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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이 나를 만지기 시작했다 / 최경은

 

  

이삿짐을 싸다가 텅 빈 사무실 벽을 바라본다 긁히고 패인 울퉁불퉁해진 벽,

갈라진 벽에 칠이 벗겨져 알 수 없는 낙서들이 새겨있었다

 

벽을 경계로 집기들이 가려진 밀폐된 공간 속에 비밀스런 말들이 숨어있었다.

사나운 짐승이 되어 서로를 가로막던 벽, 서로 난감한 표정으로 돌아서야 했다

 

웅웅거리던 말들이 벽을 타고 스멀스멀 구석으로 번진다 다독이며 위로하듯

위선적인 말들이 벽을 키우고 있었다

 

벽을 사이에 두고 책상에 앉아 눈알만 굴리던 사람들, 서로 관심이 없어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들이 바닥에 굴러다니고

 

벽 몰래 은밀히 벽이 되어가는 얼굴들

침침해진 눈,

 

눈을 감고 벽을 만졌다

내가 만져졌다

 

무엇이 간지러운지

자신을 가두었던

벽에서 튀어나온 나를 본다

 

벽이 나를 만지기 시작했다  

 

 

 

    

[당선소감]  

 

무심결에 받은 전화 한 통화

 

 계속해서 이어지는 코로나19로 인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서로가 서로를 의심해야 하는 요즘,

돌아가는 세상에 대해 사람들과 이야기 하는 중에 당선 통보를 받았다.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살았던 시 속에서의 설렘과 동시에 머릿속에 지워왔던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지나온 시간이 자신과의 싸움이라 생각하며 견뎌왔던 일들이 가슴 속에 꿈틀대고 있었다

 

고통을 밀어내기 위해

고통을 다시 품기 위해

마음속 머물고 있는 알 수 없는 또 다른 어떤 이유에 대해

써왔던 습작들

오래도록 기다려온 날이 오늘에서야... 기뻤다.

꿈틀대는 흔적들을 지워가며 다시 써야 하는

그동안 내가 써야 할 글들이 무궁무진하게 많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창밖에는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나뭇잎들은 새순을 피어 올리며 희망의 소리를 재촉하고 있다

 

시로 인해 가족들 간에 이해하는 마음이 더 깊어졌고, 함께 공부했던 여러 선생님과 박남희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 전하고 싶다.마지막으로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 인사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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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서정적 구체와 언어의 투명함

 

2020년 제4회 한국NGO신문 신춘문예에는 참으로 많은 응모작이 접수되었다. 심사위원들은 예심을 통과해온 작품을 읽어가면서, 매우 개성적인 시간을 쌓아왔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내면의 흐름이나 일상 쪽 구체성을 더욱 시 안쪽으로 끌어들인 결실도 많아 퍽 미더웠다. 그리고 시인 개인의 경험적 구체성에 심의를 쏟은 실례도 많았음을 부기한다. 많은 응모작 가운데 심사위원들이 주목한 이들은 모두 세 분이었는데, 짧지 않은 토론 끝에 심사위원들은 최경은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물론 함께 논의된 응모자 가운데 황신의 풍경 제작소 등은 일상의 감각을 모자이크하는 데 퍽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었다. 내면의 출렁임과 그로 인한 반응의 연쇄가 진정성과 상호연관성을 지니고 있었다. 가족을 비롯한 타자들에 대한 기억의 구체성을 높였다. 그리고 권수인의 검은 돌 등은 꽤 밀도 높은 관찰과 표현이 장점으로 지적되었다. 구체적 소묘의 안정감을 보여주었는데, 특별히 어둠의 심장을 겨눌 역동성과 그것을 감싸고 있는 쓸쓸함의 감각적 구체성이 컸다. 그러나 심사위원들은 궁극적으로 최경은 의 벽이 나를 만지기 시작했다를 당선작으로 정했다. 구체성과 깔끔한 표현이 높이 평가되었고, 착안과 형상화 과정이 매우 의미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다는 판단을 받았다. 보이지 않는 공간에 스며있는 을 찾아 그 안에서 숨겨진 를 발견해가는 과정이 서정시의 본령을 잘 보여주었다. 서정적 구체와 언어의 투명함을 동시에 살리고 있었다.

 

당선작에 들지는 못했지만, 개성적 사유와 언어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온 많은 응모자가 있었다는 점을 덧붙인다. 다음 기회에 더 좋은 성취가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응모자 여러분의 힘찬 정진을 당부 드린다.

 

심사위원: 김종회(문학평론가, 전 경희대 교수),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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