먹었다. 글쓰기는 어려울 때마다 밀물과 썰물처럼 내게 왔다 갔다 하는 숨은 힘이었다. 어려운 걸 싫어하고, 끝마무리를 못하는 게으른 루저, 문법에 약하고 감정에도 헤픈 나라는 사람이 글 쓴다는 걸 의아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겠지만, 내 인생은 시종일여 일관되었다고 자부한다.

물과 불, 공기와 대지의 상승 이미지. 대학원 시절 정현종 선생님이 사사하신 가스통 바슐라르의 4원소 총체적 상상력과 역량을 여전히 신뢰한다. 앞으로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공기와 불처럼, 물과 대지처럼 가볍고 무겁게 살고 그리 글을 쓸 것이다.

생각의 문을 열기위해 어려운 책을 서슴없이 토론하는 가가모임(가치에 대한 가치를 추구 하는 독서회) 동인 분들께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그리고 감히 금병매를 읽었던 초등생 내게 인생 최초의 무거운 책, 한국 단편소설집을 권해주셨던 아버지, 당신의 힘입니다. 감성을 키워준 내 유년의 낡은 집과 어머니, 당신의 힘입니다. 말없이 지켜봐주는 우리 가족들 너무 사랑합니다.

 

 

 

 

이유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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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의 펼침에 반전과 도약의 상상력

 

2019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응모된 시편은 323명의 작품 1326편이다. 이중에서 최재훈, 최와온, 홍명희, 김윤진, 옥영경, 배경령, 배종영, 진영심, 이정혜, 이교진 씨의 시들이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랐다. 본심에 오른 시편들은 다채로운 상상력과 함께 기대보다 높은 수준이어서 반가웠다. 이들 시편을 읽고 검토한 끝에 김윤진 씨의 '소(沼)'와 진영심 씨의 '재와 보석' 중에서 당선작을 고르기로 결정했다.

진영심 씨의 '재와 보석'이 먼저 심사자의 눈길을 끌었는데, 시의 어조가 활달하고 시의 내공도 상당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시는 레이캬비크에서 시작하는 황금고리 해안선, 디르홀레이 해안가, 요쿤살론 유빙들… 같은 이국의 지명과 유황가스, 화산, 용암, 기암괴석, 만년설, 빙산, 간헐천 이마들… 같은 낯선 풍물 등이 어우러지며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진영심 씨가 펼친 비췻빛으로 물든 시적 공간은 독자의 마음을 잡아 끌며 저 먼 동경의 장소로 데려간다. 하지만 여러 시적 요소가 잘 버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낡은 창법(唱法)이 흠으로 지적되었다. 시적 상상력의 능란함에서도 어딘지 낯익은 기성의 솜씨가 느껴져 신인의 시로 천거하기에는 망설여졌다.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보기로 하며 시를 내려놓았다.

김윤진 씨의 '소(沼)'는 제주도 여러 곳에 산재해 있는 '고양이소(沼)'에 얽힌 슬픈 일화(逸話)를 과장이나 들뜸이 없이 차분한 어조로 빚은 작품이다. 김윤진 씨의 시는 오직 구체적 경험의 범주에서 상상력의 단초를 구하느라 다소 밋밋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유년의 아픈 경험을 장악하는 솜씨가 뛰어나고, 그 슬픔의 질량을 절제된 표현으로 담아낸 것은 숨길 수 없는 재능이다. 웅덩이를 고양이로 바꾸는 활유법에서 시는 돌연 탄력을 얻는데, 이를테면 '누가 그 깊이를 만지면, 털을 바짝 세우고 물보라를 일으키며 갸릉, 하고 울어댔다'라는 구절을 거쳐 '당신은 항상 깊이를 알 수 없어 두근대는 소(沼)에서 산다'에 이르는 시의 펼침에서 드러난 반전과 도약의 상상력은 분명 남다른 시적 재능이다. 함께 투고한 '태풍', '그 집' 같은 시에서도 좋은 시인이 될 만한 재능을 두루 확인하며 우리는 김윤진 씨의 시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심사위원 장석주, 허영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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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선 / 조직형

 

 

뱃머리는 거침없이 파도를 밀고 나아간다. 좌우 현의 오래된 균형이 삐걱거리며 서로 맞잡은 손을 거두어가자 갈라진 파도가 비명을 내지른다.

