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나비정첩 / 안광숙(필명:안이숲)
문틈에 나비 한마리가 다소곳이 날개를 접고 있어요
놋쇠 장식으로 된 고운 나비로 태어나 제대로 한번 날아보지 못한 어머니의 봄이
여름을 건너뛰려 하고 있네요
종손이라는 이름에 걸린 가문 한 채 간수하느라 공중을 떠돌아 잔잔한 이곳에 뿌리를 내린 당신
방문이 열릴 때마다 낮은 발자국 소리에 묻은 녹슨 고백 소리 사뿐히 들려옵니다
솜털이 시작되는 고향에서 나비무늬 박힌 치마저고리 입고 의령장에 구경 가던, 팔랑거리는 속눈썹 사이로 가볍게 날아오르던
어머니의 원행엔 연지곤지 찍은 꽃들마저 고개를 숙였던가요
얘야! 시집와서 빗장을 지키는 게 평생의 일이었단다, 느리게 접힌 쪽으로 아픈 고백을 쟁여둔 어머니
다음 생에는 날개를 달고 태어나지 마세요
몇 겹으로 박제된 풍장의 어머니 쇳가루 떨어지는 서러운 날갯짓 소리 수없이 들었어요
빗장에 방청 윤활제를 솔솔 뿌리면 마당 귀퉁이의 세월에 퍼렇게 멍든 잡초가 피어오르고
당신은 눈코입이 삭아 자구만 떨어져 내립니다
붉은 눈물이 소리가 되어 공중을 묶어 놓고, 납작하게 접힌 마음을 일으켜 이제 편안하게 쉬셔요
여닫이에 꼿꼿한 등을 붙들린 지 수십 년, 뒷목부터 낡아가는 수의는 그만 벗으셔도 되요
염습을 마친 8월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겹겹이 에운 문틈 사이로 녹슨 쇠 울음소리 선명하게 들려오는 밤
당신의 평생 그 어디쯤에서 터지는 발성법을 익혀 이리도 가늘고 긴 곡비를 준비했을까
우리 한번은 서로를 열어야 하는데
어머니, 어느 쪽이 제가 돌아갈 입구일까요
[심사평] 오래된 사물에서 찾아낸 아름다운 시심
제11회 천강문학상 시부문에 전국에서 응모한 작품이 무려 2,300여 편에 이른다고 하니 천강문학상의 명성과 그 명성에 걸맞은 권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그 많은 응모작 중에서 예심을 거쳐, 본심에 넘어온 작품이 140편이다.
본심에 넘어온 밀봉한 큰 봉투를 열었다. 작품에 응모자의 이름은 없고 접수 번호만 적혀 있다. 혹시라도 모를 정실에 따른 심사를 미리 방지하자는 뜻일 것이다.
모든 작품을 세 번에 걸쳐 되짚어가며 읽었다. 한 편이라도 허술하게 넘어가거나 오독하는 일이 없도록 한 구절 한 구절 곱씹듯이 읽었다.
작품들을 다 읽고 나서 '이 많은 작품이 왜 모두 비슷한 성향, 비슷한 흐름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사유 공간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머리로 쓴 시만 있고, 깊은 서정이나 감성으로 독자의 가슴을 물들이는 시, 새벽 종소리처럼 영혼을 울리는 시는 보이지 않았다. 수다스러운 사변 때문에 지루할 정도로 긴 시만 있고, 언어를 응축하여 여백의 미를 보여주는 정갈한 시는 보이지 않았다.
요즘 시를 쓰는 사람들이 주문처럼 외우는 '낯설게 하기'에 너무 심하게 공감한 탓일까. 새롭고 기이한 표현이 넘쳐나고, 상상의 날개를 단 시상들이 관념의 세계를 종횡무진 횡행하는 시어들이 난무할 뿐, 새로운 발견이나 깨달음의 세계로 우화하는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한 작품들 앞에서, 나는 무엇을 공감하고 어떤 새로운 세계를 보아야 할지 몰라 머뭇거려졌다.
그런 가운데서 골라낸 작품이 <일각고래> <저녁의 꼬리> <가정> <나비정첩> 등 네 편이다. 골라낸 네 편을 되짚어가며 열 번쯤 읽은 것 같다. 한 줄 한 줄의 시상이나 한 편의 시에 일관되게 흐르는 생각과 바탕에 깔린 정서와 오묘하게 감추어 둔 혜안을 놓치지 않으려 유의하면서 읽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가정> <나비정첩> 두 작품을 놓고 고심했다. 두 작품 다 독자와 소통되는 언어로 이끌어 간 점이 맘에 들었고, 그러면서도 자기만의 표현과 시어를 적절히 구사하는 능력이 돋보였고,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시상에 집중하는 사유의 일관성이 믿음직했다.
<가정>은 다문화 가정에서 김장하는 가족의 모습을 배경으로 삼았다. 이 장치만으로도 이 시가 보여주고자 하는 현실 감각이 두드러진다. 뻣뻣하던 김장감에 소금을 뿌려 그 소금이 단단한 쪽과 부드러운 쪽을 오가면서 단단한 성질 절여질 때를 기다리는 시간을 거쳐 이국땅에서 온 저들도 곧 이렇게 버무려질까 하고 시상의 가지를 뻗어 가는 솜씨가 능숙하다.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가슴에 까치놀처럼 물드는 서정의 침윤이 부족하여 끝내 <나비정첩>의 손을 들고 말았다.
당선작으로 뽑은 <나비정첩>은 시어가 생경하지 않고 시상이 난삽하지 않고 정갈하면서도 붓에 듬뿍 묻힌 먹물처럼 마음속에 번지는 발묵이 고운 선을 남긴 작품이다.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온 여닫이 옷장의 나비 정첩이 오랜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녹슬어 가는 모습에서 어머니의 한 생을 보는 딸의 마음이 아련한 슬픔으로 젖어든다. "놋쇠 장식으로 된 고운 나비로 태어나 제대로 날아 보지 못한 어머니의 봄"을 떠올리면서 "여닫이에 꼿꼿한 등을 붙들린 지 수 십 년"인 어머니의 생애를 돌아보며 "납작하게 접힌 마음을 일으켜 편히 쉬셔요"하고 어머니의 타계 앞에서 나비 정첩과 어머니의 생애를 하나로 융합한다. 비교적 긴 행으로 이어졌으면서도 운율이 흐트러지지 아ㅣㄶ은 것도 이 시에 내재한 정서의 흐름이 유연함을 방증한다 하겠다.
오래된 사물의 아름다움 속에서 새로운 시심의 아름다움을 찾아낸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시류에 휩쓸리지 말고 자기 세계를 끝까지 견지해 산봉우리 하나를 이루는 좋은 시인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 심사위원 김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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