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牧丹 / 류흔
1
모란시장의 명물은 누가 뭐래도 모란이다
붉은 꽃이 피는 서쪽 통로에 비명이 즐비하다
까딱,
지적指摘 한 번에 태어나는 죽음들
사시사철 살아있다는 것이 무료해
목에 칼 들이는 것들
살아온 날이 초 단위로 표시되는 전자저울 위,
애완의 추억 한토막이 척 올라앉았다
손님, 한 송이만 사가세요.
방금 꺾어서 싱싱합니다.
비좁은 화단 안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생화生花들이
오전에 꺼낸 동료의 내장을 먹는다 먹어야 산다, 살아야
죽을 수 있기에,
2
통로를 지나는 사람은 모두 면식범이다
띄워쓰기없는단골들,
장수원보신탕원조호남집보신탕언니네보신탕산골흑염소문형산토끼만수건강원여수토종닭오리현대건강원여주흑염소충남닭집영남흙염소형제흙염소영광축산장흥상회백세건강원전주건강원전남건강원전남가축무등흑염소소성도흑염소모란만물상회서울건강원부안가축장수건강원태양건강원순천가축장터건강원호남건강원원조건강원고향건강원백제약초 앞을 지나며
보았다, 통째 그을린
검은 유두에서 흐르는 흰 젖을
두고 온 새끼가 파고들어도 물릴 수 없는 익어버린 젖내와
공포에 오줌 지린 비린내를
보았다, 점점이 뿌려준 꽃잎을
울혈의 포인트를,
3.
맞닥뜨린 골목에서
사람이 되돌아가던 시절이 있었다
한쪽 다리를 들어 전봇대에 영역표시를 하던 요의尿意의 한때를
생각하면 저절로 웃음이 났다,컹컹
울음이 났다 쇠창살 쪼개놓은 하늘을 물고
늘어지지도 늙어지지도 못하는 시간을 어쩌나,
예절을 배웠고 복종을 알아서
길길이 날뛰지도 못하는 이 심사를 어찌하나
이제는 하늘이 내려와 물고 있는 이빨과
이빨이 물고 있는 혀를
혀에서 돋아나는 떨림을
그 정밀精密을,
4
어떤 각오가 죽음을 덮치는가
말하라, 꽃이여
모란이 피기까지는*
쿵, 쿵, 떨어지는 꽃잎에 쑥대밭이 된 통로와
부서진 화단을 탈출하는 개들과
돌아온 개를 얼싸안은 주인과
되찾은 목줄과 양은밥그릇을
그릇에 수북 담기는 목 메임을
아직은 살아있으므로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먼 훗날의 일이라 생각했던 것인데
덜컹,
열리는 철창 틈으로 지문指紋이 다가왔다
*김영랑
책들의 거처 / 금명희
책에 대해 물어 본 적이 없었네
손톱만한 어린잎들은 자라 숲이 되었네
숲 근처를 지날 때 잎사귀들은
내게 휘파람을 불어 주었네
몇몇의 잎들에게 호명을 하면
불린 이름들이 손을 흔들며 따라 나왔네
심심한 잎들에게 말을 붙였네
잎사귀들은 입을 열어
또렷한 발음으로 대답을 했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책갈피를 넘기며 말을 했네
나는 나무 냄새가 좋다고 코를 킁킁거렸네
잎사귀들이 소파에 앉아 한참 떠들었네
행간을 걸어 다니느라 부어오른 발목을
나무 그늘에 쉬게 했네
햇살을 갉아 먹은 잎들이 푸른똥을 갈겼네
먹다 남은 햇살은 냉장고에 보관 해두었다가
해동시켜 공복에 먹을 거라 했네
무성한 숲이 높은 성처럼 든든해 보였네
숲으로 들어간 마른 갈증이
밤새 또 다른 길을 내고 있었네
앵두나무 밑에서 잠을 깬 개가 / 이예미
운치리* 어느쯤의 강기슭으로 나가
붉은 혀끝으로 동강 몇 방울 흘린다
한 때 나는 그 강을 닮은 한 사내를 만났었다
노을들이 강으로 이끌려가듯
나의 가슴도 그에게 끌려가 붉어진 적이 있었다
모든 게 그 강 때문이었다
나의 사랑이 그 상류 어딘가에서
물방울을 일으켜 시작되었듯
그에게 이르는 길은 끊임없는 익명이었다
몇 번의 우기가 지나쳤지만 뿌리들은 젖지 않았다
그해 가을 나는 처음으로
그에게서 모래들의 이동을 보았다
모든 세월들은
느티나무처럼 오래도록 눈에 띄어야 잊혀지는가
침묵은 곧 오후 속으로 뿔뿔이 사라졌고
그 강, 아니 그 산에
지금은 생사의 골짜기를 넘나들고 있을 사내
어쩌면 운치리 어느 쯤에서 놓아야 했을 그 사내
더는 이별할 수도 없는 그를
오월의 앵두나무 가슴에 옮겨 놓듯
커다란 느티나무 하나 땅 속 깊이 심어놓는다
*강원도 정선에 있는 강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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