몸통을 지나 어깨 위로 세월의 더께가 덕지덕지 앉을 때까지 뱃머리는 무지근해지는 통증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다.

날카로운 예지는 분명한 걸 챙긴다. 단호하게 잘려나간 꼬리를 슬며시 감추고 씻은 얼굴 내미는 건 부끄러운 변명이다.

수평선에 맞닿은 흐리멍덩한 하늘이나 경계선을 뭉개버리는 저녁 안개는 늘 무시당하는 편. 말이 없는 것들은 모호해서 경계를 흐린다. 배의 무딘 허리를 훑으며 지나간 물결이 고물에 고물고물 맴돌거나 소용돌이치며 뒤따르며 밀어주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 달리는 말이 뒤돌아본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 지나간 후미는 곧 사라질 물거품일 뿐이다. 사라질 것에 대하여 사랑을 퍼주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뱃머리를 벗기는 짱짱한 햇빛만이 대쪽같이 당당하다.

앞만 보고 달리던 뱃머리는 고물 뒤에 숨은 시선을 기억하지 못한다. 지켜보며 뒤따르며 드러내지 않을 뿐 침묵으로 밀어주던 흘수선 아래 감춘 어미 같은 마음이 아주 환하게 비춰주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당선소감] "마음 한편 따뜻이 지피는 시를"

 

말을 하고 싶었다. 꾹꾹 눌러 억제하고 있었던 내 안의 말과 내게 던지는 말들을 모아 이야기하고 싶었다.

새로이 보이는 아름다운 세계가 내 안에서 일어났다. 그 새로운 세계에서 아름다운 사람을 만났고, 말들이 뿌리를 내리면서 친숙했던 것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오래전에 시가 무서워 경계하며 도망을 쳤던 적이 있었다. 시인들은 선택받은 사람만이 올라갈 수 있는 높은 곳에 있었다.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살며 세상과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었다. 감히 어울릴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그러다 아주 늦게 내 말이 하고 싶어졌을 때 그 옛날로 돌아가 다시 한 번 뛰어들어보자고 용감하게 문을 두드렸다. 낯선 세계는 내가 부딪히지 않으면 안되었으므로 활력이 생겼다.

제주문화원에서 같이 공부하며 힘이 됐던 문우들, 무엇보다 칭찬으로 고래를 춤추게 했던 선생님이 계셨기에 이렇게 올라설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한 것 같다.

뱃머리를 빳빳이 쳐들고 앞으로만 나아가는 배는 뒤돌아보지 않으며, 보이지 않는 것들이 사랑으로 밀어주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시를 읽는 사람들의 마음 한편을 따뜻하게 지피는 시를 쓰고 싶다.

연습경기는 끝났다. 연습으로 돌릴 수 없는 본 경기에 임해야 한다는 무거운 마음을 숨길 수 없다. 이제부터 새로운 시작이니 청춘이다. 징징거리지 않고 내 말을 들어 줄 사람들에게 겸손한 마음으로 다가가고, 아름다운 세계를 열어가고자 한다. 제 작품들을 놓고 끝까지 고민했을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한라일보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유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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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할 말 끝까지 밀고 나가는 고집스러움

 

예심을 통과한 열 분의 작품이 본심에 올라왔다. 본선에 부쳐진 38편의 작품 대부분이 시적 형상화에 성공한 작품들이었다. 시적 이미지들이 거느린 확장성뿐만 아니라 시의 형식도 자세히 살피며 여러 차례 읽었다. 그 결과 본심에 오른 대부분 작품에서 시의 형식적인 면 즉, 연 나누기에서 많은 약점이 드러났다. 과도하게 연을 나눔으로써 시의 이미지들이 파편화되어 새로운 시적 의미로 확장되는 것을 방해한 시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연 나누기는 단지 화제나 의미의 단위로만 끝나지 않는 더 큰 의미가 있다. 시적 이미지들을 서로 작용시켜 복합적 이미지를 만들어 내며, 시적 의미를 확장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 작품에 담고 싶은 말이 많아서인지 없어도 될 사족들이 많았다.

