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 이주렴

 

 

1
깊이 흐를수록 뜨거워진다는 건 돌아올 메아리가
아닐지도 몰라요 그건 열매들이 익어가는 소리이거나
팽창하는 하늘의 속삭임일지도 몰라요 갈대가 맨발로
웅숭그린 강가에서 당신을 떠나 보내고 물수제비를 뜨며
단발간격으로 수면 흔들어 놓는 납작 돌멩이의 몸부림이
낯설지 않은데요 당신의 말대로라면 저 돌멩이의 마지막
흔적이 바닥을 울리는 순간 찡한 뜨거움으로 녹아
흐르겠지요

2
맨 처음 당신을 찾아 나섰던 그 자리 거기 나는 꼼짝없이
발묶여 있는데요 깊게 흐를수록 멀어지는 당신을, 아득한
바닥에서 푸른 피 흘리며 나는 다슬기처럼 시큼해지는데요
뜨겁다니요 시리디시린 혈관 껴안아 주는 건 피붙이같이
뿌리 얽힌 갈대 뿐이었어요

3
어쩌면 물구덩인 듯 보여요 깊어지라 한 마디를 水深(수심)만큼
던지고 뗏목 따라 떠난 당신을 돌아올 거라 손꼽는 망부석
하나가. 어쩌면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먼 나루 하나 남겨
놓고 떠났는데요 혹 돌아올지도 모르지요 수증기나 구름
혹은 비가 되어 당신이 깊게 박아놓은 혈관의 뿌리를
뜨겁게 헹궈주리라 믿는데요

 

 

 

 

[당선소감] 

 

오랜동안 캄캄한 바다에 홀로 떠 있었습니다. 망망한 바다의 어둠 속에서 가랑잎같은 나룻배 하나에 몸 실은 채, 표류할 섬 하나 보이지 않고 방향 가늠할 표적 하나 없이 나아갈 항로를 잃고 있었습니다. 파도를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가도 어느새 뒤로 밀려나 언제나 그 자리인, 무감각 상태에서 헤어나기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주위와 싸우기 전 자신과의 싸움에 먼저 지쳐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소스라치듯 깨어나 보면 밤하늘에 초롱초롱한 별들이 질책 담은 눈망울을 하고 죄다 내게로 쏟아지는 것 같아, 아찔하게 정신을 가다듬곤 했습니다.

정말이지 일상에 지친 감정을 깨워 저 내면적인 노래를 충동하는 감각들이 없었더라면 나의 싸움은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막, 한 줄기 구원같은 등대빛이 서방정토에서 비춰 왔습니다. 끝도 없을 것 같던 파도와의 싸움에서 살아남은 증거를 확인한날, ‘인간에게 가장 훌륭한 몫은 바로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도대체 詩(시)가 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데도 좋은 시라 격려해 준 知人(지인)들과 시의 正道(정도)를 걷도록 준엄하게 채찍질해 주신 서지월 선생님, 부족한 작품을 選(선)해 주신 심사위원님 그리고 불교신문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풀무원

 

deg.kr

- 애드픽 제휴 광고이며, 소정의 수수료를 지급 받을 수 있습니다.

 
 
 
 

[심사평]


응모한 작품들에는 응모한 사람들의 정성이 행간에 숨쉬고 있었다. 시를 사랑하고 불심에 가득찬 응모자들의 마음을 행간에서 읽을 수 있었던 것은 행복이었다. 우열을 가늠하기 힘든 작품들을 두고 고민에 빠졌던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시조에서 정현숙의 ‘11월, 장곡사에 비가 내리네’ 외 4편과 정창영의 ‘수국’외 6편, 시에서 박형수의 ‘佛影寺에서’외 4편, 박성필의 ‘남장사’ 외 5편, 이주렴의 ‘강’외 6편을 마지막까지 읽고 또 읽었다.

정현숙의 시조는 시조시의 정통성을 이은 모범답안적 작품이라 할만했다. 언어의 조탁과 시조가 가진 자수율에 의한 운율의 획득 등에서 나무랄 데가 없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모범답안이 항용 그렇듯이 파격적인 창의성과 무한한 상상력에로 향한 아쉬움과 갈증이 느껴지는 작품들이었다.

