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의 목은 갈데없이 / 이병일
기린의 목엔 광채 나는 목소리가 없지만,
세상 모든 것을 감아올릴 수가 있지
그러나 강한 것은 너무 쉽게 부러지므로 따뜻한 피와 살이 필요하지
기린의 목은 뿔 달린 머리통을 높은 데로만 길어 올리는 사다리야
그리하여 공중에 떠 있는 것들을 쉽게 잡아챌 수도 있지만
사실 기린의 목은 공중으로부터 도망을 치는 중이야
쓸데없는 곡선의 힘으로 뭉쳐진 기린의 목은
일찍이 빛났던 뿔로 새벽을 긁는 거야
그때 태연한 나무들의 잎눈은 새벽의 신성한 상처와 피를 응시하지
아주 깊게 눈을 감으면 아프리카 고원이,
실눈을 뜨면 멀리서 덫과 올가미의 하루가 속삭이고 있지
저만치 무릎의 그림자를 꿇고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기린의 목과 목울대 속으로 타들어가는 갈증의 숨을 주시할 때
기린의 목은 갈데없이 유연하고 믿음직스럽게
아름답지 힘줄 캄캄한 모가지 꺾는 법을 모르고 있으니까
나무는 나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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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서정시란 어떤 대상을 빌려 내면 고백, 즉 시인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대상의 선택과 출현, 내면 고백은 하나로 자연스럽게 빚어져야만 한다. 한 시인의 어법을 빌리자면, "나는 뱀을 빌려 고백하겠다. 나는 뱀의 성질이 아니라 뱀의 모양을 빌릴 수 있다."(김행숙, 『사춘기』) 대상과 표상의 적합성이 이루어질 때 시의 깊이도 생성된다.
그러니 시의 대상을 선택하는 찰나 시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40여 분의 작품들이었다. 저마다 다채로운 개성으로 시적 진경에 가 닿았기에, 그걸 한 편 한 편 읽어내는 일이 즐거웠다. 최종심에서 다뤄진 시들은「기린의 목은 갈데없이」,「가막조개」,「꽃마리」,「별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방식」,「사랑하는 이에게」,「미안의 피안」 등 여섯 분의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의 수준이 기대에 비해 상당히 높아서 놀랐다. 다들 시의 기본을 충실히 다진 단단한 시편들이었다. 앞으로도 더 좋은 시를 써낼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하다고 기대되었다. 그중에서 「기린의 목은 갈데없이」외 작품을 낸 응모자가 빼어났다.
처음 시를 읽을 때 왜 하필이면 기린일까, 하는 의구심이 없지 않았지만 "곡선의 힘으로 뭉쳐진 기린의 목"에 대한 상상력은 단박에 독자를 아프리카 고원으로 안내한다. 기린은 강하기보다는 따뜻한 피와 살을 가진 연약한 짐승이다. 그 길고 아름다운 목을 가진 기린이 사는 아프리카 고원은 약육강식의 원리가 엄연하고 "덫과 올가미"들이 널린 곳이기도 하다.
아프리카 고원이 먹고 먹히는 정글 법칙이 엄연한 신자유주의의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자본 논리가 판치는 현실에 대한 강력한 은유로 탈바꿈할 때, 우리 심사자들은 이 시인의 솜씨에 감탄했다. 당선작과 함께 응모한「진흙여관」,「풀피리」,「녹명」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언어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 독창적 발상, 사물에 대한 해석력, 능란한 시행의 배열 등 어느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다. 빼어난 시편으로 수주문학상을 수상한데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 심사위원 고형렬, 장석주(글)
아흔아홉개의 빛을 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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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주문학상운영위원회(위원장 구자룡)는 제16회 수주문학상 당선자로 이병일(33세, 서울) 시인을 선정했다고 20일 밝혔다
수주문학상은 부천이 낳은 민족시인 수주 변영로 선생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매년 전국 공모를 실시하고 있으며 총상금은 1000만원이다.
이에 앞서 지난 8월 1일~20일까지 접수된 331명의 작품 2.800여 편이 예심(40명 작품 선정)과 본심 (심사위원: 장석주 시인, 김명인 시인)을 거쳤으며, 시상식은 오는 10월 28일 (화) 오후 3시, 부천시청 5층 만남실에서 개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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