 

비교적 이러한 약점들을 극복한 이온정, 지관순, 조직형 등 세 분의 작품들을 두고 다시 심사에 들어갔다. 시의 외연을 확장하는 데에 세 분 모두 재능이 있었다. 먼저 이온정의 '염소와 제천역'에 주목했다. '염소와 역'이라는 시적 대상에 대한 관찰이 세밀했고, 사유가 깊었다. 하지만 정작 시적 대상을 빌어 드러내야 할 '남도의 말씨''톤이 익숙한 목소리'에 대한 형상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이 끝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지관순의 '저 희고 긴 새장'은 투고한 작품 중에서 가장 시적 형상화에 성공한 작품이었다. '셔츠 소매'라는 시적 대상을 통하여 무리 없이 시의 외연을 확장해 나갔지만, 마지막 연이 문제로 지적됐다. 앞선 사고의 모든 과정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진술이었기 때문이다. 당선작으로 결정된 조직형의 '폐선'에서 선자들은 공통으로 시를 이끌어 나가는 진술의 힘에 주목했다. 현란한 언어의 기교가 아닌 자신이 할 말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고집스러움이 엿보였다. 시적 진술이 사물과 상황을 바라보는 오랜 사유의 과정에서 이루어진다는 면에서 신뢰감을 주었다. 투고된 네 편의 작품 모두 일정한 수준을 유지한 면도 영향을 주었다.

 

심사위원 김광렬, 정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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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등 / 오경

 

 

가슴에서 플러그를 뺐다 젖이 멈췄다 벽등의 스위치를 켰다 나는 밤이 들킨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떨다가 아

슬아슬하게 걸린 검은 브래지어를 떨어뜨린다 어둠이 활처럼 휘어진다 순간 배고프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허

기를 달래려고 더 진한 화장을 하고 더 긴 속눈썹을 붙이고 스타킹을 벗는다

 

갑작스런 빛이 사방을 삐거덕거리게 한다

아기 유령들이 셔플 댄스를 추다가 천장에서 추락했을지도 모른다

길 잃은 시조새 한 마리 비상하다가 태양의 모서리에 부딪쳐

날개가 부러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문을 나서고 싶지 않았다 아니 불을 켜고 싶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것의 아주 작은 세포를 만지며 느껴보고 싶었을 뿐

식탁 위엔 주인 없는 고통이 가열하지 않은 채 날것으로 있다

 

함성에 금이 간 어둠이여 다시는 변명에 목을 걸지 말 것

목숨 걸어야 할 곳이 어디 한두 곳인가 

식탁 아래 한때 눈부셨던 대낮의 그림자가 꽁무니를 빼느라 허둥지둥이다

지금은, 어둠을 수습하기 위해 퇴로 차단이 필요한 순간이다

 

 

 

 

[당선소감] 시와의 영원한 동침

오랜만의 휴가였다. 발표가 나기 몇 달 전부터 천문산(중국)을 보고 싶었다. 산 정상에 올라가 밑의 풍경을 보게 되면 그동안 앓아왔던 詩병이 치유될 것 같았다. 호기심에서 열정으로 열정에서 무력함으로 무력함에서 우울로 우울에서 다시 호기심으로 이런 감정의 순환 속에서 지난 세월을 살아왔다.

올해를 시 습작기간의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더 이상은 힘들었다. 본업에 충실하기로 결심했다.