장창영의 응모한 시조들은 수준이 모두 고른 편이었고, 무엇보다 시조의 정통적 틀을 벗어나려는 파격과 개성이 돋보였다. 현대시조시가 추구하는 바람직한 행로를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행운이다. 예사롭지 않은 행갈이 방법과 언어의 조탁에서 현대시조가 고시조와 왜 다른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창영의 시조를 가작으로 선정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형수의 시들은 단아했다. 그 단아함은 언어의 절제를 통한 조사법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응모한 시편들의 수준이 고르지 않은 것은 흠이었다. 박성필의 시는 화려한 시적 수사와 자유분방한 시적 상상력이 돋보였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는 기성시인 누군가의 시에서 읽었던 분위기가 자꾸만 느껴졌다.

이주렴의 시는 도도한 흐름으로 이어지는 강한 개성을 가진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언어의 절제도 생각하는 것이 이 시인에게는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강’은 불교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불교적 사유를 시 속에 용해시킨 작품이다. 윤회와 인연 그리고 부처님을 기다리는 마음을 이만큼 승화시켜 놓은 것은 이주렴의 시적 역량이 일정한 수준이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하면서 이 시인이 더욱 분발하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김선학 문학평론가·동국대 국문과 교수

 

728x90

 

 

빈 들에 서다 / 이정원


저, 무청 푸르딩딩한 대님만 남은
들판
우수에 잠겨 침침하다
단물로 품었던 속정까지 내주고야
빈 들이 되었다.
산발한 은발로 밭두둑 억새꽃
몇날 며칠 손짓 거듭했어도
내 안에도 썰렁 썰렁 비어가는 들판 있는거
눈치 못채고 있다가
11월이 들녘 끝자락부터 아득 아득 저물어 오면
나도 못내 저물어 땅거미가 되는 것인데
저물다가 문득
自盡하려 곤두박히는 나뭇잎 보았다
재빠른 하강곡선
그속에 잎맥같은 무수한 길이 보였다
뿌리에서 잎맥까지 이어진
길따라 나섰다
감은눈 속으로도 휘영청 열린
길은 이제 들숨에서 시작되고
날숨으로 끝나가고 있다
뿌리가 준비한 거한 목숨들
길 가운데 빼곡했다
텅텅 비워야 겨울은 그 빈 여백에
작은 움 하나를 그리기 시작한다는 깨달음
그 길 어느 도중에야 섬광처럼 왔다
내 비어가는 속 뜰 어디엔가도
형형안 만다라 한폭 쟁여져 있으려나
다시 빈들에 서 본다
冬 安居에 들고 있는 초겨울
저 들판
바람 쓸리는대로 지는 잎새처럼 떨어져
섭생의 가드레일 같은
난해한 눈빛으로 열반경을 읽고 가는
새 떼 한무리
가뭇없는 허공에 銀紙처럼 구겨박혀
일몰이 된다

 

 

 

 

꽃의 복화술

 

nefing.com

 

 

[당선소감] 먼 길 나서며

첫 눈 조신조신 내리더니 축복이었나 봅니다. 그 날 오후의 난데없는 당선 통지는 내게 분명한 이정표였습니다.

잊었는가 했는데 잊은 게 아니고 떠났는가 했는데 떠난 게 아니었는지, 때론 파고 높았고, 때론 깜깜한 그믐의 시절 속에 부대껴 흐르며 살다가 문득문득 사무치는 그리움에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시(詩)였습니다.

늘상 설렘으로 지켜봤던 새해 아침 그 환한 지면에 제 졸시(拙詩)를 올려주시다니, 놓칠 뻔한 꿈 붙잡아 가두게 해 주시다니, 불교신문사와 심사위원님들께 감사의 합장(合掌) 올립니다. 이 격려에 힘입어 첫 걸음 내딛었으니 천리길 마다 않고 가겠습니다.

