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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대는 느리다 / 김남용

 

 

486 낡은 세대를 부팅한다

오늘은 느리다

바탕화면에 뜰 워드를 기다리는 동안

시상이 달아나다 쓰러진다.

고장나면 나의 생명도 시든다

많은 작품들이 한꺼번에 손상될 때

말없는 기계에 폭언하는 일은

죽은 친구에게 우정을 말하는 것처럼

싱거운 느림이다.

새로운 시상도 사라진다

결연히,

전원을 끈다

486 낡은 세대를 접는다

첨단 기술이 녹슬지 않은 노트북,

그러나 이미 이 세대는 느리다

586은 돼야신제품이란 있는 것일까?

 

폐지더미에 깔려 있던 색바랜

원고지를 빼내오고

중학교 시절 기초 언어를 연습하던

만년필을 꺼내 잉크를 채운다

잠들었던 선들이 일어나고

맑은 점들이 알알이 번진다

지금까지 이들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시간을 거스르는 일은 두려웠고돌아볼

거울이라도 있었던가?

 

새로운 것을 바란다면 잊고 있던

기억의 서랍을 열어 뒤적여 보라

 

486세대를 서랍에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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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의 비 / 김영산

 

 

순간, 골목 어귀에서 어둠이 비틀거린다 플라타너스와 체르니 사이 흩뿌리는 가랑비에 자정의 목덜미가 젖는다 푸른 선풍기 느리게 돌고 있는 주점은 칠부쯤 눈을 감았다 빗물 낯바닥에 어리는 불빛 아무리 밟아 뭉개도 꺼지지 않는다 우우 데모하여 바람의 꽁무니 쫓아다니는 적막이여 국제건강약국 낡은 입간판에 붐비는 부식의 시간이여 벼룩신문 어느 광고에 중고 희망 매물은 나온 게 없을까 가슴에 꽂힌 향기로운 절망도 시들어 버린 지 오래다 수천 갈래 생의 교차로에 녹색 신호등 플러그가 빠져있다 집으로 가는 길이 막차 보내고 난 장의자에 길게 드러 눕는다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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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囚人)번호 5705, 그녀는 애벌레를 키운다 / 유영금

 

 

그녀는 감옥 안에서 노래한다

노래하는 자유만 있을 뿐이다

노래는 자폐(自斃)를 살해하는 힘을 숨기고 있다

간수의 눈빛이 그녀를 옥죄일수록 흑()

노래가 애벌레처럼 쏟아져 나온다

다른 수인(囚人)들도 노래를 부르며 견딜 것이다

[견딤]보다 몸서리치게 아름다운 것이 또 있을까,

아름다움의 끝에 닿으면 노래에게서 버려질 것이다

노래로부터 버려지고 싶은 그녀를 위해

누더기같은 수인(囚人)번호를 가위로 자른다

자르는 순간 다시 엉겨 붙는 속성을 지닌

더러운 번호, 징그럽게 알을 깐다, 오글거린다

그녀는 알았다, 감옥 안의 노래가 감옥 밖의

노래보다 살인적으로 자유롭다는 걸,

 

 

 

봄날 불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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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경을 벗었다 썼다 한다 / 이영수

 

 

나는 안경을 벗었다 썼다 한다 맑은 날과 희뿌연 날들의 차이는 엄청나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차이가 그렇듯 안경은 그 위험수위를 꼼꼼하게 따져 혼돈으로부터 날 구해 준다 내가 안경을 쓰면 안개들이 걷히고 아프리카 코끼리 들소떼가 막 몰려온다 안개가 몰려와 코끼리도 잡아먹고 들소떼도 잡아먹고 아프리카도 잡아먹힌다 내안경과도 흡사한 대식가의 입나도 세상을 먹고 있는 거지 걸신들려

 

안경을 벗으면 세상들이 안개처럼 빠져나간다 건물들이 흔들리고 서 있는 길들마저 꺼져 도시에는 늙은 바람만 몰려다닌다 내가 통째로 삼킨 아프리카 코끼리가 안경알을 깨고 정글 속으로 달아난다 핏줄을 따라 들소떼가 빠져나가자 서 있기가 힘들다 나 흔들리고 있는거니 저 보기 싫은 빌딩들의 정글을 아직 벗어나지 못했니? 식인종들의 종친회의는 누가 해골지팡이를 집어던져 난장판이 되었지 미친 사람들을 잡아먹지 못하도록 어느파가 몰표를 던졌니 그 무식한 족장들의 추격대가 날 발견했을까 안개의 정글은 흰 나무들만 돋보기 안경을 쓴채 나뭇잎을 읽고 있다

 

안경을 벗으니 배가 고프다 안경을 쓸까 말까

 

 

 

나는 안경을 벗었다 썼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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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어곡[別於曲] 1 / 김일남

 

 

그대가 깃들고도 눈 맞는 가문비나무 숲처럼 오래오래 쓸쓸하다 천지엔 아득한 눈발을 몰고 길 재촉하는 바람이 언 손 부벼 길들을 부르다 깊은 산울음에 몸 숨기고 너와집집 한 채 눈보라에 떨고 있다

 

그리워할수록 폭설 그치지 않는 내 가만한 그대, 겨운 내가 뚜욱뚝 부러져 실한 가지 한 짐 가득지고 어두운 눈길을 비츨거리며 그대 부를까 불러볼까 무장무장 깊은 산울음 가문비나무 나무 사이로 산은 산을 불러 추운 눈보라 속으로 사라지고 그대 부르던 오랜 내 기다림은 눈과 눈들의 저 한사코 퍼붓는 눈발로 나를 가둔다 바라보면 그대 탁탁 튀는 불꽃 너머로 사위고 어지러운 발자국 함부로 남긴 채 쓰러진 나를 가만히 들추면 아아 잉걸 속, 다시 눈 뜨는 그대

 

그대가 깃들고도 눈 맞는 가문비나무 숲처럼 오래오래 쓸쓸한 것은 내 기다림에 익숙한 숲길과 그 기다림 속에 어느새 지어 버린 너와집 집 한 채 그대에게 내건 등불을 그대가 모르기 때문이다 가문비나무 나무숲 오오 너와집 내 그리움에 갖힌 오오랜 그대, 그리워할수록 퍼붓는 눈과 눈들의 희디흰 아우성이, 그리움이 지은 집 한 채 허물듯이 허물듯이

 

내 그리움에 갖힌 슬픈 그대

내 그리움이 울어버린 눈보라

눈덮힌 깊은 산 가문비나무숲

내가 지은 너와집

 

 

 

 

주머니 속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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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신문의 95년도 가을문예공모 당선자로 시부문에 <別於曲 1>을 낸 김일남씨(32), 소설부문에 <언어의 형식>을 응모한 문재호씨(28)가 선정됐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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