떠났다. 천문산으로. 시와의 이별여행을 위해. 나의 마음을 들켰을까? 내내 장가계의 하늘이 우울했고 희롱하듯 비까지 내렸다. 기암괴석에 간절한 내 마음을 알렸다. 나를 이해해달라고, 아니면 나를 잡지 말아달라고, 제발 나를 그만 내버리라고…

바로 그때, 한국에서 전화 한 통, 또다시 같은 번호로 당선 문자 배달… 가슴이 두근거렸다. 바로 전화를 했다. 전화선에 희망의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시야가 흐려졌다. 감사했다. 벼랑 끝에 선 지금 이 순간에. 오랜 시간 시를 포기하지 않은 나에게.

시와의 영원한 동침을 허락해주신 한라일보사와 심사위원 선생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이젠 앞만 보고 가겠습니다. 시의 길로 인도해주신 이기철 교수님께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를 알고있는 모든 분들과 이 기쁨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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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찰나를 포착한 순발력

 

매년 일간지 신춘문예로 등단하는 시인이 30명 이상이다. 이 중에서 과연 몇 명이나 살아남아 계속 활동할까. 이러한 질문은 열정적이고 패기 넘치는 응모작들을 접하는 동안 우려보다는 새로운 기대로 바뀌었다.

올해 한라일보 신춘문예의 시 부문 예심을 거친 응모자는 10명이었다. 이를 다시 검토한 결과 김려원의 '애월의 얼룩', 김미경의 '먹돌쌔기', 이도훈의 '중절모', 오경의 '점등' 등 4편이 최종까지 남았다.

이 네 사람의 작품은 비슷한 수준이지만 서로 다른 작품 경향을 보여주었다. 김려원은 언어를 구사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을뿐더러 어떤 소재도 시적 대상으로 수용해내는 역량이 돋보였다. 그러나 호흡이 다소 산만하고 불안하였다. 김미경의 시는 긴 호흡의 내용도 거침없이 소화해 내는 능력을 높이 살만했지만, 익숙한 자신의 틀에 갇혀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 아쉬웠다. 이도훈의 시는 서툰 듯 낯선 표현이 되레 참신하게 느껴졌다. 특히 전봇대에 지은 새집을 중절모로 비유한 표현은 눈길을 오래 붙잡았다. 그렇지만 응모작 간 격차가 드러난다는 사실이 선택을 망설이게 했다. 반면 오경의 시는 식상하거나 미흡한 표현들이 더러 눈에 띄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들 수준이 대체적으로 고르며 응모자 자신의 목소리를 갖고 있다는데 심사위원들의 견해가 일치했다. 미숙한 점이 노정된다는 것은 그것을 극복해나가야 하는 숙제가 주어진다는 의미이다. 심사위원들은 그 긍정적인 가능성을 인식하고, 논의 끝에 '점등'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당선작 '점등'은 주방의 벽등을 켜는 순간을 개성적으로 묘사하면서 사색한다. 빛이 들어와 어둠이 사라지는 찰나는 거의 동시에 이루어지지만, 이때 존재하는 소재와 상상들을 순발력 있게 포착해 역동적으로 제시하는 대목에서 당선자의 기량을 엿볼 수 있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또한 상세히 언급하진 못했지만 예심을 거친 모든 분께도 응원을 보낸다. 그들 모두 똑같은 출발점에 다시 서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심사위원 김영남, 김지연(필명 김규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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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죽 / 이은주

 

 

매월 달의 소유 기간은 멀면서 가깝다 

쟁반에 빚어놓은 옹심이 

달이 되려면 뜨거운 솥 안에서 익어야 한다 

반은 떠있고 반은 잠긴 달들 

팥물을 빨아들여서 잔뜩 부풀어 있다 

오늘 뜬 달엔 팥죽이 묻어 있다

붉은 저녁이 걸쭉하게 담긴 그릇마다 

몇 개의 잘 익은 달이 떠있다 

그릇마다 달빛이 새어 나온다

그릇 하나를 밝히는 달빛,

하마터면 달빛을 엎지를 뻔 했다 

 