이 기쁨 회향합니다. 유년부터 아직토록 내 시의 도반인 저 햇빛, 거기 잘 버무려진 삼라만상과 종단엔 그 시의 지향점인 우주적 자아에까지. 그리고, 내 서정의 자양이었던 아버지, 어머니 영전에 생전의 불효를 뉘우침과 더불어.

또한, 늘 곁을 든든히 채워주었던 가족과 법우들, 그리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벗에게 온전히 회향합니다. 저 중중무진 법계에까지.

 

 

 

내 영혼 21그램

 

nefing.com

 

 

[심사평] “넓은 세계로 나가기를”

예년의 수준을 훨씬 넘는 많은 응모작 가운데 예선을 통과하여 본심에서 오른 작품들은 강재현 〈청평사 가는 길〉외 8편, 백하길 〈공사장에서〉외 8편, 김승호 〈山家에서〉외 5편, 정하해 〈살아서 관을 짜다〉외 4편, 이정원 〈빈 들에 서다〉외 5편, 홍 범 〈보이를 마시며〉외 4편, 이완 〈나비〉외 5편 장석원 〈낙하하는 것들의 이름을 안들〉외 4편 등이었다.

이 중에서 마지막으로 이은자, 장석원, 이정원, 김승호 네분의 작품이 최종 심사의 대상이 되었다. 이은자의 간결성, 이정원의 서술성, 장석원의 참신성, 김승호의 형식적 절제 등이 각각의 장점으로 돋보였다. 그러나 육화된 시적 사유와 투고된 작품의 균질성 등으로 인해 이정원의 〈빈 들에 서다〉와 〈등신불〉 등을 금년도 당선작으로 선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겨울은 그 빈 여백에 작은 움 하나를 그리기 시작한다’는 깨달음이나 ‘풍경에서 뛰어나온 마음들’을 붉은 배롱꽃에 전화시킨 상상들이 이번 수상을 계기로 크고 넓은 세계로 뻗어나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당선자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내드리며, 아깝게 탈락한 많은 분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전한다.

 

심사위원 최동호 교수

 

 

 

 

[가작] 山家에서 / 김승호

나무 숲 바람소리 가만히 숨죽이면
못 물은 왜 이렇게 꼬리가 길은지,
돌담에 기대어 있는 산중의 의문 하나를
모악의 산맥같은 돌로 눌러 죽이고
석등 밑에 부려놓은 허리 휜 길 하나
가슴 속 붉게 흐드러진 화염도 밟고 와서
손 호호 불어가며 고봉 쌀밥 공양하고
그림자 가득한 창호문을 닫아걸면
화엄은 깊은 바닷속 늘 깊이 잠겨 있음을
비 끝에 쓸리는 적멸의 이 길을
시내에 모이는 솔 소리에 비내리면
미륵은 우리 곁에서 수행자로 걷고 있다.

 

 

[입선소감] 그리움을 글로 채우며…

산 속 깊은 산가(山家)에서 가지가 앙상한 나무에 등 기대고 있으면 가만히 밀려오는 산중의 외로움, 외로움과 그리움은 늘 함께 했다.

산 위에서나 산밑에서나 내 가슴은 늘 그리움으로 채워져 있었고 그것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였다. 글을 써야하는 이유가 나를 속박했었고 뒤돌아보면 항상 회한만 남았지만, 지금 생각해도 가슴앓이하며 원고지를 채우던 스무 살 때가 내게는 가장 행복한 시절로 기억된다.

스무 살을 넘기면서 원고지도 버리고 세상 속으로 훌쩍 뛰어 들었지만 언제나 가슴 저 밑은 그리움이 남아 있었다. 또 다시 스무 해쯤을 훌쩍 넘기고서도 그리움은 변하지 않았고, 늦게 서야 다시 시작한 글쓰기의 보상 심리는 상이라도 받는 것이어서 무던히 애를 썼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하지만 아내가 곁에서 격려해 주었던 것이 큰 위로가 되어서 좋은 상을 받는 것 같다. 더욱이 불교신문 신춘문예에 입선된 것은 내게 시사하는바가 매우 크다.


선(選)에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더욱 정진하라는 것으로 알고 좋은 글을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