예전에는 어머니의 죽 그릇에 달이 많이 떴었다

죽보다 달을 먼저 뜨셨다 

만월이 씹히지도 않고 몰락한다

달이 하나 씩 줄어 들 때 마다 어두워졌지만

오늘은 어머니의 죽 그릇에 달이 그대로 떠있다

어디로 가는 길을 비추려고 

죽 그릇에 달 하나를 남겨 두었을까

달 하나를 남기는 식량 

누군가에게는 달이 되고 부적이 되는 애기동지

보름으로 갈수록 살이 오른다 

 

동짓날 밤 수십 년째 비어있는 어머니의 밤을 열어 보면

그릇하나를 밝히는 얼음으로 빚은 달이 무수히 떠있다

해마다 오는 긴 밤을 비춰줄 달을 꺼내 놓으시는 걸까

그런 밤이어서 달이 익어 가는 걸까 

저 달이 잘 익으면 드시기 좋겠다

청상은 불구의 밤을 부적으로 쓰는 달 

저 달들을 골목마다 내걸고 싶다

 

 

 

 

[당선소감] 시에게 진 빚 시로 갚고 싶다

 

기쁨은 오후에 찾아 왔다.

 

도전할 때 마다 글이 업그레이드 되는 느낌은 스스로 만드는 우리이며 탈출하고 싶은 욕구가 아닐까.

 

초겨울 얇은 종이 옷 한 겹만 입혀서 보낸 마음은 빚이다. 춥고 캄캄한 곳에서 수없이 떨었을 내 글에게 따듯한 옷 한 벌 입히게 되어 기쁘다. 거의 맨 몸으로 보내졌던 내 글과 화해하고 싶다. 혼자 노는 법과 혼자 앓는 고통과 허탈을 안겨 주었던 시의 영역을 인테리어하고 싶다. 따뜻한 옷을 더 많이 입혀주고 싶다.

 

스스로 버려지고 스스로 상처받는 내 글은 치열하게 정진하며 돌보아야하는 미숙아다. 걸쭉하고 붉은 밤이 짧아져 가는 밤. 감사드려야 할 분들이 너무 많다.

 

아름다운 제주, 살고 싶은 제주의 한라일보사와 글을 가려주시고 선하여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고개 숙여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또 나와 시를 이야기했던 분들, 아버지 같은 오빠, 엄마 같은 언니, 언니 같은 동생, 선배 같은 친구 문희씨, 내 글의 첫 번째 독자인 남편, 사랑하는 진우 정우와 이 기쁨을 함께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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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세밀한 시적 구성, 신뢰와 온기 전해져

 

여전히 젊은 시를 대할 때는 가슴이 뛴다. 가슴에 달이 뜨게 하는 것도,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뜻함을 건네는 것도 시 한 줄의 힘이다.

 

단 한 편의 당선작밖에 내지 않는데도 신춘지대를 통과하고 싶은 가슴이 아직도 여전한 시대라는 점은 즐거운 고통이다.

 

더구나 한라일보 신춘문예는 그 지정학적 위치부터 얼마나 매력적인가. 응모작들에서는 그러한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광활한 시의 숲을 헤쳐 나오면서 어디에 이러한 예비시인들이 숨어 있었던가. 고투의 흔적들을 함께 느꼈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응모한 이들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몇 가지는 짚고 가자. 신춘의 경향성을 지나치게 의식한 작품들, 대체로는 산문시가 적지 않았다. 리듬감을 무시하거나, 현란하고 모호한 언어의 기교로 내면의 고백에 치중하고 있는 것도 거슬렸다. 간혹 내용이 허술한 경우, 정작 시가 지녀야 할 응축과 긴장성 등의 요소를 담보하지 못하거나, 내용이 있어도 감정의 과잉, 단순 발상에 머무르는 경우도 있었다. 좋은 시는 시인의 내면과 외피를 아우르는 치열한 과정에서 탄생하지 않는가. 과연 그런 작품을 찾을 수 있을까.

 

당선작 '팥죽'에 이르러서 심사위원들은 망설이지 않아도 되었다. 옹심이, 그 달의 이미지를 통한 어머니의 기억은 섬세하면서도 가볍지 않았다. 탄탄한 시적 구성으로 잔잔하게 직조된 그 속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신춘의 성격처럼 신선함, 치밀함, 신뢰할 만한 수준이라는 점에서 믿어도 좋았다. 확장된 시세계를 보이고 있는 '임관의 숲' 등 다른 경향의 세 편 역시 내공이 엿보였다.

 

당선작 외에 최종심까지 올라 논의된 작품들은 '망모'(홍성남) 등 네 편. '망모'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작품으로, 오래도록 정진해오고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이미지의 조율과 사유의 깊이 또한 엿보였으나 평면적이고 치밀함에서 조금 미흡했다. 산문시 '따뜻한 숲'(강동완), '꽃의 잠복'(이윤주)은 기교는 탁월했으나 상징과 이미지가 지나쳤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자신만의 언어의 집을 지으며 정진하고 있는 수많은 시인 지망생들에게는 오늘이 또 다른 시작의 관문이 되길 기원한다. 그리고 오늘 이 신춘의 첫 아침, 잠시나마 이 한 그릇 팥죽의 온기가, 달이 독자들에게 전해지기를!


심사위원 김병택, 허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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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신발 / 고창남

 

 

인도에는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다.

드르르륵, 문이 열리면

떠올랐다 가라앉은 먼지들과

가볍게 부풀어 올랐을 세상의 호들갑이

풀어진 끈을 갈고리처럼 엮어 꽉 조여 맨다.

만년설처럼 쌓여만 가는 아득한 먼지 속에서

태양은 너무 용의주도하고

그림자는 자주 길 밖으로 흘러내린다.

인도에는 수많은 상처가 있다.

바람만 불어도 가시가 돋쳐 구멍 숭숭 뚫리고

나는 다만 그날의 일기를 기록한다.

지구의 표면을 닦는 순례자의 발걸음

덜거덕거리는 신발이 몸 안의 길을 따라 걷는다.

때론, 갠지스 강이든가 어디든가 가닿지 못한 그리움이

솜사탕처럼 부풀어 오를 때

우리라는 존재는 우리가 소망하던 우리가 아니다.

오래된 신발에서 오래된 잉크냄새가 난다.

평생 써 내려가야 할 미완의 경전

어제 걷던 길을 오늘도 걷는다.

인도에는 부처가 있다.

신발장 문을 열 때마다 온 생이 몸을 뒤척인다.

 

 

 

 

[당선소감] "다시 시의 바다로 헤엄쳐 갈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아있다. 감사하다.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에 감사할 줄 안다.

 

살아갈수록 자주 길 밖으로 내몰린다. 내내 앓으면서도 소리 한번 제대로 지르지 못한다. 열심히 살아야지, 잘 살아봐야지 하는 생각은 허공 속 메아리로 현실의 삶을 받쳐주진 못했다.

 

다만 내 살 속에 기억이란 이름으로 기록되고 있다. 미래의 별들은 들판에 내리는 눈처럼 가슴을 후벼 파기도 하고 하나의 풍경이 되기도 하고 녹아서 사라지기도 하였다.

 

누구도 품어주지 못하는 존재감으로 시의 바다를 헤엄쳤다. 병이다. 고칠 수도 떼어낼 수도 없는 병이다. 이번 수상으로 잠시 쉬어갈 수 있겠다.

 

포구에서 잠시 쉼을 허락해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를 드린다. 부모님과 묵묵히 자리를 지켜준 아내 윤현미, 그리고 사랑하는 예람, 은결에게 감사를 드린다.

 

탐라장애인종합복지관 활동지원센터 직원들과 장애인활동도우미를 하시는 선생님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다. 끝으로 아낌없는 격려와 성원을 보내주신 이호동 김기평님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나는 다시 시의 바다로 헤엄쳐 나갈 것이다. 마치 불치병 환자처럼. 오래된 일기장을 편다.

 

 

 

 

11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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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심사평] 신뢰할 수 있는 역량을 택했다

 

새로운 시인의 등장을 기대하는 설렘은 첫째 새로운 안목에 대한 기대이며 다음으론 시인으로서의 역량이다. 그 설렘을 가장 먼저 겪는다는 점에서 심사위원은 행운이랄 수 있다. 2015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응모작들의 수준은 편차가 많았으나 시세계가 다양하고 기대가 되는 시편 또한 적지 않았다.

 

결심에 남은 작품은 김미경의 '나는 노래를 잘해요', 임경현의 '내 빛바랜 여자', 리호의 '폭설의 카르마', 고창남의 '오래된 신발' 등이다. 이 가운데 '나는 노래를 잘해요' 4·3 사건을 다루는 문체가 유려하고 이미지의 흐름이 좋으며 무거운 주제에 비해 경쾌한 리듬감이 돋보였으나 감정의 구도가 단편적이고 무엇보다 장시 형태여서 제외되었다. '내 빛 바랜 여자'는 일상적 삶의 낮은 자리에서 대상을 불러내는 차분한 음성을 가졌고 '늦은 점심에 나무그늘 얹는 젓가락 한 쌍'같은 절구가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긴장감과 새로움을 만들어내진 못했다.

 

마지막까지 경합한 작품은 '폭설의 카르마' '오래된 신발'이다. '폭설의 카르마'는 중의적인 시적 구조와 남다른 상상력으로 좋은 점수를 얻었으나 주제를 충분히 녹여내지 못해 다소 전달에 어려움을 겪고, 언어에 대한 천착이 당차지 못해 가다만 듯한 아쉬움이 남았다. '오래된 신발'은 완성도가 있고 시를 끌고 가는 힘도 안정적이었다. 작품의 수준이 고르고 그만큼 만만찮은 자기 연마의 과정을 짐작케 했으나 우리가 친숙하게 읽어온 '낯익음'의 유형이라는 점 때문에 손을 들어주는데 망설임이 따랐다. 진지한 논의 끝에 두 작품의 장점 중 후자를 택하는데 두 심사위원은 합의했다. 새로운 안목 보다는 신뢰할 수 있는 역량을 선택한 것이다.

 

당선자에게 기존의 장점에 더해 자신만의 개성적인 발성법을 보다 치열하게 밀고나오기를 당부하며 아낌없는 축하를 보낸다.

 

심사위원 황학주 시인, 김병택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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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에 놀다 / 송지은


  

하나의 풍경을 읽었다 찬 냉기의 한쪽 모퉁이부터 뜯어내는 봄비의 가느다란 손놀림에 어디서부터가 시작인지 모르는 비 맞은 고양이 울음에

가슴 안에서 빗방울처럼 또박또박 싹이 돋아나는 걸 무심히 들여다보다가 또 다른 카드로 얼굴을 바꾸는 계절의 어디쯤에서

하나의 풍경에 빠졌다 내 몸까지 다 내어주고 버려진 사마귀의 심장을 법당을 급하게 빠져나오다 문살에 찍힌 구름의 숨소리를

발뒤꿈치 갈라진 틈으로 새어나오는 겨울의 쓸쓸한 문장으로 읽다가 바람이 긴 바퀴를 돌리며 어둠을 몰아가는 산 어디쯤에서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고요는 소란을 낳느라 고요를 주저앉히고 버릴 수 없는 것들은 끝내 다른 풍경으로 일어서는데

죽은 쥐에서 구더기가 기어 나오는 것을 엿보다가 문득 나도 그 삶의 연속무늬 쪽으로 줄을 섰다

교회의 철탑이 모텔 건물에 지그시 그림자를 얹듯이 달이 제 몸을 지우며 죽음이 낳는 새로운 시간을 보여주듯이 풍경이 내 배경이었으므로 나도 풍경의 배경으로 지기로 했다 너에게

 

 

 

 

[당선소감] "시가 되지 않는 시의 함정"

 

언젠가 TV에서 방영된 물병아리 가족이 살아남는 법을 본 적이 있다. 마른 연못에서 더 큰 보금자리를 찾아 헤매는 길은 위험의 연속이었다. 자동차가 다니는 넓은 도로를 지나야 하고 들개에게 쫓기는 모습을 불안한 마음으로 보았다.

하지만 어미는 달랐다. 앞서가다 뒤돌아서서 새끼들을 기다리고 또 앞서가다 멈추길 반복했다. 도로를 건너고 수로를 건너고 마침내 큰 저수지를 찾아가는 것이다. 어미는 어서 와라, 이리 오라고 재촉하거나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앞서가서 말없이 지켜보고 기다릴 뿐.

내게는 시가 그러했다. 어미처럼 묵묵히 기다리다 위안의 눈길을 건네주는 존재였다. 그것은 고통이면서 아픈 부분을 치유해주는 내 삶의 진통제였다. 하지만 그 문턱은 호락호락하지 않아 시가 되지 않는 시의 함정에서 오래 머물렀다. 지금도 그 함정에서 벗어났는지 알 수 없으나 건조한 겨울에 눈이 있듯이 먹빛 가슴에 가끔은 초록으로 퍼지는 파장을 볼 수 있다.

겨울 하늘은 차고 푸르다. 추위를 잘 견디지 못해도 혹독하게 날을 세우는 이 계절이 나에겐 희망이었다. 앞으로도 그렇게 존재하리라 믿으며 함께 글공부했던 동기들이 내 이름을 잊어버리기 전에 다시 부를 수 있게 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과 한라일보사에 고마운 마음 올린다. 글의 바다에 밀어 넣어주신 은사님들. 나보다 더 크게 기뻐하는 형제와 친구에게도 느낌표가 되는 시로 보답하고 싶다.

아직도 내 삶에 풍경이 되어 주시는 팔순의 어머니, 이제는 지하에서 둥근 웃음만 보이는 아버지께 술 한 잔 올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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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미적 형상화 시도 탁월"

 

신춘문예란 말 그대로 한 겨울의 눈보라와 삭풍을 견뎌내고 새봄에 피어나는 꽃과 같이 가장 찬란하면서도 권위 있는 등단의 관문이다. 따라서 신춘문예를 통해서 등단하는 작가에게는 지난겨울을 힘들게 이겨낸 치열함, 새봄에 태어나는 참신성, 앞으로 멀고도 힘든 길을 나아가야 할 가능성이 동시에 요구된다.

지역의 신문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전통을 가진 한라일보 신춘문예에는 그 이름에 걸맞게 올해 1100여 편의 작품이 시 분야에 응모했다. 그러나 많은 작품들이 일상의 현실에 숨겨진 대상을 치밀한 묘사력과 참신한 비유로 표현해내거나, 인간과 세상의 모습을 개성 있는 언어로 변주해내는 시적 능력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지은의 '풍경에 놀다', 송재선의 '발로 읽히는 유서'를 만난 것은 커다란 수확이었다. '풍경에 놀다'는 현실의 삶을 '풍경'의 모습으로 역동적으로 끌어당기거나 체감하여 미적으로 형상화하려는 시도가 탁월했다.

시를 이끌어가는 새로운 방식의 감수성과 화법도 두드러졌다. '발로 읽히는 유서'는 삶에 대한 깊은 사유와 고뇌의 흔적이 담겨 있어서 작품을 읽는 동안 계속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시다. 하지만 한 편의 시에 너무 많은 내용을 담고자 하고 다소간에 사변적이어서 주제의식이 산만해졌다. 두 작품을 두고 오랫동안 고심을 거듭했으나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은 신춘문예의 의의에 더욱 어울리는 작품으로 송지은의'풍경에 놀다'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송미선의 '꼬리연', 남상진의 '섬', 조성필의 '물허벅'과 같은 작품들도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앞으로 더욱 정진을 바란다.

 

심사위원 허상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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